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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10일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최대 규모의 촛불시위가 전국에서 벌어졌다. 6월 항쟁 21주년을 맞아 이날만은 한번 크게 모여야 한다는 생각은 이미 이심전심으로 널리 퍼져 있었다. 특히 386세대들의 가슴 속에 6월 10일이 갖는 의미는 각별한 것이다. 나 또한 모든 일정을 비워두고 6월 10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청 앞을 가득 메운 참가 대오는 입추의 여지없이 거리를 메우고 있었다. 21년 전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들, 흰머리가 내려앉고 듬성듬성 머리가 빠지기는 했지만 그들은 여지없이 21년 전 6월의 거리를 누볐던 대학생들이고, 아이 엄마가 되어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나오기는 했지만 그들은 어쩔 수 없는 21년 전 그날의 여대생들이었다.

 

2008년 6·10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미국산 쇠고기에 반대하는 싸움을 시작한 것은 5월 2~3일 네티즌과 10대 청소년들이었다. 5월 2~3일 청계천 광장에서 벌어진 집회는 참으로 놀라웠다. 너무도 명확한 정치적 기조(반 이명박)와 이를 뒷받침하는 논리정연한 주장들이 10대 청소년들의 입에서 거침없이 튀어 나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간명한 신념과 열기가 상황을 압도하고 있었다. 20대의 우리들이 군부독재에 맞서 청춘을 걸고 싸웠던 열정들이 20년의 시간을 뛰어 넘어 10대들에게서 그대로 재연되고 있었다. 

 

분명 이 싸움은 쉽게 끝나지 않으리라. 운동은 운동 대오가 갖고 있는 신념의 강도와 정당성에 비례한다. 그렇게 그들은 5월 한 달 청계천 광장을 쉼 없이 채워가기 시작했다. 5월 25일 이들은 드디어 청계천 광장을 넘어 가두로 진출하기 시작했고 5월 29일 장관 고시와 함께 5월 30~31일 청와대 앞까지 내달렸다.

 

5월 30~31일 청와대 앞에서 벌어진 격전은 미국산 쇠고기를 둘러싼 여론 지형을 극적으로 돌려 세우고 이명박 정권을 벼랑 끝으로 몰아갔다. 이어 벌어진 6월 초순 72시간 릴레이 집회는 수십만 명이 참가하는 대군중집회, 축제의 장으로 발전했다. 6월 10일의 투쟁은 그렇게 준비된 것이다.

 

우리는 분명 이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릇 386이라면 5월 초순 10대들이 열어 놓은 공간에 경이로움을 느꼈고, 시간이 지남에도 꺾이지 않는 이들의 열정에 매료되었으며, 상황을 극적으로 반전시키는 대담한 진출 앞에 다음은 우리가 나설 차례라며 6월 10일 오늘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이심전심으로 기다려온 거리를 내달렸던 대학생들은 이제 40대의 성인이 되어 다시금 아스팔트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87년에 비해 2008년 거리 대오는 훨씬 강하고 유연했다. 이들은 5월 초순부터 '반 이명박' 기치를 명확히 하고 미국산 쇠고기, 대운하, 의료 민영화 등 이명박 정부의 주요 정책을 정조준하고 있었고, 조중동과 같은 기성 제도권 언론에 맞서 인터넷을 통한 새로운 소통 구조를 통해 단단히 무장되어 있었다. 이들은 6·29 선언 한방에 무너져 내렸던 87년 6월의 대중보다 훨씬 잘 준비되어 있었다.

 

또 이들은 유연하고 슬기로웠다. 무릇 수만, 수십만의 대중을 참가시키려면 비폭력 시위와 대담한 거리 진출이 잘 결합되어야 한다. 이들은 시종일관 비폭력을 외치며 대중의 참가를 유도하는 슬기로움과 함께 때로는 청계천 광장을 박차고 거리로 뛰어 나서는 적극적인 행동전을 통해 6·10 수십만 명을 불러내는 전술적인 유연함을 겸비하고 있었다.

 

뜻밖에도 희망을 열어준 고마운 10대들

 

거리대오가 갖고 있는 완강함과 슬기로움에 비해 이를 수렴할 정치적 대안과 주체가 준비되지 않았다. 진보진영은 너무 왜소하거나 분열되어 있고 제도권 야당은 거리의 민심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다. 아마도 이 간극만큼 고통스러운 이중 구조가 오랜 기간 계속될 것이다.

 

거리의 민심은 이명박 정부 퇴진과 함께 이명박 정부의 주요 정책 전반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며 지속적으로 거리를 장악해 갈 것이다. 반면 케케묵은 제도권의 언론과 정치는 이를 대변하려는 진솔한 노력 대신 어중간한 자세와 기만적인 시간끌기로 상황을 모면하려 할 것이다. 이 간극을 메우는 어딘가에 386세대가 감당해야 할 역할이 있지 않을까?

 

거리의 민심과 제도권 정치의 모순은 아마도 2010년 지방선거, 2012년 총선과 대선을 거치며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될 것이다.

 

나는 87년 6월 당시 서울대 인문대 학생회장이었다. 21년 전 나는 6월 아니 1년 내내 거리에서 살았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출범하고 남북정상회담이 연이어 개최되면서 어쨌든 역사는 발전한다는 믿음 속에서 청춘을 보냈다.

 

이런 나에게 2007년 이명박 정권의 등장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충격이었다. 참으로 고통스러운 몇 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2012년의 전망조차 가물해 보이던 5월, 뜻밖에도 10대 어린 청소년들이 길을 열기 시작했다. 이들은 우리가 20년 전 열어낸 민주주의의 공간을 타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며 더 큰 민주주의, 더 근본적인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이명박 정권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5월 초순 10대 청소년들이 결사의 각오로 이명박 정부에 반대하는 새로운 길을 개척할 때 나는 주변부에 있었다. 나는 지금 부지런히 10대의 감각과 10대의 숨결을 배우고 있다. 5월 청계천 광장을 메웠던 10대들의 정서와 그들의 열정에 숨결을 맞추려 애쓰고 있다. 그리고 나와 동일한 감정 속에 묶여 있던 20년 전의 대학생들이, 우리들이 역사의 새장을 열었던 6월 10일을 기해 거리로 쏟아져 나온 것이다.

 

2012년 50을 앞두고 있을 386들이여

 

2012년이면 내 나이 50에 가깝다. 나와 동시대를 살았던 386세대들도 그럴 것이다. 나는 2012년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역사의 방향이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오리라며 청춘을 걸기보다는 좋은 날을 만들어 간다는 더 구체적인 목표와 신념을 가지고 기어코 2012년을 돌파해야 한다.

 

이것이 2008년 10대 청소년들이 개척했던 민주화의 새 길을 완성하는 길이다. 이제는 주변인이 아니라 역사의 책임있는 주역으로 2012년의 승리를 위해 나서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피로 물든 한국의 민주주의 운동사를 한 차원 높게 발전시키는 길이며 87년 6월의 거리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386세대의 숙명이다.   

 

다시 일어나 싸우자. 87년 6월 우리는 위수령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6월의 거리를 누볐다. 나는 21년 전 6월의 거리를 잊지 못한다. 명동과 남대문, 을지로와 종로 거리를 달리며 목놓아 불렀던 우리들의 민주주의를 절대로 잊지 못한다.

 

87년 6월과 2008년 6월이 다른 것은 경제 정세이다. 87년 6월은 이른바 3저호황의 한복판에 있었다. 87년 6월이 6·29 선언이라는 온건한 개혁으로 끝날 수 있었던 것은 이 호황과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2008년 6월은 미국 주도의 경제질서가 무너져 내리는 극심한 물가인상과 경기침체하에 있다. 이는 2008~2012년 우리의 도전이 이 사회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하는 과정과 맞물려야 진행될 것임을 의미한다. 한-미 동맹, 친미적 경제질서, 수출대기업과 기득권 중심의 경제구조를 혁파하고 모든 사람이 공존 공영하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자.

 

더 많은 민주주의, 더 근본적인 민주주의를 위해 다시금 우리의 청춘 전부를 걸고 싸우자.

덧붙이는 글 | * 이 글은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대안정책 사이트 이스트플랫폼(www.epl.or.kr)에도 게재됩니다.
* 민경우 기자는 진보정치연구소 경제팀장이자, 새사연 운영위원입니다.


태그:#6월 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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