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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파이프로 광장을 차지한 적 있었나?

72시간 국민엠티가 한창인 7일 밤 세종로. 시위대 내에서도 조급한 목소리가 들린다.

"한 달 내내 촛불을 들었지만 꿈쩍도 안 한다. 5년 내내 이럴 거냐?"

세종로를 가로막은 전경버스의 벽을 뚫고 청와대로 가자고 한다. 실제로 일부 시위대가 전경버스의 유리창을 깼고, 버스 위로 올라가다가 다치고 연행되었다. 하지만 시위대의 대부분은 "비폭력"을 외치며 오로지 촛불만을 무기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전경버스를 오르려는 일부 시위대에게 심지어 "내려와!"라고 외치면서.

과거, 내가 본 마지막 '폭투(화염병을 동원한 폭력가두투쟁)'는 2000년 5월 1일 고려대 앞에서 목격한 것이었다. 그날 노동절 대회장으로 행진하던 '전학협' 학생들이 대거 체포된 후, 학교로 쫓겨 온 학생과 노동자들이 물리력을 갖춰 다시 진출했다.

속칭 '전투조'들이 쇠파이프를 들고 길을 막으면 '투척조'가 전투조의 사이를 지나 전경에게 화염병을 던지고, 전경들이 쫓아오면 다시 전투조가 가로막는 이 과정이 소위 가투의 ABC였다.

그래서 수백 개의 화염병을 던져서 일대를 해방구로 만들었냐고? 턱도 없는 소리다. '물량'이 떨어지면 슬슬 대오를 물려 안전한 교정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대학 새내기라면 "우리가 얻은 게 뭐죠?"하고 질문을 던질 만한데, 그 경우 답변은 준비되어 있었다.

"노동자 민중의 분노를 보여주었다."

그렇게 '사자후'를 터트리며 거리를 휩쓴 후엔, 경찰의 검문을 피하기 위해 옷도 갈아입고 손도 빡빡 씻은 후, 불안한 표정을 숨기며 집으로 돌아갔다. 나를 지켜줄 물리력과 동지들의 대열이 없으면 무서웠다.

자기들끼리는 그 가두의 투쟁력을 칭찬하느라 최 장군이니 김 장군이니 불렀던 용맹한 운동권들이지만, 부모님께 이 사실을 자랑스럽게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물론 경찰의 검거 때문이기도 했다). 비록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는 해도, 돌아보면 우리의 분노나 용기에는 모순된 것들이 참 많았다.

'촛불 시위장에서 부비부비(연인과의 스킨십) 좀 하지 마시오.'

이런 글이 인터넷에 뜰 정도로 2008년의 광화문은 다양하고 자유롭다. 사람들의 얼굴에 공포가 없다. 시퍼런 비장함도 아니다. "폭력경찰 물러가라"고 외치긴 하지만, 자신이 '불화살이 되어' 벽을 뚫겠다는 생각은 별로 없다.

사람들은 막히면 막힌 대로, 그 자리에서 바로 뿌리를 내리고 잎을 틔우기 시작한다. 노래를 부르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며, 음식을 나눠 먹는다. "전경의 벽을 뚫고 청와대로 가자"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답답할 노릇이겠지만, 내 기억엔 수백 개의 쇠파이프와 수천 개의 화염병을 든 시위대도 청와대 문턱조차 가 본 적이 없다. 아니 심지어 그 시위대는 87년 이후 이렇게 한 달 동안 광장을 차지해 본 적도 없다.

"이번엔 냄비처럼 식지 않을 겁니다."

한 달도 넘은 평화적 촛불시위가 아직 성과를 못 냈다는 사실에 시민들은 지쳤을까. 만나는 시민들에게 그 질문을 해보기로 했다.

닉네님이 '희망을나눠요'인 이 시민은 디시인사이드 자전거갤러리에서 활동 중이다.
▲ 심야의 자전거맨 닉네님이 '희망을나눠요'인 이 시민은 디시인사이드 자전거갤러리에서 활동 중이다.
ⓒ 오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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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 소개 좀 해주시죠.
"디시인사이드 자전거갤러리에서 나왔습니다. 고양시에 살고요, 닉네임은 '희망을나눠요'입니다. 오늘도 동호회 사람들과 대회를 갔다가 같이 오는 길입니다."

- 촛불집회는 자주 오셨나요?
"처음이구요. 촛불 하나 보탠다는 생각으로 왔습니다. 평소에는 별로 이런 데 관심이 없었는데, 요즘은 저희 갤러리에도 계속 관련한 글들이 올라오고 해요. 그래서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나오곤 하죠. 촛불집회 분위기가 참 좋네요. 저처럼 평범한 일반시민들이 나온 것 같은데 보기가 좋습니다."

- 이명박 대통령이 시민들의 요구를 들어줄 것 같나요?
"만약 끝까지 안 들어주면… 아르헨티나 꼴 나는 거죠. 2002년인가 대통령이 사임하고 외국으로 도망쳤잖아요. 쇠고기뿐만 아니라 대운하도 있어서, 이번에는 국민들이 냄비처럼 금방 식지 않을 겁니다. 계속 (싸움이) 커지면 커졌지…. 제 주변에도 점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이 이야기를 하고 있거든요."

- 이렇게 촛불시위만 할 게 아니라 힘으로 밀어붙여야 한다는 분들도 계신데요.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지금 이 정도가 좋은 것 같습니다. 이미 이기고 있는데 더 과격해질 필요가 없다고 봐요. 디시인사이드에 음식 갤러리가 있는데요, 돈을 4천만 원 모아서 시민들에게 김밥과 생수, 간식 나눠주고 있거든요. 이 정도로 호응을 받고 있는 건 대단한 거라고 봅니다. 저도 앞으로도 쉬는 날마다 계속 나올 겁니다."

"머슴이 말을 안 들으면 내쫓아야죠"

이순신 동상 앞의 "으쌰으쌰"를 먼 산처럼 바라보며 도로 복판에 자리 잡은 가족이 보였다. 어찌나 평화로운지 이 사진을 한강고수부지에서 찍었다고 해도 무방할 듯했다.

'뒤에 있기가 미안해서' 온 가족과 함께 나왔다는 시민.
▲ 가족 나들이 왔어요 '뒤에 있기가 미안해서' 온 가족과 함께 나왔다는 시민.
ⓒ 오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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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광고회사 다니는 나병렬이라고 합니다. 여긴 제 아내고, 중학교 2학년 딸아이와 초등학교 6학년 아들이구요. 저는 오늘 처음 나왔는데…. 뭐 별로 대단한 동기는 없고요, 그냥 미안해서…. 어린 학생들이 옳은 소리하다가 맞고 다치는데 뒤에 있기가 미안해서 나왔습니다."

- 이명박 대통령 당선될 때 어떤 기분이셨나요?
"처음부터 신뢰가 안 갔어요. 비리에 인사문제에…. 대한민국 대통령이 대한민국 국민의 뜻을 받들어야지 미국 가서 부시 대통령한테 아양이나 떨고…."

부인도 한 마디 거든다.

"교육문제 때문에 너무 화가 나요. 영어 몰입교육 시킨다고 그러면 그 사교육비 어떻게 감당해요. 다들 영어 학원부터 보내야 될 텐데…."

- 평소에 이런 집회장에 오신 적 있나요?
"아뇨, 처음이에요…. 원래 모든 일이 반대도 있고 찬성도 있고 그런 거잖아요. 그래서 별 관심이 없었는데…. 그런데 이번에 보니까 국민을 밟고 물대포를 쏘고…. 이건 아니다 싶었어요. 이명박 대통령이 끝까지 고집을 부리면요? 머슴이 말을 안 듣는데 주인이 새경 줄 수는 없잖아요? 내쫓아야지요."

"한 달 아니라 백 일이라도 해야지요"

이번엔 젊은 대학생들을 만나보기로 했다. 마침 대학 깃발들이 많이 휘날리는 곳에 누군가 '참사랑국어'라는 깃발을 들고 있다. 국문과 학생이겠지 하고 다가갔다.

- 인터뷰 좀 해도 될까요? 자기 소개 좀 해 주세요. 몇 학번이세요?
"97학번인데요."

- 어휴, 학번이 꽤 높으시네요.
"원래 나이는 91학번이에요."

- 예. 아마 최고 학번 선배실텐데 과 깃발을 들고 계시네요. 학생회 차원에서 같이 나오신 모양이죠? (그 나이에 학생회 깃발을 들고 앞장서다니 대단한 분이군...)
"과 깃발이 아니고요… 저희는 다음 카페 '참사랑 국어' 사람들인데요. 국문과 졸업생이나 예비교사, 현직교사, 학원강사 등 국어와 관련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런 거로군. 나도 국문과 나온 사람인데 처음 들어보았다. 이명박 덕에 모르던 사실을 많이 배운다. )

"처음 이명박 당선 되었을 때, 그야말로 참담했죠. 국민들에게도 실망했어요. 그냥 잘 살아보자, 이거 하나였잖아요. 그런데 경제는 제대로 했나요? 경제까지 이 모양이잖아요."

"(저들은) 지금 시간 끌기 중인 것 같아요. 시간 끌면 어떻게 또 흐지부지되겠지 하는 거죠. 국민들이 이번엔 그렇게 내버려두지 말았으면 합니다. 촛불집회 한 달 정도 했잖아요? 한 달 아니라 백 일이라도 해야지요."

- 좀 더 격렬히 우리의 힘을 보여줘야 한다는 의견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저지선을 못 뚫고 앉아 있으니까 아쉬운 점도 있지요. 하지만 장단이 있다고 봐요. 집회가 격렬해지면 국민적 정당성을 얻기 힘들 거예요. 또, 진격해 봐야 어디까지 갈 수 있나요? 저는 이전에도 효순이 미선이 집회 때처럼 평화적 시위에 여러 번 나가봤는데요, 저 자신이 과격한 방식이나 단체에 끼는 것을 싫어해서 그런 시위에만 나가다보니까 요즘 촛불시위가 낯설지는 않습니다."

- 어떤 시민들은 소위 '지도부'가 자발적인 시민들을 조종하려 한다면서 비난하는데요.
"글쎄요. 구심점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구심점이 아예 없으면 너무 산만해질 것 같고…. 지금 국민대책본분가요? 거기 여러 단체들이 모여 있다면서요. 그 정도면 괜찮다고 봐요."

"이명박 대통령한테 할말이요? 죄송하다는 말은 그만 하고, 국민이 원하는 것을 좀 해주세요."

"여기 깃발 세우니까 동네 주민들이 찾아오네요"

'계양구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깃발 아래 삼삼오오 주먹밥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인터뷰하다 보면 주먹밥 하나 얻어 먹을 수 있다는 생각해서 슬슬 다가갔다. 다들 수줍은 듯 인터뷰를 피하려고 해서, 그냥 사람들이 많이 지목하는 남자 분 옆에 턱 앉았다.

거리에서 깃발을 들었더니 우연히 지나가던 주민들이 모였단다. 촛불문화제 덕 톡톡히 보셨네.
▲ 계양구 주민모임 회원들 거리에서 깃발을 들었더니 우연히 지나가던 주민들이 모였단다. 촛불문화제 덕 톡톡히 보셨네.
ⓒ 오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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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임 소개 좀 해주세요. 지역 운동을 하는 단체인가요?
"이전에 계양구 구의원이 의정비 인상하려고 여론조작한 사실이 있었거든요. 거기 반대하는 주민들이 모여서 시작한 단체이구요. 말 그대로 계양구 주민들의 모임입니다. 그런데 여기 앉아계신 분들 상당수는 오늘 처음 뵙는 분들이에요. 깃발을 들고 있으니까 주민들이 지나가다가 '어, 나도 계양구 사는데' 하면서 그냥 모여드네요."

- 국민들이 왜 이명박 대통령을 선택했을까요?
"잘 포장된 '경제' 논리에 속은 것 아닐까요? 사실 우리는 이미 잘 살고 있었죠. 잘 사는 게 뭐냐는 기준은 다를 수 있지만…. 그런데 그걸 위기라고 포장해서 선동한 거죠. 경제가 잘 되면 우리에게 뭐가 좋냐, 이런 것을 국민들이 놓친 것 같아요. 서민에게는 하나도 좋아지는 게 없는데…."

"촛불집회 분위기요? 자유분방하죠. 물 흐르듯 이동하고, 막히면 돌아가고…. 이런 사람들을 누가 끌어와서 앉혀놓을 수 있나요? 웃긴 얘기죠. 배후요? 이명박이죠. 국민의 대표 아닙니까. 국민이 거리에 나오는데 당연히 국민의 대표가 배후죠."

혼자 서는 사진을 안 찍겠다고 해서 옆에 있는 여자 분과 같이 한 컷을 찍었다. 인터뷰한 보람이 있어 곧 주먹밥을 실은 차가 도착했고, 내게도 하나가 전달되었다. 허기진 차에 먹은 주먹밥은 맛있었고, 따뜻했고, 착했다.

우리가 지친 것처럼 보이니?

보수집단에서는 "정부는 뭐하고 있나, 군대라도 동원하라"는 소리가 나온다. 그러거나 말거나, 촛불은 점점 늘어만 가고 시민들은 이제 이 광장의 축제를 당연한 권리로 여기고 있다. 아니, 원래 역사적으로 광장은 시민의 것이었다.

시민들은 지치기는커녕 되찾은 광장의 권리를 맘껏 누릴 태세가 되어 있었다. 시민들의 표정은 이렇게 말한다.

한 달로는 감칠맛도 안 난다고. 두 달이든 1년이든, 어디 한 번 가 보자고. 손에 손잡고, 힘들면 바통 터치해 가며, 주먹밥 나눠들고 가족 나들이 삼아, 이 민주주의의 '대안학교'에 정규코스로 입학하겠다고.

우리의 권리가 쇠파이프와 화염병으로 장악한 '불안한 권리'라면, 저들은 언제든 그 틈을 치고 들어올 수 있다. 우리 내면에까지 권리의식이 싹트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 속에 배인 '당연한 권리'라면, 저들도 위축된다. 저들이 쉽게 촛불을 끌 수 없는 이유다. 생명과 광장의 권리는 이제 불가침의 이정표를 세우고 있다. 만약 보수집단이 먼저 폭력으로 그 이정표를 뽑으려 한다면, 그 때는 정말 목숨을 건 저항에 직면할 지도 모른다.

이명박 대통령에겐 미안한 노릇이지만, 어쩌냐, 시민들은 입을 모아 말하고 있다. 

"이명박, 지쳤어? 우린 쌩쌩해!"

세종로에서 북 치며 춤을 추는 시민들의 모습
▲ MB 넌 기도나 해, 우린 축제할게 세종로에서 북 치며 춤을 추는 시민들의 모습
ⓒ 오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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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필자는 사회당 서울시위원장입니다. 블로그 http://blog.naver.com/interojh



태그:#촛불문화제, #이명박, #광우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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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기본소득당 공동대표. 기본소득정책연구소장. <기본소득이 세상을 바꾼다><기본소득 쫌 아는 10대> <세월호를 기록하다> 등을 썼다. 20대 대선 기본소득당 후보로 출마했다. 국회 비서관으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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