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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의 폭력진압에 항의하는 글을 붙였다. 이 글을 읽고도 방패를 들 수 있을까.
▲ 경찰 버스에 붙여진 글. 경찰의 폭력진압에 항의하는 글을 붙였다. 이 글을 읽고도 방패를 들 수 있을까.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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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 노래 '헌법 제1조'

지난 5일, 서울은 마치 런던 거리를 걷고 있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희뿌연 하늘을 이고 있었다. 답답함이 왈칵 밀려오는 거리. 산골짜기를 떠나온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산촌의 푸른 하늘과 새들의 지저귐, 그리고 계곡을 훑고 지나오는 상큼한 바람이 그리워졌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사람들은 각자의 걸음으로 각자의 길을 갔다. 내가 가야 할 곳은 시청 앞 광장. 서두를 일도 없고 급할 일도 없는 발길. 나는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처럼 능청능청 걸어 시청 앞으로 갔다.

저녁 7시, 시청 앞 광장은 때 아니게도 작은 태극기가 펄럭였다. 위패와 함께 펄럭이는 태극기는 북파공작원 출신인 대한민국 특수임무수행자회 사람들이 놓았고, 급조된 위패와 태극기는 너른 시청 잔디 광장을 가득 메웠다. 그들은 현충일을 맞아 동료 전사자들의 추모 행사를 열고 있다고 했다.

광장을 돌아보는데 안중근 의사와 윤봉길 의사 등의 사진이 있는 대형 사진판이 행사장 주변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순간 의아한 생각은 "일제와 싸우던 분들이 대한민국 특수임무수행자회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였다. 아무리 연결 고리를 찾으려 해도 윤봉길 의사와 안중근 의사가 북파공작원이었던 분들과는 관련이 없어 보였다.

그들의 행사로 인해 시청 광장을 내준 지난 5일의 촛불문화제는 광장이 아닌 거리에서 진행되었다. 전사자 위패와 함께 경건하게 꽂혀 있는 태극기와 거리를 오가는 국민의 손에 들려 있는 태극기. 각기 다른 의미를 지닌 두 개의 태극기를 보면서 나는 잠시 혼란스러웠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전사자들을 생각하면 국민 모두가 함께 추모해야 함에도 경찰의 제지로 인해 추모장 안으로는 한 발짝도 들어갈 수 없었다. 태극기는 분명히 하나일진대, 그 태극기가 지니고 있는 고유의 향기가 전혀 다르게 느껴진 까닭은 무슨 이유 때문이었을까.

작년만 해도 판교에서 행사를 치르던 그들이 이명박 대통령을 만난 후 행사장이 시청 앞 광장으로 결정되었다는 말 때문이었을까. 그들이 광장 바닥에 펼쳐 놓은 대형 태극기는 태극기라고 하기보다 차갑고 새파랗게 날선 것이 아무리 보아도 친근하지 않게 느껴졌다.

더구나 현충일 노래가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시청 앞 광장과 거리에서 울려 펴지는 '헌법 제1조' 노래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큰 혼란을 주기에 충분했다. 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생각했더니 답은 의외로 금방 나왔다. 국민은 대통령이 휘두르고 있는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상기시키고 있는데, 이명박 대통령은 그 소리를 막기 위해 억지 행사를 꾸민 게 아니던가.

국민들 뿔났다? 아니, 함께 해보니 신났더라!

어린 여학생이 조중동 각성을 촉구하는 피켓을 들고 있다.
▲ 여학생도 아는 것을. 어린 여학생이 조중동 각성을 촉구하는 피켓을 들고 있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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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리낌이 없다. 당당한 표현들이 이번 촛불문화제의 백미이다.
▲ 강원도 삼척에서 왔어요! 꺼리낌이 없다. 당당한 표현들이 이번 촛불문화제의 백미이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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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로 쏟아져 나온 국민들. 그들은 대통령이 말하듯 폭력 시위대도 아니고 더구나 친북 좌파도 아닌 이 나라의 평범한 대한민국파의 백성들이었다. 적어도 거리에 나온 수십만의 국민은 친미 또는 친일파인 이명박 대통령보다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이 분명했다.

국민과의 소통을 거부하는 이명박 대통령. 그런 대통령을 향해 귀를 열어 달라고 국민은 한 달 넘게 촛불을 밝히고 있다. 이쯤 되면 지칠 만도 하겠지만 촛불을 든 국민의 표정은 밝기만 했다. 뿔난 국민이 참다못해 촛불을 들었다고 하지만 국민은 이명박 정부보다 현명했고, 정신세계도 몇 단계는 더 높았다.

유모차를 탄 아기에서부터 팔순 노인에 이르기까지 촛불을 든 이들의 연령도 다양했다. 할아버지는 손자들을 위해 촛불을 들었고, 아이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위해 촛불을 들었다. 기말고사를 앞둔 대학생들은 촛불 아래에 책을 펴 놓고 시험공부를 했다.

거리로 나온 국민은 각자의 사고로 각자의 생각을 여과 없이 표출했다. 일체감이라고는 부족해 보이는 촛불문화제 현장. 지도부도 없고 조직도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각자 들고온 깃발 아래에 모였고, 각자의 의견에 따라 행동했다. 시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시민 참여 민주주의'가 태동된 듯싶어 가슴이 벅차올랐다.

차 없는 거리가 된 세종로와 종로 일대는 국민 축제의 장이었다. 2002년 월드컵 때와 같이 처음 만난 사람과도 스스럼없이 구호를 외치고 대화와 토론을 했다. 씹어도 씹어도 넘어가지 않는 '이명박표' 안주로 캔맥주와 소주를 마시는 이들도 있었다. 안주가 좋으니 다른 안주 시키지 않아도 된다는 사람도 많았다. 덕분에 안주값이 절약된다니 이명박 대통령도 지갑 얇은 국민에게 좋은 일 하나는 하고 있는 셈이었다.

이쯤 되면 거리에 나온 경찰들도 혼란스러울 법 했다. 병든 소를 그들이라고 먹지 않을 것이며, 광우병의 위험에 노출되는 것은 그들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런 경찰이 옳은 것을 옳다고 표현하지 못하니 울화병이 생기지 않은 게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국민은 대통령에게 불복종을 선언했지만, 그들조차 불복종을 선언하기엔 이 나라가 걷고 있는 길이 너무 암울하지 않던가.

국민 건강을 위해 싸우는 동안 먹을 것은 우리가 책임집니다

새벽 2시에 온 김밥. 국내외 배후시민들이 보냈단다.
▲ 김밥조공. 새벽 2시에 온 김밥. 국내외 배후시민들이 보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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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시간 촛불문화제에 참여한 이들에게 깁밥을 날라주는 임무를 맡았다. 수만 개의 김밥과 물을 이들이 다 배달해준다.
▲ 김밥부대. 밤시간 촛불문화제에 참여한 이들에게 깁밥을 날라주는 임무를 맡았다. 수만 개의 김밥과 물을 이들이 다 배달해준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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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날인 8일 새벽엔 '광우병 수입 반대를 염원하는 국민과 해외 동포'들이 보내준 김밥과 초코파이를 먹지 않고 지니고 있다가 촛불들과 대치하고 있는 전경에게 건네 주었다. 그들은 서로 자기에게 던져 달라고 손을 들었다. 그 시간 그들은 청와대로 향하는 촛불 행진을 막는 것보다 편히 잠자고 싶었으며 무엇보다 배가 고팠다. 

하지만 그들은 또래 사람들처럼 잠자리를 찾아들거나 편의점으로 달려가지도 못했다. 그들은 무전기를 든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촛불들이 흔드는 버스에서 내려오지도 못했다. 어쩌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구호를 외치며 결의를 다져 보지만 내가 보기에 그날 현장에 있던 전경들은 인간이 아니라 무전기로 조종되는 방패막과 다르지 않았다. 그들에게 방패를 내던지고 촛불을 들게 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임을 실감할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20세기 정치에 길들어 있는 사람들이 보기엔 21세기를 살아가는 대한민국 국민이 하는 행동이 낯설기만 했을 것이다. 촛불문화제에 작가회의 문인들과 참석한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인 도종환 시인은 그 일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되고 있습니다. 구호와 투쟁의 역사를 기억하는 우리의 사고로는 현실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그저 촛불에 의지해 이 물결을 따라 갑시다."

그러했다. 촛불문화제에서 어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하나도 없었다. 미안함에 함께 촛불을 들지만 여론을 주도하지도 못하고, 행진의 선두에 나서지도 못했다. 선두와 후미의 의미가 없어진 촛불문화제에서는 모두가 주인공이요, 배후이자 촛불문화제의 지도부였다.

전경버스에 올라간 시민과 경찰에게 "묵지빠!" 연호하는 시민들

8일 아침 진압에 나선 경찰 사이로 비둘기 한마리가 날아왔다.
▲ 진압에 나선 경찰과 비둘기. 8일 아침 진압에 나선 경찰 사이로 비둘기 한마리가 날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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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민이 전경들에게 초코파이를 나눠주려 하자 고참이 막고 있다. 왜 그랬을까.
▲ 정은 나누어야 해. 한 시민이 전경들에게 초코파이를 나눠주려 하자 고참이 막고 있다. 왜 그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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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밤 안국동 현장에선 촛불행진을 막고 있는 경찰 버스에 한 시민이 올라갔다. 그러자 경찰이 그를 제지하기 위해 버스로 올라왔다. 예전 같으면 욕설이나 험악한 구호가 나왔을 법하지만 사람들은 손뼉을 치며 "묵찌빠!"를 외쳤다. 시민이 경찰과 묵찌빠를 하더니 자신이 이겼다며 손을 번쩍 들었고, 사람들은 환호했다.

버스 위로 올라간 시민을 경찰과 '묵찌빠'를 시키는 촛불들. 요즘 벌어지고 있는 촛불문화제는 그렇게 긴장과 공포보다는 웃느라 정신이 없게 만드는 현장이 많다.

8일 아침에는 느닷없이 길을 막고 있는 경찰에게 '종로서장 노래해!' 구호를 외쳤다. 역시 밤을 꼴딱 새우고 아침을 먹기 위해 철수하는 전경을 향해서는 '재워 줘!', '놀아 줘!를 외쳤다.

경찰들도 고개를 돌리고 웃음을 터트리는 촛불문화제는 그렇게 톡톡 튀는 재치와 유머, 번뜩이는 해학과 풍자가 넘쳐났다. 그런 사람들을 이명박 대통령은 친북 좌파 세력이라 했다. 시대에 한참 뒤떨어진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3박 4일간 이어진 촛불문화제. 하루의 상황은 언제나 아침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밤을 꼬박 새운 촛불들은 다시 서울시청 앞 광장으로 가서 고단한 몸을 뉘었다. 집에서 텐트를 가지고 와서 숙식을 해결하는 이들도 많았다. 코펠과 버너를 가지고 가지 않았다 해서 밥값이 들지도 않았다.

현장에 있으면 생수는 기본이고 김밥과 주먹밥이 나오고 수박과 초코파이 같은 간식이 나왔다. 8일 아침엔 전국의 한의사들이 만들어 보낸 보약도 하나씩 먹었다. 이른바 '국민건강탕'. 국민이 건강해야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있다는 뜻이다. 한의사들은 국민건강탕 겉봉지에다 이렇게 썼다.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하고 국민 건강을 지키는데 한의사들이 함께 하겠습니다.'

광주민주화 운동이나 6월 항쟁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해외에서까지 김밥을 보내주는 일이 생기리라고 어느 누가 상상했겠는가. 지금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전 세계에서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하면 이번에 켠 촛불은 어느 한순간도 꺼지지 말아야 한다.

평범한 사람에게 유언 쓰게 만드는 대한민국 대통령 '이명박'

그러나 경찰들은 끝까지 보약을 먹지 않았다.
▲ 진압에 나선 경찰에게 보약 하나씩. 그러나 경찰들은 끝까지 보약을 먹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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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들 가슴에 한 시민이 꽃을 꽂아 주었다. 잠시 후 고참이 와서는 이 꽃을 꺾어 버렸다.
▲ 꽃. 전경들 가슴에 한 시민이 꽃을 꽂아 주었다. 잠시 후 고참이 와서는 이 꽃을 꺾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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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낮시간은 시청 앞 광장에 있는 나무 무대에서 잠을 청했다. 한숨 잤다 싶어 고개를 드는데 옆 자리에 자고 있는 사람이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이었다. 서로 세수도 하지 못한 처지여서 금방 알아보지는 못했다.

둘 다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갸웃했다.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어? 여긴 어떻게?" 외쳤다. 내 옆 자리에서 잠을 자고 있던 이는 함민복 시인이었다. 강화도에 사는 그도 집에서 나온 지 며칠 되었다고 한다. 둘은 만날 장소가 없어 이런 데서 만나느냐며 한참 웃었다.

내가 광우병에 걸려 병원가면 / 건강보험 민영화로 치료도 못 받고
그냥 죽을 텐데 땅도 없고 돈도 없으니/ 화장해서 대운하에 뿌려 다오 

- 안치환 노래 '유언'

6일, 촛불문화제에 나온 가수 안치환은 신곡이라며 '유언'이라는 불렀다. 촛불문화제에 참석했던 국민이 썼다는 '유언'은 이명박 정부가 국민을 위해 어떤 일을 추진하고 있는지 그 실상이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다.

지난 6월 5일부터 시작된 72시간 릴레이 촛불문화제. 촛불들이 외친 구호 중에서 가장 많이 외친 구호는 '이명박은 물러가라!'였다. 국민의 말을 듣지 않은 대통령은 대통령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하루가 24시간이니 72시간이면 사흘간의 시간이다. 한 사람이 1분에 한 번씩 '이명박은 물러가라!'를 외쳤다면 5400번. 50만 명이 사흘 동안만 외쳤다 해도 29억 번이다.

전국에서 외친 수를 더하면 이명박 대통령을 물러가라는 구호는 계산하기도 힘들어진다. 그런데도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은 대체 어인 일이란 말인가. 국민을 위하지 않은 대통령. 지금 국민은 대통령 잘못 뽑았다고 분노하고 있다. 대통령 리콜제를 만들자고 말하는 이들 중에는 이명박 대통령 지지자도 많다. 국민을 위기로 몰고 가는 이명박 대통령. 그가 믿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미국일까. 일본일까. 아니면 그의 말 한마디에 움직이는 유령 집단일까.

촛불 든 국민을 외면하려 고개를 외로 꼬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이 있는 한 얼마나 많은 국민이 '유언'이라는 글을 쓰게 될지 모르겠다. 슬프지만 분노를 느끼게 하는 '유언'이라는 노래를 들으며 나 또한 지금쯤 유언을 남겨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목이 잠긴다.

옆에서 잠자고 있던 한민복 시인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요즘 세종로와 시청앞은 관광코스가 되었을 정도로 인기가 좋다. 구경 나온 일본인들도 많다고. 국민의 촛불이 만든 관광 코스이다.
▲ 시청 앞에서 노숙 중. 옆에서 잠자고 있던 한민복 시인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요즘 세종로와 시청앞은 관광코스가 되었을 정도로 인기가 좋다. 구경 나온 일본인들도 많다고. 국민의 촛불이 만든 관광 코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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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촛불문화제, #태극기, #헌법제1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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