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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운하 건설 반대'의 뜻을 알리며 도보순례 중인 이원규 시인.
 '대운하 건설 반대'의 뜻을 알리며 도보순례 중인 이원규 시인.
ⓒ 한국문학평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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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규(46)는 '집 안'이 아닌 '길 위'에서 노래하는 시인이다. 그가 길과 맺어온 인연의 역사는 이미 오래됐다. 10여 년 전 네온사인 번득이는 살풍경의 서울을 떠나 갖가지 이름 모를 나무와 풀이 반기는 지리산 자락에 정착한 이 시인.

지난 2000년 지리산 실상사의 수경스님과 태백산에서 을숙도까지 1300리 길을 함께 걸은 이원규는 그 첫 도보순례를 시작으로, 2002년에는 문규현 신부 등의 종교인들과 "무분별한 개발중심주의를 경계하라"는 목소리를 내며 전라북도 새만금에서 서울까지 삼보일배를 했다.

제주도를 포함해 남한 땅 소읍까지를 두루 밟은 2004년 도보순례 역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이 시인은 그 길에서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공생을 꿈꿨다.

그리고 2008년 봄. 이원규는 다시 한강과 낙동강, 영산강과 금강 일대를 100일 이상 걸었다. 종교인, 일반시민, 동료 작가 박남준과 동행이었다. 이번엔 '한반도 대운하 건설 반대'라는 슬로건을 내걸고였다.

이처럼 길 위에서 고뇌하고, 사랑하고, 시를 써온 시인이 새로운 시집을 내고 독자들과 만났다. <강물도 목이 마르다>(실천문학사). 도보순례자로 살았던 짧지 않은 시간. 이원규는 아래와 같은 깨달음을 얻는다.

황지연에서 을숙도까지/걷고 걸어 스물닷새/민족의 젖줄을 따라가다 보았다//시커먼 폐수의/얼굴 뭉개진 사내들이 지나간 자리마다/우는 돌이 있고/우는 여자가 있고/우는 아이가 있다는 것을//홀로 걷고 또 걷다가/내 그림자에게 길을 물으니//새는 날며/저의 보드라운 깃털로/공중의 길을 지우고/물고기는 헤엄치며/저의 지느러미로 물속의 길을 지우고.
- 위의 책 중 '내 그림자에게 길을 묻다' 전문.

자연의 길이 아닌 '인공의 길'을 만들어 물길을 통제하겠다는 한반도 대운하 계획. 이원규의 이번 시집에선 은유적이건 직설적이건 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게 드러나고 있다. '자연주의자'로서의 삶을 살아온 시인으로선 어찌 보면 당연한 일.

환경파괴를 경계하는 자연주의자의 목소리... 삶에 관한 '성찰'의 눈길도

자연과 인간의 공생, 환경파괴에 대한 경계와 더불어 이번 시집을 관통하고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핵심어는 '성찰'이다. 불혹을 훌쩍 넘겨 지천명을 목전에 둔 사내의 지극한 자기반성과 생에 대한 과묵한 관조. 이를 잘 보여주고 있는 시가 '물안개'다.

이명인가/섬진강 변 마고실/밤새 쏘가리가 운다//징한 것들/격정의 날들이 가고/물이 차다 뼈마디가 시리다//바람이 태어나고 죽는 곳/꼭 한번은 가보고 싶었지만/이 맛도 솔찮다/마흔 넘어서야 찾아온/체외수정의 새벽 물안개….

격정의 날을 보내고 이제는 강에서 울어대는 물고기의 울음소리까지 어렵잖게 들을 수 있게 된 시인. 그 예민한 시적 촉수를 이미 알고 있는 선배시인 곽재구는 "동시대에 이원규와 같은 시인과 함께 지리산의 꽃과 섬진강의 물안개를 바라보며 살아간다는 것은 축복이며 아름다운 일"이라는 상찬을 시집을 얹어주었다.

<강물도 목이 마르다>의 서시격인 '족필(足筆)'을 읽는다. '발로 쓰는 시' 혹은, '발이 곧 붓인 시인이 쓴 글'이라는 뜻이 아닌가. 1만리 이상의 길을 걸어본, 그 길 위에서 수많은 밤을 지새워본 사람만이 노래할 수 있는 작품이기에 그 울림이 크고 깊다. 그야말로 절창이다.

이원규 신작 시집 <강물도 목이 마르다>
 이원규 신작 시집 <강물도 목이 마르다>
ⓒ 실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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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자 아니고선 함부로
저 풀꽃을 넘볼 수 없으리

바람 불면
투명한 바람의 이불을 덮고
꽃이 피면 파르르
꽃잎 위에 무정처의 숙박계를 쓰는

세상 도처의 저 꽃들은
슬픈 나의 여인숙

걸어서
만리 길을 가본 자만이
겨우 알 수 있으리
발바닥이 곧 날개이자

한 자루 필생의 붓이었다는 것을.

1962년 경상북도 문경에서 태어난 이원규는 1984년 <월간문학>을 통해 문단에 얼굴을 내밀었다. <빨치산 편지> <돌아보면 그가 있다> <옛 애인의 집> 등의 시집을 냈고, 산문집 <벙어리 달빛>의 저자이기도 하다. 시인인 동시에 '생명평화운동가'로 불리는 그는 신동엽창작상과 평화인권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강물도 목이 마르다 - 이원규 시집

이원규 지음, 실천문학사(2008)


태그:#이원규, #강물도 목이 마르다, #대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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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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