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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는 연일 조선 민중에게 훈시하고 있었다. 그는 자유주의와 개인주의는 분열과 혼란만을 가중시킬 뿐이라고 말하면서 ‘이기적이고 나태한 겁쟁이’인 조선 민중은 엘리트 지도자에게 복종하면서 집단에 봉사하는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김영세는 이광수가 말하는 ‘이기적이고 나태한 겁쟁이’이가 누구일지를 생각해 보았다. 어느 사회나 그런 사람은 있게 마련이었다. 그런데 왜 이광수는 조선 민중 전체가 그런 것인 양 말하는지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이광수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이광수가 발표한 글을 구할 수 있는 대로 구해 읽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광수가 존경하는 듯해 보이는 안창호의 글도 대부분 읽어 보았다.

김영세는 두 사람의 글을 구해서 읽고 분석하느라 그 해 겨울을 모두 써 버렸다.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독서의 범위가 자꾸 넓어졌다. 그는 이광수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안창호뿐 아니라 조선 계몽운동의 실상을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독서와 요약· 정리에 몰두하느라 서울에 가는 조카 문수의 유학 준비를 거의 거들어 주지도 못했다.

이인화라는 젊은이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왜냐 하면 그는 실존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1920년 염상섭이 쓴 <만세전>이라는 소설의 주인공이었다. 그리고 그 소설은 일인칭 서술이었으므로 주인공의 이름이 나오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러기에 이인화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터였다.

3·1운동 전 겨울 이인화는 동경 W 대학 문과에 재학 중이었다. 그는 아내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는다. 그는 일본인 여급 시즈꼬를 만나러 단골 카페로 간다. 기차 시간까지 남는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즈꼬를 앞에 앉혀 놓고 술을 마신 그는 그녀에게 목도리를 선물한다. 그는 시즈꼬를 예쁘고 영리한 계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한 번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 보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이인화는 시모노세키에 내리자 일본인 형사에게 시달림을 받는다. 조선인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부산을 거쳐 김천에 있는 형 집에 들르기로 했다. 형이 금테 모자에 망토를 두르고 역에 마중 나와 있었다. 형 집에는 젊은 여자가 하나 더 들어와 살고 있었다. 형수가 아이를 못 낳아 새로 들였다고 했다. 형은 법이 바뀌어 개인 산소를 못 쓰게 되었다고 푸념했다.

그는 서울 행 기차에 올랐다. 차 안에서 그는 일본 형사에게 비굴하게 구는 조선인들을 보게 된다. 그러면서도 그는 가까운 자리에 있는 예쁘장하게 생긴 소녀에게 관심이 간다. 그는 소녀가 기생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집에 오자 병든 아내는 슬며시 눈을 뜨고 생그레 웃는 듯하더니 주룩주룩 눈물을 흘렸다. 아내의 병은 유종(乳腫)이었다. 일찍 양의에게 보였더라면 치료가 가능한 병이었다. 아내는 죽었고 시즈꼬에게서 편지가 왔다. 그는 시즈꼬에게 100원을 부친다. 그것으로 시즈꼬와의 관계가 청산되는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사람들은 온통 묘지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 살고 있는 곳이 묘지인 줄을 모르고  있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는 일본으로 가기 위해 서울역에 나간다. 큰집 형이 배웅을 해 주었다. 큰집 형이 “내년에 숙현(재혼) 해야지”라고 그에게 말했다. 이인화는, “이제 겨우 무덤에서 빠져 나가는데요” 라고 말하며 웃는다.

김영세가 보기에 이 소설은 일본 유학생을 등장시켜 조선 지식인의 이기적이고 허무주의적인 경향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겠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재미없는 소설이긴 하지만 사실성이 있는 글이라고 김영세는 생각했다. 이인화는 이광수가 말한 ‘나태하고 이기적인 겁쟁이’의 전형이었다. 염상섭은 당대 유학파 지식인의 세계관과 인격을 비판해 보고 싶었던 거라고 할 수 있었다. 요컨대 염상섭의 소설은 ‘나태하고 이기적인 겁쟁이’의 혐의를 조선 민중 전체에게 돌리고 있는 이광수의 주장과는 차이가 있었다.

김영세가 <만세전>을 읽은 후 70년쯤 되는 1997년 동명이인으로 이인화라는 실존 인물이 조선일보에 글을 실었다. 현대의 이인화는 이제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고 저명한 소설가이며 여성 계몽 교육의 선두라고 자처하는 이화여자대학 교수이다.

1922년 이광수가 잡지 <개벽>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했을 때 그 반응은 일파만파의 충격이었다. 이광수의 집에 칼을 든 청년들이 난입했으며 <개벽>사의 기물들이 파괴되었고 이광수를 강사로 초빙했던 사람까지 습격당했다.‘민족개조론’이 민족 개조의 절박함을 강조하기 위해 한국인의 민족성에 대한 모멸적인 비판을 감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논문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수의 세론을 두려워하지 않고 한 사회가 가질 수 있는 극한의 비전을 제시했던 작가 이광수의 용기에 진정한 외경의 마음을 갖게 된다. 이광수야말로 시대정신이‘근대의 초극’이 아니라 ‘근대의 재평가’로 돌아설 때마다 끊임없이 재론될 전형적인 근대인이다.

필자가 이광수를 처음 만난 것은 열한 살 때였다. 필자는 우연히 집의 책꽂이에서 그의 <유정>을 뽑아 읽었다. <유정>은 나에게 소설이 만화보다 재미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 놀라운 사건이었으며, 그날부터 이광수는 나의 확고한 우상이 되었다. 

이광수는 조선조 내내 소외당했던 평안도 출신의 고아였다. 나보다도 더 한심한 이런 고아가 글을 잘 써서 최고의 지식인이 되고 민족의 교사가 되었던 것이다. 이광수가 사회의 밑바닥에서부터 시대의 닦달을 겪으며 기어 올라간 성취의 드라마는 필자에게 가장 좋아하는 것에 각고면려를 쏟아 부어 자신을 완성할 수 있는 근대의 자유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일제 말기의 친일 행적이 가져온 그의 불행한 말년은 근대가 부여한 자유의 공포를 가르쳐주었다. 해방이 되자 이광수는 민족 반역자로 몰려 죽을 때까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자가 된다. 그 전율할 만한 근대의 엄숙성이 모더니티 혹은 근대성이 논의되는 지금 새삼 이광수의 인생과 문학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김영세가 숨을 돌리며 다소 여유를 찾은 것은 논이랑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봄이었다. 그가 한국 계몽주의자들의 글에서 처음 느낀 것은 세계관의 왜곡과 역사의 은폐 이전에 일단 그들의 문장이 부정확하다는 것이었다. 이광수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글이 어법과 어휘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없었다.

문장가라고 회자되는 최남선의 문장에도 과장되고 애매한 어휘가 빈번히 쓰이고 있었다. 이것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유학과 한학을 전공한 학자들의 글에 비해서 해외 유학을 한 계몽주의자들의 글에 어렵고 생소한 한문구가 더 많이 쓰인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계몽주의자들은 자신의 주장을 정확히 전달하기보다는 자신을 멋있게 보이게 하려는 목적으로 글을 쓰는 것 같았다.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극복하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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