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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상점의 진열대에 놓인 쇠고기.
 미국 상점의 진열대에 놓인 쇠고기.
ⓒ 강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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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가끔 현실과 인식을 혼동한다. 어떤 사실이나 견해를 비판하기 위해 "그런 이야기는 난생 처음 듣는다"고 말하는 경우가 그렇다. 내가 어떤 사실을 모른다고 해서 그 사실이 허위가 되지는 않는다. 처음 듣는 정보가 허위라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정보는 모두 허구가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미국인들이 자국산 쇠고기를 마음놓고 먹는다고 해서 그 고기가 안전해지지는 않는다. 한국 정부가 온갖 수단을 동원해 민심 달래기에 나서고, 그 결과 국민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광우병 위험은 조금도 줄지 않는다. "쇠고기는 안전하다"는 영국 정부의 설득이 국민들을 광우병에서 구하지 못했듯이 말이다.

영국의 광우병 확산이 줄기 시작한 것은 정부가 '민심 달래기'가 아닌 '문제 해결'에 나선 후였다. 한국 정부가 국민과의 소통을 말하면서도 국민으로부터 계속 멀어지고 있는 것은 이 차이를 혼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이 요구하는 것은 '문제 해결'이지 '달래기'가 아니다.

한국의 국민들은 학교에서는 세계 최고의 학습량, 일터에서는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에 시달리는 사람들이다. 그런 이들이 밤에도 쉬지 못하고 한 달 넘게 촛불을 들고 있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국민 건강을 위협할 수 있는 수입 식품의 위생 조건을 바로잡으라는 것이다.

그런데 정부가 '대책'으로 제시한 것들을 보라. 왜 '친박' 이야기가 나오고, 왜 '세금 환급'과 '인터넷 여론경보 시스템' 이야기가 나오는가? 

무지 속의 위험

최근 한 미국인 종교 지도자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몇 년간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인연을 맺게 된 사람이었다. 한국 사회에 관심이 많은 터라, 한국의 촛불 시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을 꺼냈다.

"신문을 봐서 압니다만, 좀 지나친 반응 아닌가요?"

나는 대답 대신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은 미국 쇠고기가 안전하다고 생각하시나요?"
"물론이지요."

그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이내 표정을 살피며 "아닌가요?"하며 작은 소리로 되묻는다.

버시바우 주한 미국 대사.
 버시바우 주한 미국 대사.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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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석 달 전에 있던 미국 사상 최대의 쇠고기 리콜(6만5000톤)을 떠올리며, '지난 6개월간 미국 육가공업계의 제품 회수(리콜)가 몇 번 정도 있었는지 아시느냐'고 물었다.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10번이 넘는다'는 말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는 미국에서 광우병이 몇 번 발생했는지도 알지 못했다.

버시바우 주한 미국 대사는 '미국 쇠고기는 안전하다'고 강변하며 '한국인이 과학에 대해 더 배우길 바란다'고 말한 바 있다.

나는 버시바우 대사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자국산 쇠고기 문제에 대해 잘 모르고 있거나 관심이 없을 뿐이다. 많은 미국인들이 그렇듯 말이다.

과학에 대해 더 배울수록 알게 되는 것은 미국 육류업계와 정부 측의 안전 관리가 대단히 부실하다는 사실 뿐이다.

미국 업계의 자율 규제? 허깨비일뿐

한국 정부는 미국 육가공업계의 '자율 규제'를 궁극적 해결책으로 간주한다. 미국 업체가 30개월 이상을 수출하지 않도록 자율 합의를 하고, 미국 정부가 이를 보장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한국 정부가 이 말을 꺼냈을 때, 미국 정부는 무척 당황했을 것이다. 이해가 안 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업계 차원의 '자율 규제'라는 것 자체가 생소한 나라다. 그런데 업계의 자율 규제를 정부가 보장하라니 도대체 무슨 말인가? 자율적인 결정을 외부에서 '보장', 다시 말해 '강제'할 수 있는 제도는 한국 고등학교의 자율 학습밖에 없다. 

프린스턴대학교 경제학과 교수인 폴 크루그먼의 최근 <뉴욕타임스> 칼럼은 한국 정부가 제안한 '자율 규제'라는 것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발상인지를 말해준다. 

프린스턴대학교 교수이자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인 폴 크루그먼. 그는 자본주의를 건강하게 지켜가기 위해서 정부의 개입과 규제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프린스턴대학교 교수이자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인 폴 크루그먼. 그는 자본주의를 건강하게 지켜가기 위해서 정부의 개입과 규제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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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캔자스의 한 축산업자가 광우병 전수 검사를 하게 해달라고 정부에 요구한 적이 있다. 전수 검사를 통해 (미국 광우병 발생으로 중단되었던) 일본으로의 쇠고기 수출을 재개할 수 있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상식적으로 판단하면, 부시 정부로서는 모범적인 자율 규제라고 칭찬하며 박수라도 쳐야 할 판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그 업체의 광우병 검사를 허락하지 않았다. 다른 업체들이 전수 검사에 대한 소비자들의 요구가 자신들에게도 쏟아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 2008. 6. 13)

광우병을 전수 검사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은 소 한 마리당 2만5000원 정도다. 한 업체가 자기들의 비용으로 검사를 하겠다는 것까지 업계가 자율적으로 나서서 방해한 것이다. 이처럼 미국 업계의 자율 규제는 자신들의 이익을 해치는 요소를 차단하는 방식으로 작동할 뿐이다.

정부의 '보장'? 고양이에게 생선 맡기기

정부의 보장 제안도 우습기는 마찬가지다. 미국에서 농축산물을 관리하는 주무부서는 농무부(USDA)다. 이들이 육류업계에 대해 행사할 수 있는 권리는 거의 없다. 판매된 제품이 식중독처럼 국민들의 건강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칠 때조차 업계의 자발적 회수를 권유할 수 있을 뿐이다.

게다가 농무부의 최고 결정권자들은 업계의 이해를 철저히 대변하는 사람들로 꾸려지기 일쑤다. 크루그먼의 <뉴욕타임스> 칼럼을 계속 읽어보자.

"더 중요한 점은, (정부의 식품 안전 관리라는 것이)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것을 제도적으로 보장해 왔다는 것이다. 2003년, 미국에서 광우병이 터졌을 당시 농림부를 이끌던 수장은 앤 베너먼이었다. 그는 그 직책에 오르기 전 식품업계의 로비스트를 맡고 있었다. 당시 농림부가 위기에 대처한 방식은 광우병 위험을 지속적으로 축소 발표하면서 소의 광우병 검사를 늘리라는 요구를 묵살하는 것이었다. 농림부의 이런 태도는 업계의 이해 관계에 따른 움직임으로 보였다."     

2월 25일 국회에서 열린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앤디 그로세타 미국 축산육우협회 회장(이 대통령 뒤편 카우보이 모자 쓴 이). 미국 축산육우협회는 미국 농무부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농무부에는 축산육우협회 출신 인사들이 대거 진출해왔다(자료 사진).
 2월 25일 국회에서 열린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앤디 그로세타 미국 축산육우협회 회장(이 대통령 뒤편 카우보이 모자 쓴 이). 미국 축산육우협회는 미국 농무부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농무부에는 축산육우협회 출신 인사들이 대거 진출해왔다(자료 사진).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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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정부가 식품 안전 관리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은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식품안전 관리 부실로 인한 사고는 공화당 집권 이후 급속히 늘었다. 크루그먼은 이를 '탈규제'를 내세운 보수 정치 세력이 권력의 중심부로 진입한 결과로 해석한다. 보수 정치 세력은 지속적으로 기업 규제를 풀고 보건 관련 예산은 축소시켜왔기 때문이다.

방임주의가 불러온 안전 관리의 부실은 <비즈니스위크> 최신호(6월 23일자)도 지적하고 있다. 이달 초에만 해도 월마트·맥도널드·버거킹 등에서 팔린 토마토 식재료를 먹고 30여개 주에서 400명가량이 식중독 증세를 보였다. <비즈니스위크>는 이 살모넬라균 식중독 사고를 보도하면서 미국의 식품 안전 관리가 얼마나 부실한지를 파헤쳤다.

이 보도에 따르면, 식약청(FDA)의 현 상황은 식품 관련 사고를 예방하기는커녕, 터진 사고를 수습할 형편도 못 된다는 것이다. 식품 교역의 세계화로 국민들의 식탁에 오르는 음식은 다양해졌으나, 예산과 인력 부족 때문에 손을 쓰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 추산에 따르면, 식약청이 현 재정 상태로 미국과 관련을 맺고 있는 국내외 식품업계를 조사하기 위해서는 1900년이 걸린다고 한다. <비즈니스위크>는 식약청 직원들의 헌신적인 '개인 희생'이 없다면 이 정도의 안전 관리도 어렵다고 지적한다. 예산 부족으로 직원들이 개인 주머니를 털기도 하고, 근처의 대학 연구소에서 연구실을 빌리기도 한다는 것이다.

육류업계 비판하면 '테러리스트'?... 비폭력 행위도 처벌

쇠고기 가공처리를 하는 웨스틀랜드 미트컴퍼니의 홀마크 미트패킹 도살장에서 노동자들이 도살소를 몰아넣으면서 소를 발로 차거나 포크리프트 블레이드로 때려 소들이 고통 속에 비명을 지르는 장면의 비디오 장면이 나왔다. 사진은 캘리포니아 치노 홀마크미트 패킹도살장 주자장에서 순찰하는 민간경비원.
 쇠고기 가공처리를 하는 웨스틀랜드 미트컴퍼니의 홀마크 미트패킹 도살장에서 노동자들이 도살소를 몰아넣으면서 소를 발로 차거나 포크리프트 블레이드로 때려 소들이 고통 속에 비명을 지르는 장면의 비디오 장면이 나왔다. 사진은 캘리포니아 치노 홀마크미트 패킹도살장 주자장에서 순찰하는 민간경비원.
ⓒ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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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4월 16일, 미국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인 <오프라 윈프리 쇼>는 하워드 리먼이라는 한 시민운동가를 초청해 광우병 문제를 다뤘다. 미국에서 소가 육류 사료를 먹으며 사육되는 과정을 소상히 들은 윈프리는 "다시는 햄버거를 먹지 않겠다"고 말했다. 개인적인 견해가 쉽고 오가는 토크쇼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발언이었다.

그러나 육류업계는 이 발언을 가볍게 넘기지 않았다. 업계는 방송사에 거액의 광고를 중단하는 것으로 항의했다. 그러고는 윈프리와 리먼 개인에게 1000만 달러가 넘는 거액의 소송을 걸었다. 윈프리와 리먼은 우여곡절 끝에 승소했지만, 재판 과정에서 적지 않은 시간 낭비와 법정 출두 등의 고통을 겪은 뒤였다.

하지만 육류업계의 공세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2006년 11월, 기묘한 이름의 법이 통과되었다. '동물기업테러법(Animal Enterprise Terrorism Act)'.

도대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법일까? 내용을 한 번 살펴보자.

이 법에 따르면, "동물 기업 운영에 피해를 주거나 방해할 목적으로" 특정인에게 "겁을 주거나" 육류기업에 "재산(동물과 기록 포함)상의 피해"를 끼치는 것은 "동물기업 테러" 행위로 처벌 대상이다.

개인 재산을 파괴하거나, 특정인에게 협박이나 위해를 가하는 행위를 처벌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왜 동물기업이 특별히 별도의 법으로 보호를 받아야 하며, 이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이 '테러 행위'로 간주되어야 할까?

이 법의 진정한 목적은 법 조항을 더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이 법은 "인명이나 재산상의 피해가 없는 경우"라도 기업의 "수익에 손실을 끼칠" 가능성이 있는 "비폭력 행위"도 징역과 벌금형을 부과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정부가 육류기업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시민의 불복종 운동까지 처벌할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시장 불신' 불러온 이 대통령의 맹목적 친시장주의

미국의 언론학자 맥체즈니는 "자유주의는 민주주의를 보장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자유'가 '기업이 이익을 극대화할 자유'라면 더욱 그렇다. 상업적 이윤 추구가 미국의 민주주의를 위협한다는 맥체즈니의 경고를 '동물기업테러법'만큼 잘 보여주는 것도 없다. 육류기업을 잘못 비판했다가는 거액의 소송은 물론, 감옥 신세까지 져야 하는 사회에서 소비자들의 안전 의식이 무뎌지는 것이 놀라운 일일까?

경제학자인 폴 크루그먼은 맥체즈니보다 한 발 더 나아간다. '탈규제'로 대표되는 방임주의가 오히려 시장자본주의를 위협한다는 것이다. 소비자들이 상품에 대한 완전한 정보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경쟁시장의 기본 조건이다. 그러나 기업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합법적으로 정보를 차단할 수 있게 되었고('동물기업 테러법'은 정보 유출도 처벌한다), 정부는 이들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미국식 탈규제를 '선진화'로 내세운 이명박 정부는 그 나라에서 가장 존경받는 경제학자 중 한 명인 크루그먼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는 자본주의를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오히려 정부의 몫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식품 안전 관리 및 사고 예방에 정부 지출을 늘리고, 철저한 법적 장치를 마련해 기업들이 사익을 위해 국민 보건을 희생시키지 못하도록 규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건강뿐 아니라 수출 시장을 지키기 위한 길'이라는 것이 크루그먼의 말이다.

한국 정부는 기업의 수출 증대를 위해 국민 보건을 사실상 포기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 어리석은 결정에 분노하는 국민들에게 대책으로 내놓은 것이 '외국 기업의 자율에 맡기자'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의 맹목적인 친시장 정책이 '시장 불신'이라는 가장 반자본주의적인 결과를 낳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미국과 관계 복원을 위해 쇠고기 시장을 전면 개방한 결과가 관계 악화로 나타났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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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동물기업테러법, #미국육류업계, #미국쇠고기, #식품 안전, #자율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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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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