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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게 오래된 교단의 기억들을 얘기한 적이 있다. 20년 전 '열등반 담임의 추억' 말이다. 그러면서 그 녀석들의 이야기를 글로 쓰겠다고 했더니 아이들은 자신들의 얘기도 글로 써 달라고 주문했다. 이 글은 아이들의 주문에 대한 답인 셈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라는 쑥스러움을 무릅쓰는 까닭도 순전히 거기 있으니 독자들께서도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면 좋겠다.

올 우리 반 아이들이 만들어 준 롤링 페이퍼
▲ 선물 올 우리 반 아이들이 만들어 준 롤링 페이퍼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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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아이들은 교사들을 이성으로 인식할 수 있다. 그래서 젊은 총각 교사와 처녀 선생님들에게 아이들 마음이 끌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반대로 교사들은 의식적으로 아이들을 이성으로 인식하지 않으려 하기 마련이다. 그것은 교육적 필요 때문이면서 한편으로 인간적 자기 통제이다.

그러나 교사들은 그러한 의식적 노력이 더 이상 소용에 닿지 않는 어떤 순간을 필연적으로 맞닥뜨리게 된다. 그때쯤이면 당연히 아이들의 눈길이나 태도도 데면데면해지게 된다. 그것은 아이들에게 어떨지 모르나 교사들에겐 스스로 '나이'를 확인하는 다소 비감한 시간일 수 있겠다. 그때, 나는 어땠는지는 구체적으로 생각나지 않는다.

아마 40대 후반 무렵이었던 것 같은데, 비감하지는 않았다. 무덤덤하게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마음에 어떤 파문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런 자신에 대해 놀랐던 듯하다. 그것은 아이들을 바라보는 더러는 예민하고 더러는 호오(好惡)가 분명했던 꽤 '까칠한 시선'으로부터 졸업이었다.

교사도 사람인 이상, 아이들에게 가는 마음의 크기나 거리가 모든 이에게 같을 수는 없다. 어떤 아이는 더 마음에 들고 어떤 애는 덜 들기도 하고 어떤 애는 예뻐 보이는데 또 어떤 아이는 밉상으로 느껴질 수 있다. 그런 마음자리를 씻은 듯 벗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런 일상적 감정의 결로부터 스스로 자유롭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내게는 그때가 그런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30대 끝 무렵 복직을 하면서는 아이들의 '성적'을 뛰어넘어 버렸다. 공부를 잘하고 똑똑한 녀석들과 공부 못하는 못난이 녀석들의 경계가 어느 날 사라져 버렸다는 걸 확인하면서 나는 교사로서 처음으로 나를 매우 '대견하게' 느꼈었다.

40대 후반의 교사가 되어 만난 아이들

그러한 마음으로 나는 전임 학교에서 보낸 2년에 이어 현재 근무하는 학교에서 이태째 담임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중3에 비기면 고2는 단순히 2년이라는 물리적 시간으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다 자란' 아이들이다. 특히 선발고사로 입학한 우리 아이들은 일정 학력을 갖추고 있어 말하자면 '꾀가 말짱한' 녀석들이다. 당연히 말썽을 부려 담임의 속을 썩이는 일 따위는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제주도 수학여행 성산포에서 찍은 사진
▲ 올 우리 반 아이들 제주도 수학여행 성산포에서 찍은 사진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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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이 되어서 그런지 작년에 이어 올해도 2학년 5반을 맡았다. 다른 게 있다면 작년 아이들이 자연계(이과)였다면 올 아이들은 인문계(문과)라는 것뿐. 숫자도 작년이 24명인데 이어 올해는 스물여섯 명. 그 중 하나는 테니스 선수여서 시험 때가 아니면 볼 일이 없으니 실제로는 지난해보다 아이 하나가 더 많은 셈이다.

아이들을 만난 지 두 달이 지났다. 아이들은 아침에 등교하면 하루 종일, 밤 열 시까지 책에다 얼굴을 묻고 있어야 하고, 나는 주당 정규 수업 세 시간과 보충 수업 한두 시간에 아이들을 만난다. 매주 한 번꼴로 야간 자율학습 감독 날에도 아이들과 함께 학교에 남는다.

3월 중순께 수학여행을 다녀왔고 1차 지필시험(중간고사)도 치렀다. 일 년으로 치자면 1/4이 지나간 셈이다. 아이들과 불과 삼사 분쯤 만나는 면담을 겨우 한 차례 했을 뿐이지만 이제 아이들을 얼추 알게 된 듯하다. 저희들이나 나나 서로 표정을 보면서 뭐가 아쉽고 모자라는지 대충 짚이는 사이가 된 거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15일(스승의 날)에는 아이들이 '날'을 챙겨주었다. 스무 해 이상의 시간이 흘렀건만 이 날을 보내는 마음은 예와 다르지 않다. 아침에 아이들이 주문하는 시간에 맞추어 교실에 가니 불을 끄고 교탁에 올린 케이크에 촛불이 켜져 있었다.

한바탕 스승의 노래가 흐르는 동안 나는 바보처럼 미소를 깨물고 아이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때는 이런 순간의 민망이 견디기 힘들었지만, 이제는 좀 무덤덤해졌다는 게 그나마 발전이라면 발전이다. 책상 위에는 작은 꽃바구니 하나, 제각기 사연을 적은 종이(이걸 아이들은 롤링 페이퍼라고 한다) 한 장, 종이 가방 하나가 놓여 있다.

"펴 보세요!" 아이들 성화에 가방을 여니 속옷 한 벌이다. "입어 보세요!" 아이들이 다시 성화다. "오늘 집에 가서 입고 사진을 찍어서 보여주마" 하면서 우리는 함께 웃었다. 지난해와 판박이 풍경이다. 나는 여전히 부끄럽고 민망한 날인데, 이렇게 챙겨주니 고맙다고 말했다. 어젯밤, 자정을 넘기자 쏟아져 들어와 잠을 설치게 한 문자 메시지 축하 인사에 대해서도 치하했다.

우리반 아이들이 챙겨준 스승의 날 케이크

잠깐 그런 이야기를 했다. 담임이긴 하지만 마땅히 한 일이 없었다는 것. 늘 그렇듯 나는 지켜보고 있다는 것, 우리가 함께한 시간, 말하지 않아도 담임 마음을 헤아려 주는 아이들의 재치와 배려에 대해서. 글쎄, 언제든 요구하면 기꺼이 도움이 되리라고……. 옛 제자들에 대한 이야기도 나눈 듯하다. 9년 전쯤에 헤어진 졸업반 아이들과 10년 후에 만나자는 약속을 한 듯한데, 그게 기억이 애매하다는 얘기도 했다. 새삼스레 내 앞에서 책을 폈던 아이들을 잠깐 떠올린 시간이었다.

우리 반 아이들을 포함해, 올해 아이들은 모두 자신들의 감정 표현에 매우 솔직한 듯하다. 짧은 시간인데도 스스럼없이 담임에게 곁을 준다. 물론 훨씬 더 부드러워진 내 태도가 한몫을 했으리라. 나는 격의 없이 아이들에게 장점을 들며 칭찬했고, 늘 웃으려 애썼다. 어차피 한둘을 빼면 자기네 부모보다 내가 나이가 많으니 아이들을 딸이라고 부르는 건 무리가 아니기도 하고.

아이들마다 차이가 있긴 하지만, 얘들은 때로 내게 자연스레 안겨오고 나는 그들의 어깨를 토닥여준다. 그런 순간의 분위기는 참 따뜻하고 우리가 나누는 유대의 감정을 더 분명하게 느끼게 된다. 아직 어리지만, 세상과 가족, 주변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따뜻한 시선과 태도가 나를 감동시키기도 한다.  

그날, 나는 '야자' 감독이었다. 10시, 종이 울리기 전에 나는 다시 한 번 아이들에게 고마웠다고 말했고 아이들은 환하게 웃었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선의가 교사에게 제대로 전해진 것을 기꺼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은 따뜻하고 정겹게 인사했다. "안녕히 가세요…."

같은 날, 점심시간이었다.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4·15 공교육 파탄정책 철회'를 촉구하기 위해 점심을 거르기로 하고 책상에 앉아 있는데, 이웃 반 아이가 와서 반에 잠깐 오시란다고 전해 주었다.

무슨 일인가 하고 가는데 교실엔 불이 꺼져 있고 뒷문 너머로 얼핏 보니 교탁에 불 켠 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아니, 아침에 했는데, 또 뭐야?

작년 우리반 아이들이 챙겨준 두 번째 스승의 날 케이크

작년도 우리 반 아이들이 전해 준 롤링페이퍼를 사진으로 찍어 잘라 붙였다.
▲ 선물 작년도 우리 반 아이들이 전해 준 롤링페이퍼를 사진으로 찍어 잘라 붙였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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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고 들어서자, 아이들이 악을 쓰듯 노래를 합창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이들이 다르다.

아, 나는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책상에 앉은 아이들은 바로 지난해 우리 반 아이들이었다. 3학년 각반으로 흩어졌던 아이들, 스물네 명이 고스란히 옛 자리에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얼떨떨한 상태로 노래를 들으면서 나는 조금 겸연쩍었다. 아이들이 지난해 담임을 챙겨줄 만큼 아이들을 거두었던 기억이 없었던 탓이다.

학년말에 한 아이가 지적한 것처럼 나는 멀찌감치 지켜보기만 했던 '방임형' 담임이었다. 마음으로 아이들을 바라보았지만, 무엇 하나 아이들 마음에 남을 만한 지도를 한 기억도 없는 것이다.

아이들은 무슨 열에 들뜬 것처럼 노래를 부른 뒤, 폭죽을 터뜨렸고, 나는 마치 지난해 종례를 하는 것처럼 아이들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대체 무엇을 말하겠는가.

거듭 고맙다고, 놀랐다고 이렇게 찾아와 줄 줄은 정말 몰랐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지난해 나는 담임으로서 얼쩡거리기만 했을 뿐 아무것도 한 게 없다고, 내가 아니라 저들이 자율적으로 학급을 꾸려갔었다고 한 해 전을 추억했다.

아이들의 기쁘고 만족스러워 상기된 얼굴은 아름다웠다. 그들은 자신들이 마음으로 베푸는 사랑을 마음으로 받아들여 준 옛 담임교사 앞에서 느꺼워하는 듯했다. 아이들의 얼굴에 떠오른 자랑스러움, 그것은 베푸는 일의 기쁨을 터득한 이의 표정이었을까. 나는 아이들의 자랑스러운 얼굴 앞에 부끄러워하는 대신 그들을 제자로 가르쳤던 추억 앞에서 자랑스러워하기로 했다.

케이크 옆에 예쁜 리본으로 묶은 4절 색켄트지는 롤링 페이퍼였다. 올 아이들이 16절지 앞뒤에 쓴 것에 비하면 한층 진화된 형식이었다. 아이들은 4절지를 24등분한 칸을 그린 다음, 하루 전에 각반으로 돌려서 번호 순으로 거기다 자신들의 목소리를 담았던 것이다.

나는 싱글벙글하며 아이들과의 지난해를 잠깐 회고했는데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다. "아, 꼭 작년 2학년으로 돌아온 거 같아."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사진 찍어요, 선생님. 복도에 있던 아이 하나를 불러 우리는 사진을 찍고 헤어졌다. 케이크는 나누어 먹자는 내 제의에 대해 교무실에 가져다 드릴 테니 선생님들하고 드시라 할 만큼 이 아이들은 어른스럽다.

내가 제주도에 가 있을 때 인근 유원지로 소풍 간 우리 반 아이들이 따로 모여서 찍은 사진. 지난 4월에 아이들은 이사진을 내게 전해 주었다.
▲ 지난 해 우리 반 아이들 내가 제주도에 가 있을 때 인근 유원지로 소풍 간 우리 반 아이들이 따로 모여서 찍은 사진. 지난 4월에 아이들은 이사진을 내게 전해 주었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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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아이들이 자기표현에 솔직하고 스스럼없이 마음을 열어주는 데 반해 지난해 아이들은 좀 다르다. 개인차가 있긴 하지만 그 아이들은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은근한 아이들이다. 그러면서도 사내아이들이 말하는 의리랄까, 이런 인간적 유대를 매우 소중하게 생각한다. 또 개인보다는 전체의 이해를 우선하려는 태도도 잊지 않는다.

나를 기억한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만큼 교사들은 아이들로부터 배운다"는 명제는 진실이다. 대학을 갓 나와 거짓 권위에 집착하던 초임교사 시절이나 이제 무덤덤히 여자아이들을 딸자식처럼 바라보게 되는 지금이나 나는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만큼 배우고 있다. 아이들이 은연중에 보여주는 상냥하고 예의바른 태도, 어른의 마음을 헤아리려 하는 너그러운 마음씨. 그러나 여전히 잃지 않는 순수와 천진함. 그것은 그들의 아름다움과 젊음을 이루는 자산이며 지혜다.

"꽃들아, 너희 맘대로 피어라."

오래 전 방영되었던 어느 드라마에 나왔던 초등학교의 급훈이다. 나는 예의 장면에서 전율했다. 그것은 물론, 교사가 '저마다 가진 결대로 피어나는 아름다운 꽃'인 아이들의 '통제자'가 아니라 '조력자'여야 한다는 의미였다. 나는 멀찌감치 아이들을 지켜보면서 그걸 실천했다고 강변하고 싶어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최선을 다하지 않은 자신의 잘못을 얼버무리는 자기변명 같은 것은 아닐까.

"이랑 많이 일굴수록 쟁깃날은 빛나고, 유수봉하해(流水逢河海), 흐르는 물을 바다를 만난다. 땀 흘려 일구어 빛나는 쟁깃날이 되고, 쉼 없이 흘러 큰 바다를 만나라."

학년말, 아이들과 헤어질 때마다 내가 아이들에게 일러주는 쇠귀 선생의 글귀다. 아이들이 그 글귀의 의미를 어떻게 새기든 그들은 훗날 저마다 아름답고 눈부신 꽃으로 피어나리라. 그리하여 그들이 오월의 어느 날, 자신들 성년의 길목을 스쳐갔던 한 교사를, 그 시절의 추억과 아름다움으로 오롯이 떠올릴 수 있다면 나는 더 이상 바랄 게 없겠다.


태그:#스승의 날, #교사,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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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이 넘어 입문한 <오마이뉴스> 뉴스 게릴라로 16년, 그 자취로 이미 절판된 단행본 <부역자들, 친일문인의 민낯>(인문서원)이 남았다. 몸과 마음의 부조화로 이어지는 노화의 길목에서 젖어 오는 투명한 슬픔으로 자신의 남루한 생애, 그 심연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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