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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시위가 새로운 논란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가두시위의 불법성, 폭력성 논쟁이 그것이다.

 

보수언론은 일제히 '촛불시위 변질', '정부의 안일한 대응', '평화시위 한다더니 거리의 무법자, 시민들 분통' 등의 기사를 쏟아내면서 그나마 평화적이었던 촛불시위가 불법과 폭력으로 '변질'되었다고 야단이다. 경찰청장은 '배후' 운운하면서 엄정한 사법처리를 고장난 라디오처럼 되풀이하고 있고, 인터넷에서도 '빨갱이' 운운하는 낯익은 문장들이 공세를 시작했다.

 

이들 주장의 핵심은 '평화로웠던 의견표명'이 가두로 나오면서 실정법을 명백히 위반했고, 이것은 전문 운동권의 배후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며, 공권력에 저항했기 때문에 '폭력' 시위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촛불시위는 '거리로 나섰기 때문에' 민주적 정당성을 상실했다는 것이 이들이 하고픈 이야기다.

 

과연 그럴까? 과연 국민의 의사표명이 '합법'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면 민주적 정당성이 사라지는 것일까?

 

위법으로 저항할 정당한 국민의 권리 '저항권'

 

합법이라 정당하고, 불법이라 부당한 것이 아니다. 불법이라도 민주적 정당성이 부여되는 저항이 있다. 바로 저항권이다.

 

법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저항권을 개인이나 특정 집단이 통치권자나 국가권력 소유자의 불법적인 행위에 대하여 다른 모든 합법적인 보호수단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거나 그러한 보호수단을 행사하더라도 실효성을 예견할 수 없는 경우에 공개적으로 복종을 거부하거나(소극적 저항) 실력을 행사하여(적극적 저항) 저항하는 권리(또는 의무)로 정의하고 있다.

 

정상적인 민주국가에서는 기본권의 보장과 다양한 견제기구, 법률을 통해 국민의사를 전달한다. 이런 경우에는 저항권을 행사할 상황 자체가 없다. 법률적 수단을 통해 합법적으로 이루어지는 저항은 저항권의 행사라기보다 정상적인 정치활동이다.

 

그러나 이런 합법적인 수단이 없거나, 실효가 의심스러운 상황에서는 위법적인 저항이 민주적 정당성을 얻는다. 즉 저항권의 핵심은 권력자에 대한 '불법적인', 즉 실정법에 얽매이지 않는 항거에 있다.

 

어떤 사회에서는 위법한 행동이 다른 사회에서는 반드시 그렇지 않을 개연성은 항상 존재한다. '법의 불합리성'을 제기하는 저항, 시민불복종 운동의 경우 새로운 입법행위를 촉구하는 정신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운동의 성공으로 특정 법이 폐기된다면 위법성의 문제는 사후 정당화된다. '독약은 약이 아니라 독일 뿐'이라는 노래 가사처럼 법으로 인정하기 어려운 악법은 부지기수다.

 

물론 모든 위법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전제가 있다. 학자들은 대부분 권력자의 불법행위에 대한 저항권만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는 권력자의 '합법적인 권력' 행위는 저항권 행사의 대상이 될 수 없는가다.

 

대개 권력자들은 자신에게 유리한 법률을 만들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또한 정상적인 '정치활동'도 불법으로 규정할 수 있으며, 이 모든 과정에 걸쳐 특정한 정치적 이념을 상식으로, 즉 지배이데올로기로 확고히 해 이외의 주장에 대해서는 원천적으로 불법화할 수도 있다. 때문에 통치 권력의 '합법-불법'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매우 모호하다. 특히 권력의 독재가 심화될수록 이런 심판의 기준을 제시하는 사법부가 국민의 편에 선 적은 거의 없다. 

 

촛불문화제가 정치구호를 남발했기 때문에 일몰 이후 명백한 시위이며 불법이라 주장하던 정부가 가두시위가 확산되고 있는 28일에는 "촛불문화제는 '표현과 집회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차원에서 폭넓게 인정하되 불법 가두시위는 법질서 확립을 위해 엄단한다"는 대응 원칙을 결정한 것은 권력자들의 자의대로 합법과 불법을 규정할 수 있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저항권 행사 대상을 국가권력 소유자의 '불법적인 행위'로 제한시키는 것은 매우 소극적인 해석이다. 예를 들어 유신헌법은 '국민투표'라는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 통과됐다. 또한, 체육관에서 대통령이 허락한 소수의 사람들이 모여 대통령을 뽑았던 것도 외형상 합법이다. 그렇다면 이 때문에 독재시절 이뤄진 모든 민주화 시위의 정당성이 사라진다고 할 수 있을까?

 

따라서 국민 저항권의 두 번째 핵심은 단순한 합법과 불법의 여부가 아니라 권력자가 국민의 의사와 명백히 다른 정치행위를 자행할 때, 주권을 가진 국민이 이를 통제하기 위한 권리로 이해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가깝게는 2004년 합법적인 대통령 탄핵을 자행한 국회에 대한 국민저항을 저항권의 한 사례로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헌법과 저항권의 정당성

 

이처럼 국민의사와 괴리된 권력자에 대한 비합법적 저항을 의미하는 저항권은 흔히 법에 명확히 명시되어 있는 실정법으로 보장되기보다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존재하는 자연법으로 인정되어 있다. 따라서 실정헌법상 저항권이 규정되어 있다하더라도 이는 단지 자연법적 저항권을 확인하는 성격을 가진다.

 

우리 헌법의 경우, 6월항쟁의 영향으로 인해 저항권 명시가 쟁점이 된 바 있으나, 저항권을 직접 명시하지 않고 헌법 전문에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는 문구를 추가함으로써 저항권 규정을 대신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또한 제37조 1항의 "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헌법에 열거되지 아니한 이유로 경시되지 아니한다"는 조항도 자연권으로서의 저항권을 인정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그리고 헌법 제1조에서는 국가의 주권이 명백히 국민에게 있음을 표명했으므로, 주권자의 주권행사를 가로막는 것은 명백한 위헌이다. 헌법 자체가 추상적인 문구이기 때문에 해석하기에 따라 다양한 의견이 나올 수 있지만, 6월항쟁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현행 헌법이 국가운영의 주체를 선출된 권력자보다 국민에게 있음을 표명한 것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미국산 쇠고기 협상이 '합법적'으로 이루어진 통치행위이며 합헌이라 할지라도, 국민의 의사표현과 정치활동을 가로막는 것은 명백한 헌법 위반이다. 정치활동을 가로막는 행위는 단순히 가두시위 참여자를 연행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공권력을 동원하여 인터넷 감시, 여론 조작, 배후 운운하는 공포감 조성 등의 활동이 모두 포함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법률적으로 합법적인 정치활동 또한 국민 저항권의 대상이 될 수 있어야 하지만, 주권자인 국민의 정치활동을 가로막는 명백한 위헌 행위는 이견 없는 국민 저항권의 대상이다.

 

따라서 정부와 공안당국이 저항의 위법성을 들이대면서 민주적 정당성을 운운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미천해 나타나는 반응일 뿐이다. 헌법에 명시된 4·19 민주이념이 이승만 정권이 허용한 시위의 현장에서 절대 도로로 내려오지 않아 만들어진 정신은 아니지 않는가? 저항권을 불순한 배후세력의 의도적 도발 정도로 인식하는 편협한 사고로는 민주주의가 형상화된 촛불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정부와 공안경찰은 국민의 저항이 단순히 '아스팔트로 올라섰기 때문에' 불법이며, 이 때문에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 아니라, 국민의 뜻보다 미국과의 협상파기를 더 두려워하는 통치자의 행위가 주권재민의 원칙에 비추어 위헌적이지 않은 지 고민해볼 일이다.

 

국민의 참여 합법화가 방안

 

물론 국민의 저항권이 일상화되면 국가적인 혼란도 일상화된다는 우려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일상적인 국민저항을 막는 방법은 저항행위에 대한 '협박'이 아니라 '저항의 합법화', 즉 지금의 저항을 정상적인 정치활동으로 만드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국민이 청원을 하고, 서명을 하고, 촛불을 들고 모여도 어떤 의견도 권력자에게 강제되지 않는 상황에서 저항의 강도가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은 기초적인 상식이다. 만일 정권이 제시한 합법적인 경로를 통해 국민의 의사가 수렴되고 관철될 수 있는 합법적 경로가 있었다면, 과연 가두시위가 호응을 얻을 수 있었을까?

 

이런 의미에서 지금의 가두시위를 만든 것은 정권의 경직된 사고방식과 더불어 국민으로부터 정치를 빼앗아간 직업 정치꾼들이다. 이들은 국민을 실제로 주권을 행사하는 실체로 보기보다는 법적 지위가 평등한, 동일한 국적보유자 전체에 불과한 것으로만 간주한다.

 

따라서 국민 개인의 의견은 국가운영에 직접 반영할 수 없으며, 오로지 국민 전체를 대표하도록 선출된 국회의원 등에게만 국가운영의 권리를 보장한다. 권력자를 제어할 최소한의 장치도 국회에만 있으며,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할 권한도 국회 내에만 머물러 있다. 국민이 정치에 개입할 최소한의 통로인 국민투표나 국회의원·대통령 소환, 국민발안 등은 전혀 없다.

 

물론 국민의사의 직접투입을 목표로 하는 다양한 직접민주주의 기제가 과거 독재정권의 지배를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오용되기도 했다. 나찌도 합법적으로 집권했으며, 유신헌법은 국민투표로 합리화 됐다.

 

그러나 국민의 오판을 비판할 정도로 국회의원들이 정당하고 용감한 정치 활동을 해왔다고 자부할 수 없을뿐더러, 민주적 정보공유와 국민 간의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차단된 상태에서 이루어진 형식화된 국민투표의 문제를 국민의 정치참여를 가로막는 논리로 사용할 수는 없다. 국민의 의사가 왜곡될 수 있다면 왜곡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지, 국가운영의 주체로서 국민의 역할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또한, 국민의 합법적인 정치활동을 가로막는 것은 각종 제도의 부재에만 있지 않다. 유형의 장벽 이외에도 온갖 추잡한 정치활동으로 국민이 정치 자체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게 만드는 무형의 냉소주의도 국민의 정치참여를 박탈한다. 그리고 촛불시위처럼 역동적인 국민의 정치활동을 불법 운운하며 차단하려는 공안당국의 시도도 같은 효과를 의도한다.

 

정말 정권이 가두시위를 막고 싶다면 국민에게 정치를 돌려줘야 한다. 정치를 더러운 것, 짜증나는 것, 쳐다보기도 싫은 것으로 만들어 자신들만 소유하려 하지 말고, 누구나 참여하는 것, 나의 일상 문제와 관련된 것,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거리로 나가 교통을 방해하는 사람들을 손가락질 하는 것은 이명박 정부가 아니라 국민들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는가? 왜 지금 경찰과 조중동만이 가두시위를 불편해 하는가? 시민들은 불편해하지 않는다. 다만 불편한 것이 있다면 지난 대선에서 자신들이 찍은 투표용지에 대한 아련한 추억이리라.

덧붙이는 글 | * 이 기사는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새사연)의 대안정책 웹사이트 이스트플랫폼(www.epl.or.kr)에도 실렸습니다. 손우정 기자는 새사연의 상임연구원입니다. 


태그:#촛불집회, #저항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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