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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구대와 아이 과자를 먹고 있는 아이 옆으로 폐허를 복구하기 위한 복구지원대가 지나고 있다
▲ 복구대와 아이 과자를 먹고 있는 아이 옆으로 폐허를 복구하기 위한 복구지원대가 지나고 있다
ⓒ 권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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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누가 권철씨한테 연락해 봐."

프라이드가 확고한 일본 잡지의 베테랑 편집자들은 동경 신주쿠 가부키쵸에 관한 기획을 세우면 대부분이 이런 운을 뗀다.

권철(41). 1994년 일본에 건너온 이래 지금까지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환락가 가부키쵸를 뷰파인더 너머로 담아내고 있는 한국인 포토저널리스트.

하나밖에 없는 정통 사진월간지 <DAYS JAPAN>과 <프라이데이><주간 포스트><월간 넉클즈> 등 그의 사진이 실리지 않는 일본의 주·월간지 매체는 거의 없다. 가부키쵸의 사진은 물론 5월에 있었던 나가노 성화 봉송, 우익 세력의 영화 <야스쿠니> 시사회 등 뉴스 현장에는 언제나 그가 있었다.

권철씨는 신규 가입이 하늘에 별 따기라고 불리는 일본 비주얼 저널리스트 협회(JVJA, 회원수 13명) 회원이기도 하다. 한국인으로서는 물론 최초다.

일본에서 잘나가는 포토저널리스트의 희망

권철 카부키쵸는 물론 재일, 한센병, 우토로, 탈북자등 다방면에 걸친 테마를 다루고 있는 포토저널리스트 권철
▲ 권철 카부키쵸는 물론 재일, 한센병, 우토로, 탈북자등 다방면에 걸친 테마를 다루고 있는 포토저널리스트 권철
ⓒ 박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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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프리랜서 저널리스트들의 천국이라고까지 불렸던 일본. 그러나 프리랜서로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을 정도로 입지를 구축한 프리랜서는 그다지 많지 않다. 설상가상으로 최근 일본 잡지시장은 불황 속에서 헤어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침체기.
그러나 그의 사진은 변함없이 잘 팔리고(?) 있다. <DAYS JAPAN>은 2008년 6월호에 2페이지짜리 '권철씨의 촬영기재' 기사를 실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권철씨가 마냥 카부키쵸만 찍는 게 아니라는 것.

"카부키쵸에서 사진 찍어서 번 수입으로 한센병, 우토로, 재일조선학교, 탈북자 등 제가 관심있는 테마를 계속 취재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중국 대지진도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던 것이 가장 컸죠."

8일 그의 동네(?) 가부키쵸의 한 음식점에서 만난 권철씨는 수십만의 사상자와 피해액을 낸 중국 쓰촨 대지진의 현장에서 5월 19일부터 일 주일간 자신이 직접 경험한 '희망'을 말해 주었다.

그가 가방에서 주섬주섬 꺼낸 40여 장의 사진에는 기존의 미디어에서는 볼 수 없었던 피사체들이 담겨 있었다. 그 사진들을 한 장씩 넘기면서, 권철씨가 왜 주목받고 있는지 그 일단을 엿볼 수 있었다.

재난 현장의 사진들에서 흔히 보아왔던 흙더미에 깔린 시체들, 아비규환의 비명, 처참하게 무너진 가옥과 학교들의 모습이 그의 사진에서는 사라져 있다.

그 고통의 주인공을 대신하여 재난 속에서 희망을 찾으려고 하는, 차이나 드레스를 입고 배시시 웃는 포즈를 취하는 어린 소녀와 텐트 밖에서 오순도순 음식을 만들고 있는 가족들의 순수한 모습이 사진 가득 메워져 있었다.

"들어가기가 힘들었어요. 워낙 보도 규제가 심해서. 쓰촨성 성도에서 맨양까지는 어려울 거 없었는데, 가장 검문이 심한 베이찬 입구에서 막혀 버렸죠. 가는 도중에 찍은 사진도 많고 해서 포기할까라는 생각도 했는데… 베이찬에 마련된 프레스 센터에 좀 머물다가 이건 아니다 싶더라구요."

폐허 페허가 된 골목길을 아이가 걸어가고 있다
▲ 폐허 페허가 된 골목길을 아이가 걸어가고 있다
ⓒ 권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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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검문소 돌파를 생각한 이유는 프레스센터에 모인 세계 각국의 보도진들, 특히 자신과 같은 업종에 있는 사진기자들의 행동 때문이었다고 한다.

"프레스센터에 각 나라 포토그래퍼들이 모여 있었는데, 피 흘리는 시체, 부상자 사진들 보면서 서로서로 '야! 너 특종 잡았다' '니 사진이 더 좋은데' 등의 대화를 합디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인간적으로 그렇더군요. 게다가 실제 검문소 저쪽은 보지도 않았으니 안쪽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도 모르죠. 그 안에는 또 무언가 다른 그림들이 있지 않을까 해서…."

권철은 고어텍스 점퍼와 소금물, 초콜릿, 나침반, 손전등을 구비해 출입금지 통제지역 옆의 지진으로 무너진 산자락을 탔다. 아직 여진의 공포가 남아 있던 5월 22일이었다.

"솔직히 여진 오면 죽겠구나 했습니다. 인적 없는 곳을 돌았거든요. 여진 와서 깔려도 아무도 오지 않을 테니까. 2시간 동안 때로는 포복하고, 때로는 멈추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지진 피해를 입은 조그만 동네더군요. 시체 썩는 냄새, 다 무너져버린 집 지붕. 처참했지요."

"시체 사진 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됐죠"

동네를 이리저리 살피던 그를 맞이한 것은 무너진 집터 기왓장 위에 서 있던 어린 소녀 천리(6)였다. 조금은 겁먹은 듯한 표정, 아니 넋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이쪽을 보는 그녀를 보고 권철은 주저 없이 카메라를 꺼내었다.

"말도 안 통하고 하니까, 그냥 무작정 찍고 봤는데, 조금 더 들어가니 복구지원대가 보이고, 마을 주민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천리 가족들과도 만났지요. 허가를 받지 않았으니까 떨리기도 했는데, 그냥 주민들하고 어울려 버리니 아무 제재도 없더라구요. 그 마을에 3일간 있었습니다."

 베이찬 강족 자치구에서 만난 천리 가족들
 베이찬 강족 자치구에서 만난 천리 가족들
ⓒ 권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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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이름은 베이찬 강족 자치구 레이구우츤. 권철은 그곳에서 지낸 3일간의 경험을 자분자분 말한다.

"마을 사람들과 밥도 같이 만들고, 빨래도 했지요. 처음엔 무섭고 공포에 질렸던 천리도 마냥 웃고. 보통 지진하면 재앙이라고만 생각하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구나 라는 것을 느꼈지요. 실제 피해를 입은 마을 사람들은 이번 지진을 어쩔 수 없는 숙명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조금 도회지에서는 여진 때문에 다른 데로 대피하고 그러는데, 시골 촌락은 자기가 태어나고 생활한 그 땅을 떠나지 않습디다. 여진이 와서 죽게 된다 하더라도 숙명이라고 받아들이는 것 같았죠."

그 마을에서 3일간을 지낸 권철은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전 마지막으로 천리의 사진을 찍었다. 그러자 천리가 잠시만 기다리라는 제스추어를 취한 후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조금 있다가 나왔는데, 아주 예쁜 차이나 드레스를 입고 온 겁니다. 여자아이라서 그런지, 잘 나오게 찍어주세요 뭐 그런 의미죠. 그런데 아이 표정이 3일 전과 완전 딴판인 겁니다. 제가 사진 많이 찍어봤습니다만, 그렇게 환하게 밝게 웃는 사진 정말 찍기 드물거든요. 아주 기분 좋게 찍었습니다. 그리고 시체 사진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겠되었죠. 그안에서 피어나는 희망… 그런 것들을 실제로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시골 부락에서 3일간 생활한 후, 권철은 마을주민이 손수 운전해 주는 오토바이에 몸을 싣고 3시간 동안 산길을 달려 안창에 도착했다. 시골마을에서 해맑고 순박한 '희망'을 발견했다면, 이곳에서는 가슴아픈 체험을 해야 했다.

"거기 성도시의 아동병원에서 지진으로 두 다리를 잃은 류쇄(14)라는 여자애를 만나게 되었어요. 콘크리트 더미에 깔려서 어쩔 수 없이 절단했는데, 애가 정신을 찾은 후에 소원을 묻는 제 말에 '다시 걷고 싶어요'라고 말합디다. 카메라 잡은 지 꽤 되는데, 정말 그 말이 얼마나 애절한지 처음으로 울면서 찍었습니다."

중국정부는 사망자가 너무 많아 부상자에게까지 물적 지원을 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입장. 울면서 그녀의 병상을 지키고 있는 가족들에게 권철을 이렇게 대답했다.

"망설임도 없었고 그냥 말해 버렸습니다. 류쇄의 의족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라고. 원래 저널리스트나 기자는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신화 같은 게 있는데, 전 그런거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저널리스트 이전에 인간이니까. 이번 지진 현장을 취재하면서 느낀 게 상당히 많기도 하고. 일종의 은혜 갚기라고 해야 하나? 암튼 의족 비용 마련해서 3개월 후에 다시 찾아가기로 했습니다."

류쇄 성도시의 아동병원에서 만난 두다리를 잃은 류쇄(14). 다시 걷고 싶다는 소원을 꼭 해결해 주겠다고 말해 버렸다.
▲ 류쇄 성도시의 아동병원에서 만난 두다리를 잃은 류쇄(14). 다시 걷고 싶다는 소원을 꼭 해결해 주겠다고 말해 버렸다.
ⓒ 권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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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앙의 현장에서 느낀 '희망'을 공유하고자

중국의 의족 비용은 보통 일본 돈으로 30만엔(한화300만 원)정도. 5월 29일 일본으로 돌아온 그는 맹렬히 모금운동을 시작했다.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도 이미 3만엔 정도 모금된 서명용지를 보여 주었다.

"누군 바보 같은 짓이라 하는데, 시체 냄새가 진동하는 재앙 같은 곳에서 천리와 류쇄를 만났죠. 그녀들의 희망을 저는 전달하면서 또 배웠습니다. 이런 모금 운동을 통해 그 희망을 느끼고 싶은 독자들도 모금 운동에 동참해 주신다면 세상이 조금씩 조금씩 나아져 가는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가부키쵸의 구석구석을 안방처럼 세세하게 아는 남자. 2003년에는 두만강 국경지대에서의 탈북자 촬영 소동으로 중국 공안에 붙잡혀 화제를 불러 일으킨 적도 있었다. 이 사건은 2004년 2월 17일자 <중앙일보> 톱기사에 실리기도 했다.

이렇게 '어둠'의 세계를 한 마리 늑대처럼 헤쳐왔던 그가, 재앙의 현장에서 느낀 '희망'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다며,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띤다.

"3개월 후 갔다 와서 또 봐요. 다른 미디어에서는 쓰촨대지진 같은 거 뭐 다 잊어 버렸으니까. 암튼 오늘과는 또 다른 사진들, 그림들 보여줄 테니까. 아 참, 그리고 <오마이뉴스>의 독자님들도 모금에 동참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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