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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정책을 비롯한 이명박 정부의 대외정책의 문제점은 이미 수도 없이 지적되었고, 또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비판과 결과를 자초한 데에는 이명박 정부의 중대한 오판이 자리잡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한미관계를 남북관계보다 우위에 두면서 한미동맹 강화를 위해서는 대북 상호주의를 채택해야 한다는 '낡은 사고'가 바로 그것이다. 이를 '낡은 사고'라고 칭한 것은 단순히 남북관계보다 한미관계를 우위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미국, 미국'하면서 정작 그 미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과 통일외교안보 참모진들은 DJ-노무현 시대의 한미관계가 악화된 핵심적인 이유를 대북정책을 둘러싼 한미간의 갈등에서 찾아왔다. 그리고 그 책임을 '햇볕정책'으로 불려온 '남북화해협력' 정책으로 돌렸다. 이에 따라 한미관계 강화를 위해서는 북핵 폐기 우선 및 남북경협과의 연계, 북한 인권 거론, 상호주의 원칙 적용 등을 통해 지난 10년간의 정책과는 다른 대북정책을 추구해야 한다는 프레임을 짰다.

 

이명박 정부, 왜 과거의 부시만 만나고 있나  

 

이러한 정책 노선은 2006년 '이전'의 부시 행정부였다면 통할 수 있었다. 그런데 부시 행정부는 2006년 말-2007년 초에 대북정책을 전환했다. 그리고 이명박 정부는 2008년 2월에 출범했다. 1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이 있었음에도 이명박 정부가 '과거의 부시'를 상대하려 했던 것이다.

 

오늘날의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은 이명박 정부가 그토록 거부해온 '햇볕정책'과 너무나도 닮아 있다. 과거의 부시는 북한이 먼저 변해야 한다며 양자회담을 거부했지만, 2007년 이후부터는 '대화를 통한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대북 식량 지원이 북한 정권의 생존을 돕는다며 대북 식량지원을 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지만, 인도주의 차원에서 50만톤의 식량을 지원하기로 했다. "악행을 보상하지 않겠다"며 북한이 핵을 포기하기 전까지 에너지 지원과 관계 정상화 등 경제적·정치적 보상을 제공하지 않겠다던 입장도 확 바꿨다.

 

이명박 정부가 또 한가지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다. 부시 행정부가 '선(先) 핵폐기'를 추구하고 있다는 오판이다. '과거의 부시'가 이를 추구한 것은 사실이지만, '오늘날의 부시'는 동시행동의 원칙에 따라 '주고받기식' 협상을 하고 있다. 급기야는 북한의 핵무기와 핵물질의 폐기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및 북미관계 정상화와 맞교환할 준비도 하고 있다.

 

이는 부시 행정부가 원해서가 아니라 2001-2006년간의 대북정책의 참담한 실패를 딛고 '임기 내 북핵 해결'을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북미관계 정상화는 '한반도 비핵화 달성'이라는 외교 목표를 위한 수단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반면 북한에게는 한반도 비핵화가 북미적대관계 종식 및 평화체제 구축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는 수단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양자의 이와 같은 이해관계의 교차점에 바로 '동시 행동 원칙'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게는 어느 것이 수단이고 목표라고 말할 수 없다. 둘 모두 21세기 초엽에 반드시 달성해야 할 목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선 북핵 폐기'라는 고장난 라디오를 반복해서 틀고 있다. 북핵 폐기를 위해서는 북미관계 정상화 및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같은 '근본 문제'가 병행되어 해결되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상식조차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한미공조를 통한 통미봉남 저지? 미일관계를 보라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명박 정부의 부시를 향한 '짝사랑'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얼마전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현재 한미간의 긴밀한 공조나 남북관계 현안에 미뤄볼 때 통미봉남 전략은 가능하지도 않고 허용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지난 캠프 데이비드 한미정상회담에서 선언한 '한미간의 전략동맹' 관계를 고려할 때, 미국 정부가 북한의 통미봉남 전술에 응하지 않을 것이라는 짙은 기대감이 베어 있다.

 

그러나 이는 짝사랑에 불과하다. 부시의 대북정책이 이익과 업적 논리에 따라 바뀐 지 1년이 넘었다. 그리고 최근 북미관계의 급진전은 남북관계의 악화 시기와 정확히 일치한다. 부시 행정부가 통미봉남을 우려했다면, 50만톤의 식량 지원이나 대북 테러지원국 해제를 추진하고 있는 현실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부시 행정부가 이명박 정부의 정치적 입장을 고려해 '한반도 비핵화 달성'이라는 유일무이한 대외정책의 업적을 뒷전에 둘 리 만무하다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한미공조를 통해 통미봉남을 막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짝사랑'에 불과하다는 것은 미일관계를 보더라도 명확하게 드러난다. 미국이 아시아 전략의 중심축을 한미동맹보다 미일동맹에 두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만큼 미국은 한국보다 일본을 중시한다.

 

그럼에도 부시 행정부는 '한반도 비핵화'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납치 문제에 관한 일본의 강한 우려와 반발에도 '마이웨이'를 고집하고 있다. 일본이 여러 차례에 걸쳐 '납치 문제 해결 없는 대북 테러지원국 해제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전달했음에도, 테러지원국 해제는 일본인 납치 문제와 무관하게 진행될 것임을 거듭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외면하고 한미 공조로 통미봉남을 막을 수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대단히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이명박 정부가 통미봉남에 말려들지 않으려면, 부시 행정부에게 북미관계 '속도 조절'을 요구해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요구하기도 힘들고, 그럴 논리와 명분도 없다. 오히려 어설프게 이러한 시도를 했다가는 남북관계의 악화와 6자회담에서의 '왕따'만 자초하게 될 것이다. '일본이 한국의 미래'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통미봉남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이명박 정부가 남북관계 악화 속에 북미관계 개선으로 인한 통미봉남에 조바심을 갖게 되면, 북한은 이명박 정부를 길들일 수 있는 유력한 지렛대를 갖게 된다는 점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부는 최근 북한의 대남 공세를 '남한 길들이기'로 규정하고 무시 정책으로 일관해왔다. 그런데 북미관계 개선에 조바심을 드러내면서 스스로 길들이기 전략에 말려들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나타나고 있다.

 

일례로 미국 정부가 50만톤의 대북 식량 지원을 추진하고 북한과의 협의를 통해 모니터링 방식에 상당한 수준으로 합의하자, 이명박 정부는 당황한 빛이 역력하다. '북한이 요청해오면 고려하겠다'는 고자세에서 세계식량기구(WFP)를 통한 소규모 지원 방안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북한이여, 먼저 요청해서 체면 좀 세워달라'는 식의 러브콜을 보내는 저자세로 돌아서고 있다. '북한이 요청하면'이라는 어설픈 원칙을 고수하다가 국제사회의 웃음거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 전개가 말해주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이명박 정부가 '한미공조를 통한 통미봉남 저지'라는 환상에 메여있을수록,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남한을 압박할 것이라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북한의 최근 대남 전략은 통미봉남이 아니라 통미압남(通美壓南,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남한을 압박하는 전술)이라는 점이다. 봉남이 '남한과 상대하지 않겠다'는 의미라면, 압남은 '남한의 정책 변화를 목표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바로 이 지점에 사면초가에 몰리고 있는 이명박 정부의 탈출구가 있다. 우선 북한이 통미압남을 통해 원하고 있는 것은 남한이 수용가능한 요구들이다. 주한미군 철수나 한미합동군사훈련 중단과 같이 미국도 수용할 수 없는 요구가 아니라, 6.15 공동선언과 10.4 남북정상선언 존중이라는 미국도 인정하는 것들이라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6·15 공동선언과 10·4 남북정상선언 존중 입장을 밝히는 것이 원칙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믿는 듯 하다. 그러나 대통령을 포함해 고위 당국자 누구도 공개적으로 두 선언을 부정한 적이 없다.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바로 여기에 있다.

 

대통령이 직접 '두 선언의 기본정신은 존중한다, 다만 변화된 환경에 맞게 보완·발전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며,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북한에게 대화 제의를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실기(失機)의 위기에 처한 대북 식량지원 입장을 천명하는 것과 함께.  

 

이명박 정부여, 자신감과 포부를 가져라

 

기실 정부가 '통미봉남'이니, '남한 길들이기'니 하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국격을 스스로 떨어뜨리는 것이다.

 

남한은 북한보다 경제력이 100배 정도 높고, 군사비도 10배 이상 사용하고 있다. 또한 세계 최강국이라는 미국과 '전략동맹'까지 선언해놓고 있다. 그런데 전략동맹의 상대인 미국이 한미동맹의 '공동의 적'인 북한과 가까워지는 것을 걱정하는 처지에 있다. 물리적으로 압도적인 우위에 있으면서 상대방에게 길들여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대외정책이 빚어낸 지독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의 임기는 아직 4년 반이 넘게 남았다. 걸어온 길보다 갈 길이 훨씬 멀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가야 할 길 곳곳에서는 환갑을 넘긴 적대적인 한반도 분단사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역사적 기회들이 이명박 정부에게 손짓을 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이러한 역사적 기회를 잘 포착한다면, 임기 내에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이라는 역사에 길이 남을 수 없는 업적을 남길 수 있다. 이는 이 대통령의 핵심 공약인 '747(연평균 경제성장 7%, 국민소득 4만달러, 세계 7위 경제대국 도약)'보다 훨씬 현실적이고 역사적일 뿐만 아니라, 이 공약을 실현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준다. 'CEO 출신 대통령'이라면 이 정도의 계산은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덧붙이는 글 | 정욱식 기자는 평화네트워크(www.peacekorea.org)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태그:#대북정책, #통미봉남, #이명박, #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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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네트워크 대표와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의 관심 분야는 북한, 평화, 통일, 군축, 북한인권, 비핵화와 평화체제, 국제문제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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