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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촛불을 보는 듯 미륵이 빛나는 절

관촉사는 논산시 동남쪽 반야산 중턱에 자리 잡은 고려시대의 사찰이다. "마치 촛불을 보는 것 같이 미륵이 빛난다" 해서 관촉사라 했다는 절이다. 몇 년 만에 다시 찾는 것일까. 관촉사로 가는 길엔 모 심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제 몸 안에다 물을 잔뜩 안은 논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평야라기보다는 바다라는 말이 더 어울릴 듯 싶은 시원스런 풍경이다.

 다문천왕.
 다문천왕.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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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촉사가 자리 잡은 반야산은 그리 높지도, 크지도 않은 야산이다. 제일 먼저 일주문이 달려나와 나그네를 맞는다. 지붕이 새는지 천막을 씌워 놓았다. 조금 처량하게 느껴지는 모습이다.

천왕문을 지난다.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 중 하나인 다문천왕이 활짝 웃고 있다. 나는 사천왕 중에서 다문천왕을 가장 좋아한다. 비파를 연주하는 모습을 보면 나와 정서적 코드가 크게 틀리지 않을 거라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수미산 북방 수정타에 머무르면서 불국토로 들어가는 입구를 지키는 다문천왕. 부처가 계신 곳을 수호하며 불법을 빠짐없이 듣는다 해서 다문천(多聞天)이라 부른다는 천왕이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사표로 삼았으면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돌계단을 밟고 올라간다. 명곡루라는 누각의 아래를 지나자 이윽고 관촉사의 본 영역이 눈앞에 펼쳐지고, 정면에 대웅보전이 당당한 모습을 드러낸다.

 대웅보전. 오른쪽에 근레에 만든 윤장대가 서 있다.
 대웅보전. 오른쪽에 근레에 만든 윤장대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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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남 문화재자료  제79호 석문.
 충남 문화재자료 제79호 석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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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촉사는 고려 광종 19년(968) 혜명이 창건한 사찰로 전해진다. 그러나 대웅보전은 1996년에 지은 것이다. 하층은 정면 5칸, 측면 4칸 크기이며, 상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 크기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장대석으로 기단을 조성한 위에 원형 초석을 놓은 다음 원형기둥을 세웠다. 밖에서 보면 중층 건물이지만 안으로 들어가서 보면 상·하층이 트인 중층 건물이다. 

대웅전을 들여다 보고나서 직교되는 곳에 자리 잡은 관음전을 향해 간다. 관음전 안엔 부처님을 모시지 않고 있다. 저 밖에 서 있는 커다란 은진미륵이 이 전각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관음전 안으로 들어가 통유리를 통해서 은진미륵을 바라본다. 은진미륵의 얼굴이 유리창을 가득 메운다. 이 안에서 바라보면 그토록 거대한 은진미륵도 그다지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밖에서 바라보는 것보다 훨씬 덜 위압적이다.

관음전 동쪽으로 몇 발짝 걸어가면 특이한 석문이 있다. 네모난 돌기둥을 양쪽에 세우고나서 기둥 위에 사각형의 넓적한 돌을 얹어 놓은 것이다. 기둥에는 앞면에는 '관촉사'와 '해탈문(解脫門)'이라는 글씨를 새겨 놓았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은진미륵을 세운 후 참배객들이 너무 많이 모여들자 불상을 보호하려고 담장을 쌓고 석문을 만든 것이라고 한다. 동·서·남·북 4곳에 이러한 문을 두었다고 하는데 동쪽에 세운 이 문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끝까지 긴장을 풀지 않은 석수의 장인 정신

 석탑 앞에 놓인 충남도 유형문화재 제53호 배례석.
 석탑 앞에 놓인 충남도 유형문화재 제53호 배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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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물  제232호 관촉사 석등.
 보물 제232호 관촉사 석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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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전 뒤, 석탑이 서 있고, 그 앞에는 아름다운 조각이 새겨진 배례석이 있다. 배례석이란 절을 찾은 불자들이 부처님께 합장하고 예를 갖추는 장소를 말한다.

배례석은 직사각형의 받침돌 형태이다. 옆면에는 안상(眼象)을 옅게 새긴 후 그 안에 고사리 무늬 같은 버섯구름 모양을 새겨 넣었다. 윗면 가운데엔 커다란 연꽃이 새겨져 있있고,  그 좌우에는 그보다 약간 작은 연꽃 두 송이와 연줄기를 새겨져 있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배례석은 매우 정교하면서도 장중한 느낌을 준다. 배례석에 이토록 정교한 조각을 새겨넣은 것은 흔치 않은 경우다. 대개의 경우 아무런 조각이 없는 그저 사각형의 받침돌만을 놓아둘 뿐이다. 내가 보기에 이 배례석을 새긴 석수는 아주 장인 정신이 투철한 사람이다. 마지막까지 긴장을 풀지 않고 배례석에까지 저렇게 정성을 들였으니 말이다.

관촉사의 상징인 은진미륵을 향해 다가간다. 은진미륵을 향해 다가가다 보면 바로 앞에 석등이 있다. 상대석 위에 4개의 기둥을 세워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세운 형태다. 특이한 것은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바로 올리지 않고 마치 2층 누각을 세우듯 화사석 하나를 장식처럼 얹어 넣었다는 것. 고려시대 석등만이 가진 특징이다. 귀 꽃이 솟구쳐 오른 지붕돌 귀퉁이가 이 석등에 생동감을 불어넣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 다음으로 큰 석등이라고 한다.

지배자의 이데올로기가 투영된 은진미륵

 삼성각 돌계단에서 바라본 보물 제218호 관촉사석조미륵보살입상.
 삼성각 돌계단에서 바라본 보물 제218호 관촉사석조미륵보살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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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속칭 은진미륵이라 부르는 석조미륵보살입상에 선다. 높이가 18m나 되는 거대한 석불이다. 바라보는 이를 질리게 할 정도로 큰 석상이다.

어떻게 해서 이토록 커다란 미륵불을 조성한 것일까.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이 무거운 돌부처를 일으켜 세웠을까. 이 불상을 조성하게 된 경위는 은진미륵 앞에 서 있는 <관촉사사적비명>에 자세하게 적혀 있다.

고려 광종 19년(968), 사제촌에 사는 한 여인이 있었는데 고사리를 캐고 있는데 반약산 서불 골짜기에서 동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 나는 쪽으로 나가보니 커다란 바위가 땅속에서 솟아났다.

지방 관아에선 이 이적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불상을 조성하라는 계시로 판단한 조정은 판단하고 불상을 조성할 장인을 구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왕명을 받은 승려 혜명이 백여 명의 장인과 함께 본격적으로 불상 조성 불사를 시작하였던 것이다. 석불은 광종 21년(970)부터 목종 9년(1006)에 이르는 37년이라는 오랜 불사 끝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 석불을 바로 세울 길이 막막했다. 고민하던 혜명 스님의 눈에 어린 아이가 흙을 가지고 '부처를 모시는 놀이'를 하는 광경이 눈에 띄었다. 모래를 쌓고나서 그 위에 부처를 세우는 것을 보고 크게 깨달아 그 방법을 적용해 불상을 세우게 된 것이다.

그러면 고려 광종은 왜 이렇게 커다란 미륵불을 조성한 것일까. 광종은 고려 제4대 왕이다. 나라를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왕권확립의 필요성이 절실했을 터. 광종은 자신의 왕권을 과시하는 상징물로 거대한 부처를 조성하게 되었을 것이다. 거대한 미륵불을 세울 가장 효과적인 장소는 어디일까.  아직도 옛 백제를 그리워하는 유민들에게 이젠 새 왕조가 열렸음을 상기시켜주는 장소로 백제·후백제의 고토인 논산만한 곳이 있을까.

가만히 은진미륵을 노래한 논산 출신 박용래 시인의 시'풍각쟁이'을 읊조려본다. 그는 신화적 상상력을 가미해 이렇게 노래한다.

은진미륵은
풍각장이
솔바람 마시고
댓잎피리 불드래

진달래철에는
진달래 먹고
국화철에는
국화꽃 먹고
동산에 달 뜨면
거문고 뜯드래

아득한 어느 날
땅속에서 우연히
솟아오른 바윗덩이
꽹과리 치고 북 치고
솟아오른 바윗덩이
혜명대사 예언으로
미륵불이 되드래
- 박용래 시 '풍각장이' 부분

한낮이라 그럴까. 시의 흥취가 전혀 살아나지 않는다. 아무래도 이 시는 밤에 읊어야 좋은 시가 아닌가 싶다. 그것도 석등 화사석에 불 밝히고서. 나는 답사를 갈 때마다 거기에 관련된 시를 반드시 찾아보고 떠난다. 절이나 암자를 찾는 것은 마음속에 고요한 오솔길 하나 내고 싶을 때이다. 잠시나마 마음의 오솔길을 찾았을 때, 시를 떠올리거나 읊게 되면 감흥이 더욱 생생하게 살아나기 때문이다.

주인의 시선으로 국토를 바라보라

 은진미륵 뒤에서 바라본 관촉사 전경.
 은진미륵 뒤에서 바라본 관촉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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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양산 정상에서 바라본 풍경. 멀리 대둔산이 보인다.
 반양산 정상에서 바라본 풍경. 멀리 대둔산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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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몇 차례 다녀갔지만 반야산 정상까지 올라간 적은 없다. 오늘은 꼭 반야산 꼭대기까지 올랐다 가야지. 산길에는 십 여미터가 멀다 하고 장승이 서서 나그네를 맞이한다. 이윽고 반야산 꼭대기 정자에 오르자 사방이 다 바라다보인다. 논산평야는 물론 계룡산·대둔산까지도.

구조주의의 선구자이면서 시론(詩論)으로도 유명한 프랑스 사람 바슐라르는 이렇게 눈 아래 펼쳐지는 풍경을 내려다보는 것을 가리켜 지배자적인 시선이라 했다. 나는 이 말을 바꾸고 싶다. 지배자적 시선이 아니라 주인적 시선이라고 말이다. 자신이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땅을 바라보는 마음 가운데는 아마도 내가 정 붙이고 살아가는 이 땅이 얼마나 아늑하고 좋은 곳인가를 확인하고픈 심정도 들어 있을 것이다.

한 없이 푸르게 펼쳐진 논산평야. 그리고 잔물결처럼 아득히 흘러가는 금남정맥의 산들.  여행의 끝에서 확인하는 건 우리 국토에 대한 사랑이다. 아아, 이 땅 어디를 가거나 불국토 아닌 곳이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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