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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는 흥인지문

 옹성으로 둘러싸여 있는 흥인지문
 옹성으로 둘러싸여 있는 흥인지문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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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곽 답사는 12일 오전 9시 흥인지문(동대문)에서 출발하기로 되어 있다. 나는 아침에 일찍 서둘렀기 때문인지 오전 8시 30분 흥인지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시간 여유가 있어 흥인지문을 한 바퀴 돌면서 흥인지문의 특징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흥인지문은 2층의 누각으로 되어있다. 정면 5칸 측면이 2칸인 다포계열의 2층 건물로 우진각 지붕이다. 누각 아래에는 석축을 쌓았으며 가운데 홍예를 만들어 통로로 사용했다. 그리고 문 밖으로 옹성을 쌓아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적을 막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4대문 중 옹성이 있는 것은 흥인지문이 유일하다.

흥인지문은 서울 도성에 만들어진 네 개의 문 중 동쪽을 지키는 문이다. 태조 7년(1398) 처음 만들어졌으며, 현재의 것은 고종 6년(1869)에 중건되었다고 한다. 흥인(興仁)이란 어진 마음을 북돋운다는 뜻으로 유교사상의 첫 번째 덕목 인(仁)과 관계가 있다. 그런데 다른 4대문과는 달리 현판의 글자가 네 자이다. 도성의 동쪽 방면이 텅 비었기 때문에 현판에 '의'에 해당하는 지(之)자를 넣어 무게감을 주었다고 한다.

 흥인지문을 지키는 경비업체 순찰차
 흥인지문을 지키는 경비업체 순찰차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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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인지문은 숭례문이 불타고 난 다음 그 중요성이 더해지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순찰을 도는 경비업체의 차가 문 옆에 서 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지만 안 하는 것 보다는 낫다. 흥인지문은 주변이 길로 차단되어 있어 일반인들은 들어갈 수가 없다. 지난 번 숭례문 방화도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음으로 해서 생겨난 사건이라는 생각이 든다. 돌이켜 보면 정말 아쉬운 일이다.

이 흥인지문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은 서쪽 교통섬이다. 종로가 끝나는 지점에 흥인지문이 위치하고 종로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횡단보도 남쪽 지점에 교통섬이 만들어져 있다. 이곳에서는 동쪽을 향하고 있는 흥인지문 현판은 볼 수 없지만 석축과 홍예 그리고 2층 누각을 아주 가까이서 살펴볼 수 있다. 흥인지문은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조선 후기 누각의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어서 그런지 점잖고 기품이 있다.  

옛 사람들이 본 서울 성곽과 흥인지문

 서울 성곽의 변천을 가장 잘 보여주는 부분
 서울 성곽의 변천을 가장 잘 보여주는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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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2권에 수록된 <동국여지비고> 제1권 경도(京都) 편 성곽 조에 따르면, 서울 성곽은 태조 5년(1396)에 처음 쌓았고, 세종 4년(1422)에 고쳤으며, 숙종 30년(1704)에 훼손된 부분을 대대적으로 고쳐 쌓았다. 그러므로 성곽의 모습은 크게 3가지 유형으로 구분되어 나타난다. 태조 때에는 큰 메주만한 크기의 자연석을 다듬어 쌓았다. 세종 때에는 조금 더 큰 장방형의 돌을 기본으로 하면서 틈새에 작은 돌을 집어넣었다. 숙종 때에는 가로 세로 2자의 정방형 석재를 만들어 틈새 없이 튼튼하게 쌓았다. 시대가 흐르면서 돌의 크기가 커지고 규격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경성(京城): 우리 태조 5년에 돌로 쌓았는데 평양 감사(平壤監司) 조준(趙浚)이 공사를 감독하였다. 세종 4년에 고쳤는데, 주위가 1만 4천 9백 35보로 주척(周尺)으로 재어서 8만 9천 6백 10자요, 높이가 40자 2치이다. 문 8개를 세웠다. 정남쪽 문을 숭례문(崇禮門)이라 하는데, 겹처마요 양녕대군(讓寧大君)이 현판 글씨를 썼으며 민간에서 남대문이라 부른다. 정북쪽 문을 숙정문(肅靖門)이라 하는데, 위에 집 지은 것[架屋]이 없으며 닫아둔 채 다니지 않는다. 정동쪽 문을 흥인문(興人門)이라 하는데 겹처마요 밖을 곡성(曲城)으로 둘렀으며 민간에서 동대문이라 부른다. 정서쪽 문을 돈의문(敦義門)이라 하는데, 조일회(曺一會)가 현판 글씨를 썼으며 민간에서 신문(新門)이라 부른다. (<동국여지비고> 제1권 경도(京都) 편 성곽 조)

이 중 흥인지문은 강원도와 충청좌도 그리고 경상도로 가는 사람들이 드나들던 문이다. 소위 영남대로 옛길이 이곳 흥인지문을 지나 왕십리의 살곶이 다리를 건넌 다음 한강변의 광나루로 이어진다. 물론 흥인지문 밖에서 도성 안으로 들어갈 때는, 이곳 대문을 지나 종로를 통해 광화문에 이른 다음 경복궁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동대문에서 바라 본 종로의 모습
 동대문에서 바라 본 종로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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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대표적 지식인이었던 다산 정약용(1762-1836)이 이곳 흥인지문에 대한 글을 특히 많이 남기고 있다. <여유당전서. 제1집 제10권 옹성도설(甕城圖說) 편에 실린 글이다.

"흥인지문이 우리나라의 유일한 옹성이다. 옹성으로는 특이하게도 문이 없다. 적이 옹성 안으로 들이닥치면 사방에서 공격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문이 있는 게 좋겠다. (我國唯興仁之門 特有甕城 而但此無門 蓋賊入甕中 四面受攻 有門亦可)"

옹성은 대개 문이 좌우에 두 개이나 흥인지문의 옹성은 특이하게도 문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 흥인지문의 바깥 옹성을 보면 남쪽으로 트임이 있어 그곳에 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현재의 모습은 역사 속에서 변형된 것이기 때문에 원래의 모습이 어땠을지는 좀 더 연구해봐야 할 것 같다. 다산은 이처럼 흥인지문의 옹성에 주목하고 있다.

다산은 또한 아버지 정재원이 살고 있는 충주의 하담에 가기 위해 이곳 흥인지문을 자주 지나게 되었다. 그 중 대표적인 시가 '흥인문을 나서며'라는 오언율시이다. 도성 문을 벗어나면서 느끼는 한 인간의 자유로운 심경을 노래했다. 때는 지금처럼 한창 봄이 가득한 음력 4월이다.

 음력 4월 동대문의 모습
 음력 4월 동대문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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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 칠일 이른 아침에 흥인문을 나서며 짓다. 四月七日早出興仁門作]

언제나 도성문만 나서면 좋아                       每出都門喜
하늘과 땅이 훨씬 넓은 것만 같네.                 乾坤似許寬
아침놀이 먼 곳에 물 밝게 비추고                  朝霞明遠水
봄은 산들을 예쁘게 만드는구나.                   春日媚晴巒
매여 있을 자 또 누구더냐!                           羈紲將誰待
편안하게 마음껏 놀고 씻어야겠네.                優游浴自安
수풀 언덕이 깊고도 구석지니                       林丘更幽僻
의관을 차릴 필요 전혀 없겠네.                     不必有衣冠 

낙산까지 이어지는 오르막길

 낙산으로 이어지는 서울 성곽
 낙산으로 이어지는 서울 성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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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시가 조금 넘어 답사회원들이 다 모였다. 오늘의 리더인 이광국 선생이 간단하게 서울 성곽에 대해 설명을 한다. 그리고 오늘의 답사 일정과 답사를 하면서 주의해야 할 사항을 이야기한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난 셈이다. 9명으로 이루어진 서울 성곽 답사팀이 이화동 이대병원 오른쪽 담장을 따라 낙산공원 쪽으로 향한다. 이 길은 성곽을 따라 오른쪽으로 이어진다.

성곽 초입에서 보니 성곽을 축조하는데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보인다. "일패장 절충 성세각, 이패장 절충 김수온 삼패장 사과…(一牌將 折衝 成世珏, 二牌將 折衝 金守善 三牌將 司果)" 등이 그것이다. 여기서 패장이란 관청이나 일터에서 일꾼을 거느리는 사람이다. 돌의 모양이 장방형인 것으로 보아 세종 때 성곽 축조 작업에 참여한 관리들의 이름으로 보인다. 그 중 김수선은 <조선왕조실록>에서 이름이 확인되는데 성환도 역승(成歡道 驛丞)을 지낸 것으로 나와 있다.

 이름이 새겨진 돌: 성곽을 축조한 관리들의 이름이 보인다.
 이름이 새겨진 돌: 성곽을 축조한 관리들의 이름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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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각자(刻字)가 있는 돌 위로는 최근에 복원한 잘 다듬어진 돌들이 보인다. 전체적으로는 가장 아래에 정사각형의 큰 돌(숙종 때)을 쌓고 그 위에 장방형의 돌(세종 때)을 쌓은 다음 그 위에 다시 최근의 석재를 사용 조선시대 성곽을 복원한 것이다. 이처럼 성곽은 낙산 정상까지 완전한 모습으로 복원되어 있다. 우리는 처음에 성곽 바깥을 따라 걷다가 중간 지점쯤에서 안쪽을 보기 위해 암문(暗門)으로 들어간다.

 낙산 가는 길에 바라 본 북악산과 인왕산
 낙산 가는 길에 바라 본 북악산과 인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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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 안쪽을 따라 가면서 왼쪽을 보니 이화동의 주택들이 보이고 동숭동 쪽으로는 대학로 길이 남북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우리가 온 길을 돌아보니 흥인지문은 온데간데없고 주변의 고층빌딩만이 눈에 들어온다. 9시 35분 우리 일행은 첫 번째 고지인 낙산에 이른다. 낙산은 태조 이성계가 서울에 도읍을 정할 때부터 문제가 되었던 산이다. 그 높이가 너무 낮아 좌청룡으로는 약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좌청룡은 자식으로 말하면 큰 아들인데 이게 약해 조선 500년 동안 큰 아들이 제대로 왕위를 계승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낙산에서의 전망이 이렇게 좋을 줄이야

 낙산에서 바라 본 남산
 낙산에서 바라 본 남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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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낙산은 산이 낮기도 하지만 정상 부위가 평탄하게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어 산 같은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래도 산이어서 주변의 전망이 아주 좋은 편이다. 쉽게 말해 앞으로 갈 세 개의 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남쪽으로 눈을 돌리니 저 멀리 남산타워를 머리에 인 남산이 누에처럼 오른쪽으로 기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 앞으로는 서울의 현대사를 대변하는 고층건물들이 즐비하게 서 있다. 날씨가 맑아서 조망이 더욱 좋고 건물들도 깨끗해 보인다.

 낙산에서 바라 본 북한산 줄기
 낙산에서 바라 본 북한산 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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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북쪽으로 돌리니 성북동 너머로 북한산 줄기가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다. 북한산 남쪽 보현봉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끝자락에 백운대와 인수봉이 우뚝하다. 북한산의 원래 이름이 삼각산인데 이것은 북쪽에서 볼 때 백운대와 인수봉 그리고 만경대가 세 개의 뿔처럼 솟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 낙산에서는 만경대와 백운대가 겹쳐서 보인다.

다시 눈을 서쪽으로 돌리니 하얀 바위로 된 인왕산이 보인다. 이곳 낙산에서 거리상으로는 인왕산이 가장 멀다. 낙산과 인왕산 사이가 전부 종로구 지역으로 도심의 모습이 보여야 하는데 녹음이 무성한 나무들이 앞을 가려 도심은 보이지 않고 인왕산의 모습만 보인다. 인왕산은 바위로 이루어진 골산이지만 봉우리가 둥그렇게 생겨 무게가 있으면서도 강하지 않다.

 이화동과 창신동을 나누는 성곽
 이화동과 창신동을 나누는 성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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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낙산 바로 아래는 동숭동으로 한때 서울대학교가 있던 학문의 공간이었으나 지금은 극장과 미술관 아트센터 등이 들어선 예술 공간으로 바뀌었다. 높지 않은 개성적인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어 삭막하지 않고 친근하다. 이에 비해 동쪽의 창신동과 삼선동은 60~70년대 주택들이 그대로 있어 서울의 옛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지역도 뉴타운이라는 이름으로 재개발에 들어갈 모양이다. 앞으로 10년쯤 지나면 창신동과 삼선동도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현재를 사는 사람들의 삶의 질이 먼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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