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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맛있는 음식이란 무엇일까?'

내가 기억하는 한 이 질문에 가장 인상적인 답을 제공해준 사람은 만화 <식객>의 허영만 선생일 것이다. 조금 길긴 하지만 모두가 충분히 음미할 만한 얘기여서 그대로 인용해 본다. 

"우리는 모두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음식을 최초의 맛으로 기억한다. 첫사랑이 그렇고 첫날밤이 그렇듯 처음 기억은 잊혀지지 않는다. 그것은 깊은 상흔처럼 세월 속에서도 결코 희미해지는 법이 없다.

기억은 오히려 선명해지고 향수는 깊어만 간다. 거친 물살을 헤치고 기어이 태생지로 돌아가는 연어처럼 우리에게는 최초의 맛을 찾아 헤매는 질긴 습성이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유년의 밥상에 올랐던 소박한 찬을 가장 맛있는 음식으로 떠올리는 것은 그리움에 다름 아니다. 남루하고 고단한 삶이어도 어머니의 사랑이 있기에 함부로 좌절할 수 없듯 그 시절의 행복한 기억은 살아가는 힘이 되어 주는 것이다.

맛은 추억이다. 맛을 느끼는 것은 혀끝이 아니라 가슴이다. 그러므로 절대적으로 훌륭한 맛이란 없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은 이 세상 모든 어머니의 숫자와 동일하다."(<식객> 1권 중에서)

"입 안에 감도는 맛들이 나를 기억 속으로 이끌었다"

 죽산 조봉암의 막내딸 조의정씨가 펴낸 요리책 <엄마처럼>.
 죽산 조봉암의 막내딸 조의정씨가 펴낸 요리책 <엄마처럼>.
ⓒ 조선일보 생활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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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최근 만난 요리책 한권도 '맛은 추억이고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라는 '허영만 음식 테제'에 아주 충실하다. '쉽게, 맛있게, 따뜻하게 차린 밥상'이란 부제를 단 <엄마처럼>(조선일보 생활미디어)이란 책이 그것이다.

수필 제목 같은 요리책 <엄마처럼>의 저자는 조의정(57)씨다. 아마도 독자들에게는 매우 낯선 이름이다. 하지만 그의 부친의 이야기를 꺼내면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게다.

조씨는 '진보당사건'으로 잘 알려진 죽산 조봉암의 막내딸이다. 죽산은 그가 9살 때 '술 한잔 못하고 담배 한 대 못피우고'(당시 죽산의 죽음을 보도한 기사의 제목)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하지만 조씨는 자신이 역사적 인물인 조봉암의 딸이라는 데 적지 않은 부담감을 느끼는 듯하다. 오히려 그는 아내이자, 며느리이자, 엄마로 기억되고 싶어 한다. 이신우콜렉션 디자인실장 등으로 활약했던 그가 <엄마처럼>을 펴낸 것도 그런 소박한 바람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자신의 요리를 먹어보고 결혼을 신청한 남자과 결혼했다는 조씨에게 맛과 음식은 '기억'이고 '추억'이다.

"기억에 아름다운 색칠을 한 것이 추억이라면 나는 너무 오래 묻어두었던 어릴 적 추억을 할머니의 손맛을 더듬이며 되찾았다. 맛나고 아름다운 추억이 거기 그렇게 깊숙이 박혀 있었구나. 호로록호로록 넘어가던 고소한 잣죽 같은 추억, 살얼음 낀 식혜처럼 달콤하고 시린 추억들이 음식을 만드는 내내 예고없이 찾아와서는 자꾸만 손을 멈추게 했다.

누구는 후각이 기억을 가장 잘 되살리게 한다지만, 내게는 입 안에 감도는 맛들이 나를 기억 속으로 이끌었다. 그때 내가 삼킨 것은 우리 부모님의 사랑이고 우리 가족의 문화이고, 조선사람의 역사였다는 것을 깊이 깨닫는다."

여름에 먹는 낭만만두 '규아상'을 들어봤나?

<엄마처럼>은 강화도출신 할머니와 평안도출신 시어머니의 손맛이 골고루 담겨 있다. 책에서도 '할머니 밥상'과 '어머니 밥상'이 중요한 지면을 차지하고 있다. 할머니와 시어머니는 요즘 유행하는 '전통 슬로푸드'(slow food)의 대가라고 할 만하다.

여기에다 할머니와 시어머니의 손맛을 새롭게 종합(fusion)시킨 듯한 '저자만의 밥상'이 보너스로 펼쳐진다. 관자스테이크나 통족발김치찜, 쇠고기아스파라거스말이, 간장대하장, 파육개장 등이 '50대 신세대 엄마'가 주는 맛있는 보너스다.   

조씨의 손맛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할머니였다. 서른 셋에 과부가 된 할머니는 "집 안팎의 대소사를 모두 진두지휘하시는 여왕이고 장군"이었다. 메밀·청포묵, 오이·애호박·가지·무·숙주·시금치나물, 병어·조기조림, 모시조개냉이된장국 등 할머니의 밥상은 익숙해서 정말 따뜻하다.

특히 삼색달걀조림, 흰살생선말이, 준치맑은국, 굴깍두기 등에 이르면 입안에 고이는 침을 막을 길이 없다.

 '할머니 밥상'에 차려진 준치맑은국(왼쪽)과 '여름날의 낭만만두' 규아상.
 '할머니 밥상'에 차려진 준치맑은국(왼쪽)과 '여름날의 낭만만두' 규아상.
ⓒ 조선일보 생활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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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살생선말이는 도미 흰살에 쇠고기와 표고버섯을 넣어 만든 술안주였다. 할머니는 큰사위이자 조씨의 부친인 죽산을 위해 하루종일 매달려 흰살생선말이를 만들었다고 한다. 또 '썩어도 준치'라는 준치의 살만 발라내 완자로 만들어 달걀 흰자에 묻혀 끓이는 준치맑은국은 초여름 보양식으로 그만이다.

할머니 밥상에는 이름만으로 우아해질 것만 같은 음식이 하나 있다. 저자가 '여름날의 낭만만두'라고 이름붙인 '규아상'이 그것이다. 규아상은 궁중에서 여름철 별미로 수라상에 올랐던 만두로 '미만두'라고도 불린다. 오이로 만든 소를 넣고 해삼모양으로 싸서 찐다. 특히 접시에 담쟁이 잎을 깔아 만두를 담아낸다는 점이 '낭만만두'라는 애칭에 잘 어울린다. 

조씨의 손맛에 영향을 미친 또 한사람은 시어머니다. "완벽하게 임무를 수행하려는 철저한 프로정신으로 무장한 군인"을 연상시킨다는 시어머니의 밥상은 저자의 자랑대로 "며느리에게 대물림하고 싶은 정갈한 솜씨"를 자랑한다.

해파리냉채, 녹두빈대떡, 잡채, 오이냉국, 두부조림, 북어찜, 갈비찜, 굴만두국, 보쌈김치, 오이소박이 등 우리에게 익숙한 음식은 물론이고 가지선·호박선, 금태구이, 코다리식해, 배숙 등은 독특하면서도 특별해 보인다.

가지선·호박선은 적당하게 익힌 뒤 칼집을 낸 가지와 호박에 쇠고기와 양파 등을 다진 고기소를 넣어 만든 음식이다. 또 우럭과 사촌지간이라는 금태에 맛있는 양념장을 발라 노릇노릇 구운 금태구이도 눈을 즐겁게 한다.

코다리식해는 시어머니가 가자미식해의 대체재로 개발한 음식이다. 함경도가 고향인 시아버님이 가자미식해를 좋아했는데 가자미가 너무 비싸지자 시어머니가 명태 코다리를 새로운 식해의 재료로 선택한 것.

이와 함께 생강을 끓인 물에 꿀을 타서 통후추를 박은 배를 띄운 '배숙'은 전통음료인 식혜나 수정과 못지않게 후식으로 안성마춤이다.  

할머니가 전해준 '밥상머리교육'

조씨가 아주 친절하게 적어놓은 레시피(recipe, 조리법)도 좋지만, 그가 풀어놓은 '음식이야기'는 더욱 흥미롭다. '추억'과 관련된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특히 그가 전하는 할머니의 '밥성머리 교육'은 밑줄을 그어놓을 정도로 퍽 인상에 남는다.

"얘야, 남의 집에 갔다가 식사시간이 되면 얼른 집으로 와야 한다. 혹시라도 남의 집에서 식사를 하게 되면 절대 먼 데 있는 반찬을 먹으려고 팔꿈치를 펴지 마라. 아주 상스럽다. 그저 팔을 펴지 않고 집을 수 있는 것만 먹고 오너라. 또 생선조림 같은 게 상에 오르면 생선살을 먹으려고 헤집지 말고 같이 졸인 무를 하나 집어 먹으면 간이 고루 배어 있어 먹을 만하고 보기에도 음전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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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선대부속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한국의 보수와 대화하다><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