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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만에 재판이 다시 시작됐다. 간첩으로 몰려 부모형제 외엔 모두에게 외면당했던 통한의 세월. 자식을 간첩으로 둔 어미는 울다 지쳐 눈이 먼 채 죽어갔다. 간첩으로 몰린 순진한 어부는 쥐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하다 고문후유증과 겹쳐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지난 4월 30일 전주지방법원 정읍지원에선 두 사건에 대한 재심 재판이 시작됐다. 사건은 두 개지만 결국은 한 사건. 재심을 청구한 이들은 다름 아닌 한 마을에 살았던 어부들. 이들은 무엇 때문에 40년이 지난 재판을 다시 해달라고 요구한 것일까.

 

90일 넘게 감금하고 고문해서 만든 '자진월북'

 

1차 사건은 1968년 7월 3일 아침 연평도 앞 바다에서 조업을 하고 있던 태영호가 북한 경비정에 의해 납치된 것이 발단이 됐다. 이 배에는 배를 여수에서 임대해온 선주 강대광씨와 선장 정몽치씨 등 모두 8명이 타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전북 부안군 위도면 대리에 사는 한 마을 사람들이었다. 한 마을 사람들이 강제 납북된 것이다.

 

4개월 동안 북한에 붙잡혀있던 어부들은 북측으로부터 통상적인 선전교육을 받거나 음식을 접대받았다. 그 해 11월 30일 인천항을 통해 돌아온 어부들은 3일 동안 관계당국의 조사를 받은 후 선적(船籍) 관할경찰서인 여수경찰서로 바로 이첩돼 한 달 동안 조사를 받았다.

 

매일 경찰봉으로 두들겨 패고 3일 동안 잠을 안 재우는 고문이 한달 동안 계속 됐다. 경찰은 어부들에게 북한에 의한 강제납북이 아닌 자진월북을 했다고 진술하라고 강요했다. 하지만 이는 진실이 아니었기에 여수경찰서는 어부들을 '무혐의'로 결론 내리고 귀가조치 시켰다.

 

고향인 위도로 돌아와 일주일이 지나자 이번엔 관할 경찰서인 부안경찰서에서 어부들을 소환했다. 무혐의로 귀가조치 받은 어부들을 부안경찰서는 길게는 40일까지 모두 5~6회에 걸쳐 소환조사를 했다. 경찰은 어부들에게 물고문, 전기고문을 가리지 않고 해댔다. 이들이 원하는 어부들의 진술 역시 자진월북을 인정하라는 것이었다.

 

90일이 넘는 불법감금과 고문의 만행은 순진하고 나약한 어부들이 자진월북한 간첩으로 둔갑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시간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강제납북 어부'에서 '자진월북 간첩'이 됐다.

 

"어부의 양심을 갖고 다시 말하지만 자진월북은커녕 어로저지선도 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매에는 장사없다는 말이 맞았습니다. 경찰서에서 얼마나 많이 두들겨 맞고 고문을 해대던지 경찰이 조작하는대로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박상용씨 모두 진술)

 

기가 막힌 것은 당시 해군본부가 검찰에게 '강제납북 확인서'를 보냈음에도 검찰은 이를 무시하고 어부들을 자진월북으로 몰았다는 것이다. 당시 재판부 역시 어부들이 모진 고문과 협박에 의해 허위진술을 했다고 주장했음에도 이를 묵살했다. 당시 어부들의 죄를 입증하는 유일한 증거는 어부들의 진술서 하나뿐이었다.

 

자식교육 위해 계모임 만든 것이 간첩단 사건으로

 

1차 사건이 위도 어부 8명의 자진월북 조작사건이었다면, 2차 사건은 1차 사건 관련자들과 주민들을 엮어 만든 간첩조작 사건이었다.

 

1978년 12월 16일, 강대광씨를 비롯한 부안군 위도면 대리에 사는 주민 6명이 부안경찰서로 잡혀갔다. 경찰은 79년 1월 24일 이들을 기소할 때까지 약 40일 동안 온갖 고문을 자행하며 간첩단 사건을 조작했다.

 

강씨가 "당시 경찰이 하던 고문 중 안 받은 고문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경찰의 고문수법은 잔인한 만큼 다양했다.

 

경찰은 어부들의 눈을 가린 채 손톱과 발톱 밑에 꼬챙이를 찔러 넣었다. 이 때문에 손톱과 발톱이 모두 빠져버리는 고통을 당했다. 한번에 5~6회씩 전기고문과 물고문이 반복됐다. 어부들이 진술이 엇갈리면 그것을 억지로 짜 맞추기 위해서 고문을 자행한 것이다.

 

2차 사건은 강대광씨와 이일남씨 등 마을친구 6명이 만든 계모임이 빌미가 됐다. 강씨 등은 "우리가 못 배워서 억울하게 끌려가 고문 받고 간첩 누명을 썼으니 우리 자식들만큼은 공부를 시켜서 이런 꼴 안당하고 살게 하자"고 곗돈을 붓기 시작했다.

 

78년엔 한 달에 500원을 부었으니 요즘 시세로 따지더라도 그리 큰 돈은 아니다. 하지만 경찰은 이 계모임을 "자진월북해서 간첩교육을 받고 파견된 간첩이 만든 지하조직"으로 둔갑시키기 위해 온갖 고문을 자행했다.

 

이 잔혹한 고문으로 강씨는 간첩단 수괴로 둔갑해 정확히 10년을 감옥에서 살아야 했다. 이씨는 간첩을 신고하지 않고, 간첩의 고무찬양을 들었다는 죄로 형을 받고 살다가 나와 시름시름 앓다가 끝내 사망하고 말았다. 고문후유증이었다. 나머지 주민들도 모두 간첩을 신고하지 않은 불고지죄 등을 뒤집어썼다.

 

재심 재판이 시작된 지난 4월 30일. 그동안 인천·수원·위도 등지에 흩어져 살았던 주민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40년이 지나 재심이 시작됐어도 이들의 신분은 여전히 피고인. 법정에 피고인 진술이 나올 때마다 주민들은 눈물을 참지 못하고 흐느꼈다.

 

"재판장님, 납북됐다가 사지에서 살아 돌아왔더니 온갖 고문을 해서 간첩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돌아가신 정몽치 선장님은 한글도 모르신 분이었는데 '살고 싶으면 자진월북했다고 쓰라'고 해서 제가 그분 진술서를 대신 써드려서 간첩을 만들었습니다. 고문 때문에 그랬습니다. 죽으려 해도 죽을 기회를 안주고 고문을 했습니다. 각목으로 손가락을 후려쳐서 이 손으론 망치질도 못합니다.

 

감옥 나와서 멸치를 잡아 배에 실어놓으면 '이거 이북놈들이 잡아준 멸치지?'하며 짓뭉갰습니다. 재판장님, 무지하고 선량한 어부들을 고문으로 간첩으로 만들어버린 억울함을 풀어주시기 바랍니다. 누가 이 통한의 세월을 보상해줍니까. 그저 간첩이라는 누명이라도 벗을 수 있게 해주십시오. (강대광씨 모두진술 중)"

 

"군대 영장이 나와있는 상태였는데 먹을 게 없어서 배를 탔습니다. 말로 형언 못할 고문을 받고 감옥 갔다오니까 이젠 군대 기피자로 돼 있었습니다. 군대에선 보안부대 요원이 항상 감시했고, 제대 후엔 이틀엔 한번 형사가 찾아와서 '귀찮으니까 다른 데 가서 살라'고 했습니다. 배운 것이 배타는 것밖에 없는데 간첩이라고 '선원수첩'을 낼 수가 없어서 배를 못타고 리어카 행상을 했습니다. 이 억울함을 누가 보상해줍니까. (이종섭씨 모두 진술)"

 

한편 전주지법 정읍지원은 지난 4월 14일 두 사건에 대한 재심을 결정했다. 지난 2007년 3월과 7월에 사건관련자들이 낸 재심청구를 받아들인 것이다. 이에 앞서 어부들은 지난 2006년 2월에 두 사건이 경찰의 고문으로 조작됐다며 진실과화해위원회에 진정을 냈다.

 

두 사건의 재심변호를 맡고 있는 송호창(민변 사무처장) 변호사는 "법이 지배하지 못하고 폭력이 지배하던 시대에 빚어진 불행한 사건"이라며 "유죄증거는 피고인 진술뿐인데 이는 모두 경찰의 가혹행위와 고문으로 만들어진 허위진술이기 때문에 진상을 명백히 밝혀야 한다”고 지적했다.

 

오는 21일엔 두 사건의 재심재판 두 번째 공판이 열린다. 40년 만에 다시 시작된 재판은 폭력이 감춘 진실을 찾아낼 수 있을까. 역사는 결국 판결문보다는 진실을 기록하기 때문이다.


태그:#간첩, #위도, #민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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