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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광주민중항쟁 28주년이 되는 해다. <오마이뉴스>는 1980년 5·18 당시 고교생의 신분으로 항쟁에 참여했던 한 '고교생 시민군'의 회상기를 연재한다. 세월이 흘러 '고교생 시민군'들은 성인이 되었지만 그들의 활동에 대한 기록과 평가는 아직 미흡한 상태다. <오마이뉴스>는 이 연재가 '고교생 시민군'의 활동 내용을 통해 5·18을 성찰하는 귀중한 기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편집자주>

 

대장정은 시작되고

 

군부대에서 나온 시위대원들 가운데 절반은 고향이나 인근에 사는 친지를 찾아 떠나고, 광주까지 갈 동지들은 50여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동안 생사고락을 함께 했기 때문인지 헤어지면서 조심해서 잘 가라고 서로 인사할 때는 모두 눈시울을 붉혔다.

 

항쟁의 진원지이고 시위대원들의 마음의 고향인 광주. 시위대원들은 광주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목포에서 광주까지 걸어가는 대장정이 시작된 것이다. 마치 회귀본능을 가진 연어가 수만리 망망대해를 헤엄치는 길고 긴 여정 끝에, 마침내 자신들이 태어난 강기슭으로 기어코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시위대원들에겐 '광주'는 꼭 가야할 곳이었다. 광주에 집이 있고, 광주 상황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걸어가는 광주-목포간 도로는 차가 다니지 않았다. 대원들은 아스팔트 도로를 걷다가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노래를 불렀다. 피곤하다 싶으면 도로변에서 불규칙적으로 휴식을 취한 뒤 걷곤 했다.

 

우리는 목포와 가까운 무안읍을 1차 숙박지로 결정했다. 군부대에서 석방된 후 3시간 이상을 걸었다. 주위가 어두워져 사방이 캄캄했다. 도로변 집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과 하늘의 별들만 반짝일 뿐이었다. 도로 옆 야산에서는 맹꽁이들이 낯선 이방인들을 경계하듯 요란히 울어댔다.

 

아스팔트 도로를 걷다가 다리가 아프면 포장이 안 된 갓길을 따라 걸었다. 친구 준수와의 대화는 지루한 행군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고, 지친 몸에 생기를 주었다. 목포 입구 지산이란 곳에 위치한 군부대에서 출발한 지 4시간쯤 되어 무안읍에 도착했다. 수소문 끝에 무안JC 회장과 연락이 되어 여관과 식사를 제공 받았다.

 

우리들은 무안읍을 관통하는 조그만 하천 옆에 있는 여관에 여장을 풀었다. 여관은 일본식으로 지어진 단층집이었다. 밤 10시가 넘었다. 여관에서 식사가 준비되지 않아 조금 떨어져 있는 식당에까지 이동, 밥을 먹었다. 우리는 긴 행군의 피로에 못 이겨 대충대충 세면을 하고 바로 잠을 청했다.

 

5월 24일, 아침 해가 저 멀리 산마루에서 떠오르고 있었다. 아직 여독이 풀리지 않아서인지 찬란해야 할 아침 해가 무겁게 보였다. 우리들은 세면과 식사를 마치고 다시 광주로 올라갈 준비를 했다.

 

무안JC 회원들이 여관에 왔다. 그들은 광주로 가는 길목인 함평군 학교면에 계엄군이 검문검색을 한다면서 우회할 것을 권유했다. 우회로는 영산강을 건너서 나주를 거쳐 광주로 가는 길이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함평을 경유해서 광주로 가자는 대원들과, 영산강을 건넌 뒤 영산포를 거쳐 광주로 가자는 대원들로 의견이 갈렸다. 대원들은 행동통일을 하지 못했다. 대원 중 일부는 함평 쪽으로, 일부는 영산강을 건너는 쪽으로, 또 다른 일부는 부근에 사는 친인척 집을 찾아 흩어졌다. 나와 친구 준수를 비롯한 열명 남짓한 대원들은 영산강을 건너기로 했다.

 

우리는 무안읍에서 무안 JC 회원들이 제공한 경운기를 타고 비포장도로를 40여분쯤 갔다. 마침내 전남의 젖줄인 영산강에 도착했다. 선착장은 조그만 배를 접안할 수 있도록 콘크리트로 단단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우리들을 경운기로 실어다 준 회원들은 강을 건널 수 있는 통통배까지 제공해주고 사라졌다.

 

영산강을 건너다

 

우리가 탄 배는 길이가 3m가 채 안된 조그만 배였다. 많이 탈 수가 없어 두 번에 걸쳐 강을 건넜다. 1차로 다섯 명 정도가 승선했다. 무게 때문인지 파도가 심하지 않은데도 강물이 배안으로 들어왔다. 배가 가라앉을 것 같았다. 우리가 도강(渡江)한 지역은 영산강 하구 쪽이어서 강폭이 2백m가 넘었다.

 

원동기를 설치한 배는 통-통-통 소리를 내며 파도를 맞받아 강물을 가로질렀다. 넓은 강물에 압도당한 나는 강 건너 나주 땅(현 나주시 동강면 대지리 1구)에 몸을 던질 때야 비로소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우리를 안전하게 실어다 준 통통배 주인에게도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먼저 도강한 우리는 강가에서 1백여m거리에 있는 마을 어귀의 큰 당산나무 밑에서 나머지 일행이 강을 건너 올 때까지 쉬었다. 나머지 대원들이 2차로 강을 건너자 우리는 영산포읍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영산강 주위 마을들은 아직도 새마을 운동의 혜택(?)을 받지 못했는지 비포장도로와 초가가 많았다. 대로변의 마을들은 잘 정돈된 원색의 집들이었으나, 조금 들어간 곳은 여전히 초가가 있었다. 한 시간 정도 지나 또 몇 명이 가까운 곳에 자신들의 집이 있다면서 우리 일행과 헤어졌다.

 

우리는 한 시간쯤 걷다가 20여분 쉬고, 목이 마를 때는 마을 어귀 공동우물에서 물을 떠서 목을 적셨다. 더 쉬고 싶으면 햇빛을 피해 도로 옆 야산으로 올라가 나무 밑에서 쉬었다. 5월 하순인데도 여름 날씨처럼 낮에는 무척 더웠다. 여름이 성큼 다가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영암에서부터 함께 다닌 준수와 얘기하면서 걸으니 피곤하지만 참을 수 있었다.

 

"준수야, 벌써 점심때가 되가는데, 오늘 안으로 광주에 들어가기에는 무리가 아니냐?"

"걱정하지 마라. 나주읍에 친구가 하숙하고 있다. 그 친구 집에서 하룻밤 자고 내일 광주로 가자."

 

나주에서 하룻밤 묵는다는 준수의 말에 무척 반가웠다. 어서 빨리 나주읍에 도착했으면 싶었다. 준수는 나주가 고향이었다. 읍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었으나, 몇 시간만 걸으면 고향집에 갈 수 있었다. 그런데도 나 때문에 자기 집에 가지 않고 읍에 사는 친구 집으로 가려는 것이었다. 준수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가끔 지나가는 차들이 만들어 낸 하얀 먼지가 걷고 있는 우리들의 온 몸을 뒤덮였다. 우리와 같은 방향인 나주읍 쪽으로 가는 차라면 붙잡아 타고 가면 되는데, 운이 없게도 모두 반대 방향으로 가는 차들 뿐이었다. 도로 옆 논에서는 농민들이 모내기에 대비해 바쁘게 움직였다. 

 

3시간 정도 걸으니 영산포읍 입구인 장산삼거리(지금은 4거리로 변했고 영산포에서 강진가는 방향으로 고가도로가 놓여 있음)에 도착했다. 삼거리는 영산포에서 동강면 방향으로 가는 길과 영암·강진 방향으로 가는 길이 만나는 곳이었다. 영산포읍에 들어섰을 때에는 이따금 오토바이만이 도로를 질주했다.

 

단잠을 깬 경찰

 

영산포읍을 지나 인접한 나주읍에 도착하자 몇 명 되지 않은 일행들과 또 헤어졌다. 이제 나와 준수뿐이었다. 내일이면 준수도 나주읍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자기 집에 가버리면 혼자서 광주로 가야 했다. 준수와 함께 나주버스터미널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준수의 친구 집에 갔다. 준수의 친구는 다행히 집에 있었다.

 

준수의 소개로 그 친구와 인사를 나눴다. 이름이 재진이라고 했다. 하숙하면서 나주고등학교를 다닌다고 했다. 우리는 그동안 겪었던 일들을 얘기하면서 우정을 나눴다. 준수와 나는 때늦은 점심식사 후 세면도 하고, 옷에 묻은 먼지도 털어내고, 진한 간장 냄새가 나는 양말도 세탁했다.

 

정신적으로 시달리고 육체적으로 피로해서인지 깊은 잠에 빠졌다. 자면서 마치 텔레비전의 단막극처럼 여러 가지 꿈을 꾸었다. 두 시간쯤 잤을 때, 방문 입구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나를 흔드는 것 같았다. 꿈으로 착각하여 그대로 잤다.

 

이번에는 조금 전 부드럽게 흔들던 것과 달리 딱딱한 물체가 허벅지를 강하게 찔렀다. 깜짝 놀라 엉겁결에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옆에서 자고 있던 준수도 일어났다. 눈을 비비면서 방문 입구를 쳐다봤다. 그런데, 이게 웬 날벼락인가.

 

"손들어! 움직이면 쏜다!"

 

준수와 나는 정신을 차릴 여유도 없이 손부터 번쩍 들었다. 우리에게 거총 자세로 위협한 그들은 정복 차림을 하고 있는 두 명의 경찰관이었다. 옆에는 하숙집 주인아주머니와 동네 아주머니들도 서 있었다. 준수의 친구는 보이질 않았다. 우리는 당황한 표정으로 이유를 물었다.

 

경찰관은 조금 전 광주항쟁에 관련된 수상한 사람들이 집에 자고 있다는 신고가 접수되어 확인 차 왔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파출소까지 가자고 했다. 우리는 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그리고 우리는 학생이며 시위대 차를 타고 목포에 갔다가 광주로 올라가던 중에 친구 집에서 쉬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경찰관은 막무가내였다. 일단 파출소에 가서 조사 받고 신분이 확인되면 보내준다고 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경찰관들을 따라서 나주터미널에서 가까운 금성파출소에 갔다. 이유 여하를 떠나 파출소에 가서 조사를 받는다는 게 기분이 좋지 않았다.

 

준수와 나는 파출소에서 직업과 주소 등 신분을 밝혔다. 목포 입구 군부대에 붙잡혀 신상명세를 밝히던 때와는 다르게 사실대로 직업과 주소 등을 말했다. 경찰관은 30분 정도 이것저것 확인했다. 그는 조사 결과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조금 전과는 다르게 광주 상황이 위험하니 조심해서 광주로 가라고 당부의 말까지 했다.

 

조사를 마치고 다시 준수의 친구 하숙집으로 갔다. 주인아주머니가 웃는 얼굴로 맞이하면서 자기가 경찰에 신고했다고 말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준수 친구의 하숙집은 경찰관의 집이었다. 부업으로 아주머니가 하숙을 쳤던 것이다. 우연히 호랑이굴에서 잠을 잔 격이었다. 부창부수(夫唱婦隨)라고 했던가. 어찌됐든 그 아주머니의 투철한 신고정신은 높이 평가할 만 했다.

 

줄 이은 인파

 

5월 25일. 준수의 친구 하숙집에서 아침식사를 든든히 했다. 광주까지 장거리 행군을 하기 위해서는 많이 먹어둬야 했다. 어젯밤 잠자기 전에 빨아뒀던 양말은 아직 마르지 않았지만, 며칠 동안 지니고 다녔던 고약한 냄새가 사라져 기분이 좋았다. 준수와 나는 하숙집 아주머니와 친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광주로 향했다.

 

나주읍을 지나는 광주-목포간 도로 입구에서 준수와도 헤어졌다. 준수는 광주까지 걸어가기도 피로하고 다리도 아파서 못 가겠다면서 지척에 있는 고향집으로 간다고 했다. 광주까지 길동무 삼아 같이 가기를 기대했지만 강요할 수 없었다.

 

시위대 차에 탑승해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영암에서 준수를 만나, 목포와 무안을 거쳐 나주까지 외롭지 않게 올 수 있었는데, 이제는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광주 상황이 진정되고, 개학하면 다시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나주 읍내를 지나 영산강을 가로질러 놓여있는 나주대교를 건넜다. 강바람이 아스팔트의 반사열을 반감시켜 시원했다. 광주-목포간 도로는 한적했다. 주말에 강진 시골집에 내려갈 때는 많은 차들이 다녔는데 지금은 구경할 수가 없었다. 광주로 가는 길에는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이 서너 명씩 짝을 이뤄 걷고 있을 뿐이었다.

 

나주군 금천면 소재지를 지날 때 경운기 한 대가 지나갔다. 경운기 짐칸에는 아저씨들이 타고 있었다. 아저씨들에게 부탁해 나도 짐칸에 올라탔다. 느리게 가는 경운기였지만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주위에서 보고 있던 아저씨와 아주머니들도 같이 타고 가자면서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광주행 느림보 경운기는 만원이 됐다. 짐칸에 열 명 정도는 탔다. 이따금 두세 명이 탄 오토바이가 경운기를 추월해 달려가곤 했다.

 

50대로 보이는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은 자식을 광주에 유학 보내놓고 걱정이 되어 올라가는 중이라고 했다. 영암에 산다는 어떤 아주머니는 고 2년생 아들과 중 3년생 아들이 광주에서 자취하고 있는데, 아무리 전화를 해도 연결이 되지 않아 걱정이 돼 가는 길이라고 했다.

 

완도에서 광주로 가는 길이라고 한 어떤 아저씨는, 아들이 조선대 2학년에 재학 중인데, 집에 오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아 허리띠라도 잡고 내려갈 계획이라고 했다. 짐칸에 탄 모든 사람들의 얼굴빛이 초조함과 걱정으로 창백하게 보였다.

 

광주시와 경계지역인 남평면에 들어서자 도로변에 광주로 가는 인파들이 점점 많아졌다. 대부분 광주에 살고 있는 가족이 걱정되어 올라가는 중이었다.

 

도로변 들녘에는 이른 모가 일광욕을 하듯이 비닐하우스에서 푸른색 얼굴을 내밀고 있고, 모판 옆에는 수확을 앞둔 보리가 노랗게 익어가고 있었다. 늦보리는 속절없이 지나가는 청춘이 안타까운 듯 듬성듬성 아직도 푸르름을 유지하고 있었다.

 

눈물겨운 귀광(歸光)

 

점심 때쯤 겨우 광주시에 진입했다. 아, 얼마 만에 광주 땅을 밟는 것인가! 꼭 5일만이었다. 광주시와 나주군 경계에 무서운 표정으로 우뚝 서 있는 '해태상'이 반가워 눈물이 핑 돌았다. 집에 도착한 것도 아니고 그저 광주에 들어왔을 뿐인데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였다. 그냥 시내로 들어가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송암공단 입구에 있는 야산(현재 인성고 정문 입구 근처)에 계엄군이 진을 치고 있어 더 이상 시내로 들어갈 수 없었다.

 

경운기에서 내렸다. 광주시내 버스 종점인 송암동 부근에서 3백여m 전방에 있는 야산을 쳐다보니 푸른 숲에 가려서인지 군인들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야산을 관통하는 도로에 몇 명의 군인들이 움직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종점 부근에 사는 주민은 계엄군이 외지인의 광주 진입만 저지한다면서 무차별적인 사격은 하지 않는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시내버스 종점 광장에는 벌써부터 전남 남부지역 곳곳에서 모여든 주민들로 가득했다. 광주 진입을 하지 못하고 기다리던 어떤 아저씨는 참다못해 바리케이드가 있는 곳까지 가서, 계엄군에게 시위와 무관한 사람임을 밝히고 통과시켜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묵살당하고 되돌아 왔다.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다시 광주로 들어가야 했다.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광주에는 친구들과 하숙집이 있었다. 며칠 만에 겨우 광주에 왔는데, 여기서 포기할 수 없었다. 고향집도 걸어가기엔 너무 먼 거리에 있었다.

 

종점 광장에서 서성대던 많은 사람들은 결국 거리는 멀지만 안전한 우회로를 택했다. 계엄군이 지키고 있는 곳의 맞은 편 야산 중턱을 타고 광주로 들어가는 우회로를 개척한 것이었다.

 

산 중턱에는 광주로 향하는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 잡목으로 울창한 숲은 반질반질하게 산길이 나버렸다. 나도 그 행렬의 일원이 되어 광주를 향해 걸었다.

 

계엄군이 지키고 있는 야산과 어느 정도 멀어졌을 때, 산에서 내려와 논을 가로질러 진월동 입구(현 광주대 뒤쪽 화순 도곡온천 가는 길)에 도착했다. 운동화는 흙으로 범벅이 됐다. 잠바도 가시나무에 걸려서 찢어졌다. 꼴이 말이 아니었다. 다행히도 계엄군이 큰 도로에만 바리케이드를 치고 지키고 있어 그런대로 어렵지 않게 광주시내로 들어 갈 수 있었다.

 

광주시 외곽인 진월동을 지나 백운동 로터리에 이르자, 시민들의 오가는 모습이 자주 목격됐다. 시위대원들의 차들도 지나다녔다. 오랜만에 시위대 차를 보니 반가웠다. 백운동 로터리에서 하숙집이 있는 농성동 방향으로 가고 있던 시위대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며칠 전 처음으로 시위대에 합류했었던 농성동 로터리에서 내렸다. 

덧붙이는 글 | 이 회상기를 쓴 임영상은 80년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이후 그는 <광주매일> 기자를 거쳐 행정자치부 장관 정책보좌관과 건설교통부 장관 정책보좌관을 역임했다. 


태그:#5.18, #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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