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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사후 97년 발매된 <유재하를 추모하는 앨범>과 그의 1집 <사랑하기 때문에>커버
▲ 유재하 그의 사후 97년 발매된 <유재하를 추모하는 앨범>과 그의 1집 <사랑하기 때문에>커버
ⓒ T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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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하(1962.06.06 ~1987.11.01)

1962년 생. 한양대학교 작곡과. 1984년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키보드 주자로 발탁된 이후,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로 활동, 1986년 김현식 3집의 '가리워진 길'이란 곡을 작곡, 김현식의 초기 명반을 만들어 내는 데 일조했다.

이듬해 1987년에는 자신의 1집 앨범이자 마지막 앨범인 <사랑하기 때문에>를 발표하고, 역시 같은 해 11월 1일 26세의 나이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덕분에 그는 '천재는 단명한다'는 음악계의 공식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회자되는 비극의 인물이 됐다.

현재는 그를 기리는 '유재하 음악 장학회'가 설립되어 있으며, 재정적 문제로 열리지 못했던 2005년을 제외하고 1989년부터 매회 '유재하 음악경연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그 대회를 통해 유희열, 조규찬, 러브홀릭의 강현민, 프로듀서 방시혁, 두 번째 달의 심현보, 장세용, 고찬용, 이한철 등을 비롯, 최근 스윗 소로우에 이르기까지 실력 있는 뮤지션들이 대중음악계에 진출했으며, 명실상부 한국 대중음악가의 신인 등용문으로 자리 잡고 있다. 

토이(Toy)의 6집 앨범 < THANK YOU >
▲ 유희열 토이(Toy)의 6집 앨범 < THANK YOU >
ⓒ 안테나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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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열 (1971.04.19 ~ )

1971년 생. 서울대학교 작곡과. 1992년 제4회 유재하 음악경연대회에서 대상 수상. 1994년 믹싱 엔지니어 윤종오와 함께 키보드 주자로 토이 1집 <내마음속에> 발표.

이후 김현식의 후계자로 불리던 김장훈과 함께 '김장훈과 한국사람'에 참여, 초기 김장훈을 대표하는 곡인 '햇빛 비추는 날'을 작곡. 1집만을 남겨두고 전설처럼 홀연히 떠난 유재하와는 달리, 현재 6집 <Thank You>를 발표, 라디오 DJ와 가수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앞서 말한 그들의 간단한 프로필에 더하여 단순히 외적인 공통점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공교롭게도 같은 성(姓)씨를 가지고 있다.
② 클래식에 기반을 둔 작곡과를 졸업했으며, 음악 역시 고급스러운 사운드에 기인한다.
③ 키보드 주자로 음악을 시작했다.
④ 자신의 앨범 전곡 작곡과 작사, 그리고 편곡까지 아우르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⑤ 김현식-김장훈으로 이어지는 뮤지션들과의 인연이 깊다.
⑥ 가수지만 가창력으로 승부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⑦ 남에게 준 곡이 더 큰 히트를 기록한 경우가 많다.
⑧ 싱어송 라이터라기보다는 프로듀서로서의 능력이 이들을 이해하는 핵심이다.

너무 억지스러운가? 그러나 이 둘은 분명히 닮아 있다.

유재하 그리고 유희열

유재하의 탄생은 한국 대중음악의 축복과도 같은 일이었다. 1987년 발표된 그의 1집 <사랑하기 때문에>는 발표된 지 20여년이 지난 지금에 들어서도 음악적 괴리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다. 시대를 초월하는 그의 음악은 음대를 다니던 26세의 젊은 청년이 만들어 놓은 앨범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뛰어나다. 

유재하는 작곡에서 당시에는 보기 힘들었던 변조에 의한 곡 전개를 시도했다. 또 단순히 드럼, 기타, 베이스, 키보드 정도의 편성이 아닌, 플롯, 바이올린, 오보에, 첼로 이르는 다양한 악기 편성을 시도했다. 물론 스트링 악기의 연주와 편곡은 유재하 본인이 모두 직접 담당했다. 특히 데뷔 앨범에 실려 있는 'Minuet'을 듣고 있노라면 그가 대중음악은 물론 클래식에 대한 이해와 활용도가 얼마나 뛰어났는지 짐작할 수 있다.

유재하는 단순히 노래를 잘 부르는 높은 음역대의 가창력이 아닌 마치 읊조리는 듯한 소소한 발라드적 창법을 선택했다. 이는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가사를 효과적으로 전달했다. 물론 당시에는 무지한 세력들에 의해 '가창력 미달'이라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는 웃지 못할 촌극이 발생하기도 했다. 

다분히 위험했던 유재하의 도전은 대중들이 근접하기 어렵고 난해한 곡이 아닌, 외려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어색하지 않는 불멸의 음반을 만들어 냈다. 또 1990년대 김현철, 김광진, 이적, 김동률, 조규찬을 비롯한 수많은 추종자들을 만들어 냈으며 1997년 <유재하를 추모하는 앨범>이 발매되기도 했다.

또 그 뮤지션들이 곧 한국 대중음악의 든든한 기둥으로 활약했다는 사실을 보면, 기실 유재하는 이 앨범 한 장으로 한국 대중음악이 가는 방향성을 정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아울러 이러한 그의 업적을 직접 느끼고 진정으로 이해하길 원한다면 유재하의 음반을 직접 사서 들어보길 권한다. 음악은 백 번 텍스트로 설명하는 것보다 한 번 듣는 것이 더욱 이해가 쉬울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이런 유재하에 비해 유희열의 음악은 파급력 면에서나 단순비교를 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을지 모른다. 혹자는 유희열 대신 지금도 발라드의 황제로 군림하는 신승훈과의 연관성을 말하기도 한다.

90년대 초중반 상업적 댄스음악이 쏟아져 나올 때, 대중들에게 발라드는 단순히 시끄러운 댄스음악과 대비되는, 그저 '조용한 음악'으로 치부되는 경우가 많았다. 즉, 당시 한국 대중음악에서 발라드는 예전부터 내려오던 실험적인 색채가 빠져 버린 또 다른 상업적 장르로 변질되고 만 것이다. 그 결과 한국 대중음악은 '댄스 음악 vs 발라드'의 이분으로 분리됐다.

이러한 90년대 혼란기 때, 여리여리 한 몸매와 룸펜 지식인의 외모를 닮은 24살의 어린 뮤지션이 '토이(Toy)'라는 이름으로 대중 앞에 등장한다. 일찍이 윤종신의 앨범 두 장을 프로듀스한 놀라운 경력과 제4회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대상 수상자라는 타이틀을 들고서. 난 감히 그의 등장을 유재하가 그랬던 것처럼, 정체되어 있던 한국 대중음악에서 대중적 발라드와 '새로운 소리'를 동시에 들고 온 메신저라고 생각한다. 

'미래의 소리'를 내는 두 명의 천재

하지만 유희열은 어느 순간 몇몇 대중들에게 '감성에 호소하는 그저 그런 발라드 뮤지션'으로서의 꼬리표가 달려 있다.

그러나 유희열 그의 행보를 1집부터 지켜 본 사람이라면, 그가 한국 대중음악에 만연해 있었던 기승전결이 뚜렷한 발라드에서 최대한 벗어나려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음악적 색채를 담으려는 그의 이러한 노력은, 유재하의 전통 계승자로 지목되는 여러 뮤지션들 사이에서 그와 유재하를 엮어내는 핵심이라 할 만하다.

1994년 발표된 토이의 1집 <내마음속에> 이후, '내가 너의 곁에 잠시 살았다는 것'으로 그의 실질적인 명성을 가져다준 2집 <Youheeyeol>을 보고 있노라면 자신이 해 낼 수 없는 음악적 색채에 적재적소의 보컬을 영입하는 방식이나 곡 편성에서 그의 프로듀서적 능력을 느낄 수 있다.

이는 새로운 소리를 생성하기 위한 뮤지션 본인의 또 다른 표현이라 해석할 만하다. 이 앨범에서 타이틀곡인 '내가 너의 곁에 잠시 살았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유희열표 발라드'곡은 이 앨범에서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MBC <FM 음악도시>로 '라디오 스타'로의 가능성을 뽐내고 있을때  발표된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아낸 3집 <Present>이후, 토이의 최고 명반으로 회자되는 1999년 발매된 4집 <A Night In Seoul>은 이러한 과거와의 단절과 새로운 소리에 대한 갈망을 보여준다.

역시 일부 대중들은 그 앨범의 타이틀곡인 발라드 '여전히 아름다운지'로만 그를 기억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트립합적 사운드를 담아낸 '길에서 만나다'를 비롯하여, '스케치북' '새벽그림' '우리는 어쩌면 만약에' 같은 곡들은 많은 음악팬들에게 실험성과 대중성의 균형을 지킨 곡으로 평가를 받는다. 이 곡들은 CF 배경음악으로도 여러 번 사용됐는데 한 앨범에서 세곡이 CF의 BGM으로 쓰이는 것은 그리 흔하지 않을 것이다.

2001년 발표한 5집 <Fermata> 앨범에서 유희열은 자신의 음악적 매너리즘을 끊고, 과거 유재하가 그랬듯이 새로우면서도 대중들의 공감을 얻기 위한 음악적 고민을 고스란히 녹여낸다. 이전 앨범과는 달리 연주곡들이 많이 수록된 5집은 라틴 등 월드뮤직에 대한 고민을 담은 앨범으로 이탈리아 너틸러스 스튜디오의 안토니오 발리오니와의 공동 마스터링 작업을 통해 발매됐다.

이로써 유희열은 신스팝, 프로그레시브, 포크, 모던 록, 일렉트로니카와 퓨전재즈를 거쳐 월드뮤직에 이르는 대중음악의 현대적 시류를 감지하는 첨단의 바로미터의 역할을 충실히 이루어낸다. 그를 단순히 발라드 뮤지션이나 팻 메쓰니, 사카모토 류이치, 시부야 케이 음악의 모방자로 평가하는 건 너무 가혹하지 않을까.

비판의 핵심이 그의 발라드가 너무 대중적이라는 이유로 라고 한다면 그것 역시 너무 억울한 일이다. 유재하의 '그대와 영원히'와 '사랑하기 때문에' 단 두 곡만 듣고서, 유재하를 그저 슬픈 발라드 뮤지션으로 평가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뭐, 물론 정작 유희열 자신은 자신의 음악을 '키치적'이라 하며, 스스로 평가절하하기도 했지만.

맞닿아 있는 그들의 음악

그들은 감성적인 발라드 아래 첨단의 소리를 이야기하는 뮤지션이자 프로듀서로 그렇게 닮아있다.
▲ 유희열과 유재하 그들은 감성적인 발라드 아래 첨단의 소리를 이야기하는 뮤지션이자 프로듀서로 그렇게 닮아있다.
ⓒ 안테나뮤직, 유재하음악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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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집 발표 이후, 유희열은 윤종신을 만나 "형, 제가 이제 무슨 음악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러한 푸념은 그가 음악인으로서 가졌던 '새로운 것'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강했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6년 6개월간에 고심 끝에 유희열이 내린 선택은 다름 아닌 '과거로의 회귀'였다. 과거로부터의 단절, 새로운 것에 대한 갈망을 고심하던 유희열은 그 끝에서 아이러니하게도 '과거', 그 중에서도 '팝(pop)의 과거'를 보았다. 그는 6집 <Thank You>의 모티브를 과거 '아바(Abba)'의 소리에서 찾고 있으며, 실제로 타이틀곡 '뜨거운 안녕'을 듣고 있노라면 꽤나 노골적이라 할 만한 소리를 들려준다.

여기 두 명의 뮤지션이 있다. 유재하와 유희열.

그들은 감성적인 발라드와 실험적이고 새로운 음악으로 대중들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한사람은 전설로 남아 있어 더 이상 그의 음악을 듣는 것을 불가능해졌고, 또 다른 한 명은 현재 진행 중이다.

대한민국 대중음악의 불운의 천재로 대변되는 유재하. 나는 '만일 유재하가 살아 있었다면'하는 과정법의 결과를 유희열의 음악에서 문득 발견한다. 만일 유재하가 살아있어 꾸준히 음악 활동을 했다면 결국 토이 같은 음악을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와 같은 고민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현재는 과거의 연장이며 미래는 현재의 연장이지만, 미래와 과거는 언제나 연결되어 있다. 유재하와 유희열, 두 사람을 보고 있노라면 이런 생각이 더욱 더 확고진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http://blog.naver.com/kells에도 실렸습니다.



태그:#한국 대중음악 연결짓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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