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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광주민중항쟁 28주년이 되는 해다. <오마이뉴스>는 1980년 5·18 당시 고교생의 신분으로 항쟁에 참여했던 한 '고교생 시민군'의 회상기를 연재한다. 세월이 흘러 '고교생 시민군'들은 성인이 되었지만 그들의 활동에 대한 기록과 평가는 아직 미흡한 상태다. <오마이뉴스>는 이 연재가 '고교생 시민군'의 활동 내용을 통해 5·18을 성찰하는 귀중한 기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편집자말]
 계엄군에 의해 체포되는 고교생 시민군.
 계엄군에 의해 체포되는 고교생 시민군.
ⓒ 5.18기념재단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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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해제

5월 23일. 어제의 여독을 말끔히 씻고 상쾌한 아침을 맞았다. 우리 시위대원들도 피로한 기색은 보이지 않고 광주로 가기 위해 아침부터 부산을 떨었다. 아침식사를 끝낼 즈음, 이형래 회장과 김종옥 상임부회장 등 목포 JC 회원 네댓 명이 여관에 왔다.

이 회장은 우리들이 광주까지 무사히 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 그 방법은 시위대원들이 가지고 있는 총을 모두 반납하고, 그 대신 목포시 입구 지산마을에 있는 군부대를 지날 때까지 안전하게 안내해준다는 것이었다. 진지하게 듣고 있던 시위대원들은 이곳저곳에서 한마디씩 했다.

"전쟁 상황이나 다름없는데 총도 없이 어떻게 군부대 앞을 지나간다는 말이오."
"우리의 총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한 호신용이오. 절대로 총을 반납할 수 없습니다."

이 회장은 다른 방법을 제시했다. 아울러 충고도 곁들였다.

"여러분은 우리에게 협조해야만 무사합니다. 지금 목포시내의 총기류는 우리가 모두 회수했습니다. 여러분만 아직 반납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 회장은 말을 이었다.

"그럼 이 방법은 어떻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총을 반납하고 무사히 갈 수 있도록 저희들과 목포시장이 함께 군부대 앞을 지나갈 때까지 동행하는 것입니다. 이 방법 외에 다른 것들과는 협상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들의 안전도 보장하지 못합니다."

이 회장은 반 협박 반 사정조로 말했다. 대원들은 언쟁을 끝내고 이 회장의 진실한 표정에 거짓이 없음을 확신했다. 그리고 목포시장을 대동하고 군부대 앞을 지나가기로 한 그의 제의를 수락했다. 이 회장은 곧 목포시장을 모시고 온다면서 일행들과 함께 사라졌다.

우리는 여관주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골목에 세워둔 버스에 올라탔다. 정말로 총을 반납하면 군부대에서 그냥 지나가도록 할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으나 일단 목포 JC 지도부를 믿기로 했다.

시위대 차에 탑승한 지 30분쯤 지났을 때 이형래 목포JC 회장 일행이 나타났다. 이병내 목포시장도 함께 왔다. 이 회장이 소개하자 목포시장이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여러분, 목포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이병내 목포시장입니다. 잘 쉬셨습니까? 목포JC 회장의 부탁을 받고 이렇게 달려왔습니다.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지금부터 제가 당부드린대로만 행동하시면 무사히 광주까지 가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어차피 총을 반납하지 않으신 만큼 절대로 총을 함부로 다뤄서는 안 됩니다. 괜히 군인들로부터 오해를 받아 불상사가 일어나면 여러분뿐만 아니라 저도 목숨이 위태로울 수가 있습니다. 거듭 당부말씀 드립니다. 절대로 총은 함부로 다루지 마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이 시장은 우리들의 행동이 염려스러웠던지 허튼 행동을 삼갈 것을 몇 번이고 당부했다. 시위대원들은 걱정하지 말라며 시장에게 화답했다. 곧이어 우리 차를 선두로 시위대 차들이 조심스럽게 출발했다. 시장 일행도 우리 차에 동승했다. 목포시장이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은 안정됐다.

시위대 차들이 시내를 빠져나와 무안 방향으로 20여분쯤 달려 목포시 외곽에 있는 군부대 부근 고갯길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시위대원들을 태운 버스는 도로 중앙에 세워진 바리케이드 때문에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멈추었다. 차가 멈추자 도로 옆 야산과 논둑에 숨어있던 군인들이 '앞에 총' 자세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2개 소대병력은 넘게 보였다. 시위대원 중 일부는 긴장해 목포시장을 불만스럽게 노려본 뒤 군인들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군인들과 우리들을 번갈아보던 목포시장은 당황하여 말문을 열었다.

"여러분 진정하십시오. 아까 제가 약속했던 것처럼 분명히 총만 반납하면 무사히 통과할 수 있습니다. 어설픈 행동으로 군인들에게 오해가 없도록 하십시오."

우리는 시장의 말에 조금은 안심이 됐지만, 경계심은 늦추지 않았다. 도로변에 세워진 시위대 차 주위로 군인들이 빙 둘러섰다. 시장이 차에서 내렸다. 시장은 중위 계급장을 단 장교와 잠깐 얘기를 나눈 뒤 다시 차에 탑승했다. 장교도 함께 올라왔다.

날카롭게 거수경례를 한 장교는 자신의 신분을 밝힌 뒤, 불법 총기 소지와 위험성 등을 말하면서 가지고 있던 총을 좌석 중앙통로에 놔두고 하차하라고 말했다. 이어 군부대로 가서 간단한 조사만 하고 보낸다며 군부대로 갈 것을 요구했다.

시위대원들은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내리지 않고 있었다. 그러자 장교와 이병내 목포시장은 안전 귀가를 약속했다. 우리들은 시장과 군장교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없어 시장에게 군부대까지 동행해줄 것을 요구했다. 시장은 흔쾌히 승낙했다. 우리는 어느 정도 마음이 놓여 차에서 내렸다. 일부 군인들은 차에 올라가서 시위대원들이 가지고 있던 칼빈 소총과 M1 소총을 들고 내려왔다.

도로에 모아놓은 총은 20여정쯤 되었다. 각 차별로 6정 정도는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우리는 5백여m 거리에 있는 군부대까지 걸어갔다. 무장한 군인들이 10여m 간격으로 대열을 이뤄 우리를 감시했다. 시위대원들의 행렬은 전쟁영화에 나오는 포로들의 모습, 그대로였다.

 무장해제되어 계엄군에 의해 조사를 받았던 부대 모습이 멀리 보인다.
 무장해제되어 계엄군에 의해 조사를 받았던 부대 모습이 멀리 보인다.
ⓒ 임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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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대 억류

위병소를 지나 연병장에 들어섰다. 군부대 안에 들어가기는 처음이었다. 호기심과 긴장 속에 여기저기를 둘러봤다. 그리 크지 않는 연병장 모퉁이에는 대형 천막 3개가 세워져 있었다. 시장 일행은 한마디 말도 없이 지휘부 막사로 가버렸다.

순간, 시장 일행이 없다는 생각에 겁이 버럭 났다. 아니나 다를까 우려가 현실로 다가왔다. 목포시장의 말을 믿었던 우리가 잘못이었다. 목포시장이 원망스러웠다. 군인들의 행동이 조금씩 달라졌다. 인원파악을 한다며 줄을 서라고 했다. 군인들은 동작이 느린 시위대원들의 행동을 보고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심한 욕설을 퍼부으면서 인상이 험하게 변했다.

"이 새끼들아, 줄 하나도 제대로 못 맞추나. 너희들은 폭도야 폭도! 광주도 부족해서 목포까지 혼란을 야기하려고 떼거리로 내려와! 더구나 총까지 가지고 말이야. 너희들 중에 고정간첩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정밀하게 조사를 한 뒤에 석방여부를 결정하겠다. 조사할 때 허튼수작 부린 자는 그 만큼의 대가를 지불하겠다. 알겠나!"

조금 전 그들의 언행과는 천지차이를 보이는데 대해 분노와 울분이 치밀었다. 한편으론 겁에 질려 조그만 목소리로 "예"라고 대답했다.

"목소리 봐라. 폭도 주제에 목소리가 고작 그 정도야. 알겠나!"
"예-"

이미 주눅이 든, 붙잡힌 시위대원들은 하늘이 무너질 듯이 크게 대답했다. 군인은 목소리에 만족했는지 예상했던 기합은 주지 않고 두 개의 천막으로 대원들을 분산 수용시켰다. 우리는 두 개 조로 나뉘어졌다. 친구 준수와도 헤어졌다. 대형 천막은 며칠 전에 설치된 듯 천막 지주핀 주변의 흙이 굳어있었다.

우리들은 군인의 지시대로 판자로 된 침상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잠시 후 장교가 행정병을 데리고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우리를 편하게 앉도록 했다. 그리고 흰색 16절지(지금의 A4 용지 크기)를 나눠주고 자신의 신상명세서를 작성케 했다. 장교가 작성요령을 설명했다. 신상명세서의 허위기재가 확인되면 조사 후에도 내보내지 않고 상급 군 수사기관에 이첩한다는 경고도 덧붙였다. 대원들은 군인들이 나눠 준 몇 자루의 필기도구로 작성요령에 따라 기록하기 시작했다.

나는 필기도구가 없어서 잠시 생각할 여유가 생겼다. 과연 군인들이 우리가 작성한 신상명세의 사실여부를 확인할까? 행정이 마비상태인 지금, 확인할 수 있을까? 이 기록이 그대로 존치되어 광주항쟁이 끝나면 무슨 후환은 없을까? 그렇다. 아까 말하기를 오후에 석방시켜 준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런 저런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갔다.

결국 나는 신상명세서를 허위로 작성키로 결정했다. 옆 사람이 건네준 볼펜으로 흰색 종이에 신상명세를 써 내려갔다. 작성순서는 본적과 현주소, 성명 나이 주민등록번호 직업 가족관계 등이었다. 나는 직업과 나이만 사실대로 기록했다. 고등학생이란 신분과 열아홉 살이라는 나이가 나중에 문제가 될 때 참작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본적은 면과 리만 다르게 하고 현주소는 동과 번지만 바꾸었다. 이름은 성을 바꿔 창씨개명했다.

이런 식으로 작성한 내용은 신상명세를 적은 종이 제출과 동시에 마음속으로 수십 번 외웠다. 외우다가 헷갈린 것은 손바닥에 적어 놨다.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재조사에 대비한 조치였다.

신상명세서를 작성하고 한참을 기다리고 있었다. 식사집합을 외치는 군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점심식사 시간이었다. 우리들은 3열종대로 줄을 서서 부대 내 사병식당으로 갔다.
엄격한 통제가 없어 식당에서는 편안한 기분이었다. 군대의 밥, 속칭 '짬밥'을 처음 먹었다. 쌀과 보리가 섞인 밥, 기름에 튀긴 두부가 들어간 된장국, 무말랭이 등 별 볼일 없는 식단이었지만, 긴장하고 배가 고파서인지 맛있게 먹었다.

우리들은 식사가 끝나자 식기를 씻어 반납하고 다시 천막 안으로 들어가 앉아 있었다. 대원들 간에 자유로이 잡담을 나누고 있는데 군인들이 들어왔다. 그들 중에는 사병은 물론 중위와 중사계급도 보였다. 오전에 작성한 신상명세서도 가지고 왔다. 다시 우리는 긴장했고, 군인들의 언행은 거칠어졌다.

"김○○, 이○○!"
"예"
"예"
"통로로 내려온다. 실시!"

두 사람은 군장교의 찌푸린 인상에 주눅이 든 듯이 잽싸게 통로에 뛰어내려 부동자세로 섰다. 아니, 벌써 기록을 확인해 허위작성한 대원들을 색출하는 것일까? 아연 긴장해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군 장교는 말을 계속했다.

"이 자식들, 너희들은 군인 신분에 시위에 가담을 해! 너희들은 특별히 군법에 회부하겠다."

이때 김○○이 말했다.

"아닙니다. 그냥 일반버스인줄 알고 탔다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시위에는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부르르 떨고 있던 이○○도 뒤이어 말했다.

"저도 그렇습니다. 제 집 방향과 같아 무심코 차에 탔습니다."

군인들은 이들의 말이 끝나자마자 군화발로 두 대원을 걷어찼다. 이들이 쓰러졌다 겨우 일어나면 무차별로 구타를 했다. 두 대원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보고 있던 우리는 더욱 마음을 졸였다. 군인들은 한참동안 두 대원을 짓밟은 후에 더 자세히 조사해야 한다면서 데리고 나갔다.

겁먹은 표정으로 앉아있던 우리들에게 다른 군인이 말했다. 방금 데리고 간 두 사람은 광주교대 RNTC(하사관후보생) 교육을 받고 있는 학생과 방위병이라고 했다. 그들이 측은하기도 하고 앞날이 걱정되었다. 끌려갔으니 군법에 회부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바보같이 신상명세서를 사실대로 적다니.

(당시 2년제였던 광주교대는 4년제 대학의 ROTC제도(학군사관후보생)와 달리, 소정의 하사관 교육을 마치고 군복무 대신 예비역 하사로 임용될 뿐 아니라 의무적으로 교사를 해야 하는 RNTC제도가 설치되어 있었다.)

 시민군은 트럭을 타고 광주 이외 지역을 돌며 항쟁의 진실을 알리려 애썼다.(자료 사진은 80년 당시 시민군을 촬영한 화면을 내보내고 있는 KBS 화면을 촬영한 것임)
 시민군은 트럭을 타고 광주 이외 지역을 돌며 항쟁의 진실을 알리려 애썼다.(자료 사진은 80년 당시 시민군을 촬영한 화면을 내보내고 있는 KBS 화면을 촬영한 것임)
ⓒ 임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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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 또 조사

군인들은 대원들을 한 명 한 명 호명하여 신상명세서의 내용을 확인했다. 한 사람씩 확인할 때마다 내 심장도 비례하여 뛰었다. 신상명세서를 작성할 때 혹시나 하고 손바닥에 적었던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한○○"
"예"

"본적과 현주소"
"본적은 전남 강진군 ○○면 ○○리 ○○○번지입니다. 현주소는 전남 광주시(당시는 광주시와 전남도가 분리되지 않았음) 서구 농성동 ○○번지 ○통○반입니다."

"나이"
"열아홉 살입니다."

"직업"
"현재 광주 서석고등학교 3학년입니다."

한○○은 신상명세서에 기록한 나의 가명이었다. 초긴장 상태에서 이런 식으로 내 차례를 무사히 넘겼다. 처음 "한○○"이라고 호명할 때, 내가 아닌줄 알고 깜박 잊을 뻔하기도 했다. 군인들이 사실 확인을 하지 않았음을 알고 속으로 고소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있던 천막에서는 다섯 명의 대원들이 사실여부 확인과정에서 허위임이 들통 났다. 이들은 침상통로에서 심한 기합과 구타를 당했다. 우리들은 신원확인과정을 마치고 천막 내 침상에 앉아 대기하면서 '이제는 군부대 밖으로 나갈 수 있겠지'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잠시 후 연병장으로 집합하라는 전달이 왔다. 우리 시위대원들은 제법 빠른 행동으로 집합했다. 그럼에도 군인들은 동작이 뜨다면서 저만치 보이는 축구골대와 연병장 끝에 있는 버드나무를 가리키며 '선착순'을 시켰다. 선착순인 관계로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해 맨 먼저 도착했다. 그러나 먼저 도착한 보상도 없이 유격체조(P․T 체조)를 시켰다.

군인들은 한 시간쯤 기합을 주고난 후 질서정연하게 열을 지어 연병장 귀퉁이에 앉게 했다. 그리고 군인들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잠시 후, 요란한 굉음과 함께 군용 헬기 한 대가 연병장 상공을 선회했다. 우리는 군인들의 지시대로 땅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곧이어 헬기가 그리 넓지 않는 연병장 중앙에 흙먼지를 심하게 일으키며 착륙했다. 우리들은 헬기와 50m 가량 떨어져 있었는데도 불구, 온통 흙먼지로 범벅이 됐다. 헬기 엔진소리가 멈추고 뿌옇던 먼지가 가라앉자 일단의 군인들이 내렸다.

우리가 억류되어 있는 이 부대의 간부급 군인들은 모두 헬기 쪽에 도열하여 그들을 맞이했다. 그들은 우리 쪽으로 와서 무슨 내용인지 모르지만,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얼핏 군인들 가운데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무엇인가를 지시하는 군인을 쳐다봤다. 군복 명찰에 '정 웅'이라고 쓰여 있었다. 계급은 별 두 개인 소장(당시 향토사단인 31사단의 사단장이었던 정웅 소장은 나중에 예편, 13대 총선 때 광주 북구에서 당선돼 평민당 소속 국회의원을 지냈다).

정웅 소장은 10여분 머물다 역시 착륙 때처럼 흙먼지 바람을 일으키고 부대를 떠났다. 우리들은 수북이 쌓인 흙먼지를 털어내고 천막으로 들어갔다. 정 소장이 다녀간 후부터는 통제가 심하지 않았다. 우리들은 천막 주위에서 삼삼오오 모여 언제 풀려날지 걱정을 하면서 이런 저런 잡담을 나누었다. 심하지 않는 통제를 보면 곧 풀려날 것도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망중한도 잠시였다. 군인의 집합소리에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좋은 충고의 말과 함께 내보내주겠지 생각했는데, 뒤이어 들어온 장교일행의 행동을 보고 다시 절망에 빠졌다. 천막 안에 들어온 장교는 첫 번째 조사 때처럼 흰 종이를 주고 신상명세를 다시 작성하라고 지시했다. 이번 조사 때는 모든 대원들이 무사히 통과했다.

조사를 끝내고 천막 밖으로 나왔다. 하늘을 쳐다보니 어느새 군부대 뒤편 야산에 해가 걸려있었다. 오늘 중으로 석방되기는 틀렸다고 체념하고 있을 때였다. 다시 연병장으로 집합하라는 전달이 왔다. 또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집합했다. 부대장으로 보이는 장교가 사열대에 올라가서 우리들을 석방한다고 말했다.

석방, 그 얼마나 기다렸던 단어였던가! 강압속의 하루는 분명 며칠은 지난 것 같이 길게 느껴졌다. 장교는 부대를 나가면 절대로 시위를 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우리들의 신상기록이 부대에 보관되어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고 말했다.

석방된다는 기쁨에 들떠서 부대장의 훈시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군부대를 나가는데 지장을 줄까 우려해 기쁜 표정을 밖으로 표출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우리들은 억압에서 풀려났다는 해방감에 젖어 위병소를 나왔다.

그러나 대원들이 의지했던 총도 없었고, 타고 다녔던 버스도 없었다. 광주까지 갈 생각을 하니 기쁨도 잠시였다.

덧붙이는 글 | 이 회상기를 쓴 임영상은 80년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이후 그는 <광주매일> 기자를 거쳐 행정자치부 장관 정책보좌관과 건설교통부 장관 정책보좌관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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