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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당은 주변 17개의 오름으로 둘러싸인 산간 마을이다. 4·3이 일어나기 전에는 마을 중심부에 상동, 중동, 하동이 있고, 주변에 장기동, 알손당, 너븐밧, 가시남동, 대천동 등 여러 개의 자연 마을을 거느리고 있던 큰 마을이었다.

마을이 한라산과 가까이 있기 때문에, 4·3 초기에는 무장대의 영향이 크게 미쳤다. 그러다가 1948년 11월 22일에 이르러 군경토벌대가 마을을 초토화시켰다. 사전에 초토화계획이 알려져 주민들이 모두 대피했기 때문에 다른 마을에 비해 큰 인명피해는 없었다.

1949년 5월 29일 본 마을은 복구되었지만, 장기동, 알손당 가시남동, 너븐밧 등은 복구되지 못했다.

장기동은 4.3당시 군경토벌대에 의해 초토화된 후 복원되지 못했다. 이 마을은 최후까지 생존했던 무장대원 '오원권'의 고향이기도 하다.
▲ 잃어버린 마을 '장기동' 장기동은 4.3당시 군경토벌대에 의해 초토화된 후 복원되지 못했다. 이 마을은 최후까지 생존했던 무장대원 '오원권'의 고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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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천동 입구에서 동북쪽으로 난 삼나무 가로수길을 따라 가면 길 오른 쪽에 장기동 마을 터임을 알리는 표석이 눈에 들어온다. '장기동(長期洞)' 혹은 '장기동 장터'라는 마을 이름은 조선시대 이 근처에 국마를 키우던 1소장이 있었기 때문에 지어진 것이다. 굳이 해석하자면 다른 목장에 비해 '길이가 긴 목장이 있던 터'라는 의미다. 

4·3이 발생하기 이전에 이 마을에는 15호에 약 80명이 살고 있었다. 송당의 다른 마을들처럼 장기동 마을도 1948년 11월 22일경 군경토벌대에 의해 초토화되었다. 송당 본마을이 재건될 당시에도 장기동은 재건되지 못했다.

한편, 장기동은 4·3당시 최후까지 산에서 생존했던 무장대원 오원권의 고향이며, 그가 토벌대의 회유와 압박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귀순을 거부하다가 생포된 장소이기도 하다. 

4.3 당시 제주의 중산간 마을은 군경 토벌대에 의해 초토화되었다.(제주4.3평화공원에서 촬영)
▲ 초토화 작전 4.3 당시 제주의 중산간 마을은 군경 토벌대에 의해 초토화되었다.(제주4.3평화공원에서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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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원권은 장기동에서 부모와 함께 농사를 짓던 평범한 농부였다. 4·3이 일어날 당시 그에게는 젊은 아내와 8개월된 아들이 있었다. 군경 토벌대가 마을을 초토화시키는 과정에서 오원권은 정든 집과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다.

해안 마을로 소개된 뒤에도 그의 가족은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그는 먹을 것을 구하려고 고향 마을로 들어갔지만 황폐화된 마을에서 그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길로 그는 무장대원이 되었다.

1948년 11월부터 9연대와 2연대에 의해 무장대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이 자행되었다. 그리고 1949년 3월에 설치된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의 산악소탕작전과 귀순공작이 이어졌다. 그 결과 무장대는 거의 궤멸상태에 이르렀다.

그 와중에 1949년 4월 21일에는 남로당 당수인 김용관이, 6월 7일에는 무장대의 주력부대를 이끌던 이덕구가 전투 중 사살되었다. 6월 8일 이덕구의 시신은 관덕정에 매달린 채 행인에 공개되었다. 산에 남아있던 무장대 대원들은 사실상 전투력을 상실했고, 초근목피로 목숨을 이어가기에도 버거운 나날을 보냈다.

무장대들은 산속에서 겨우 목숨을 유지했다.(제주4.3평화공원에서 촬영)
▲ 무장대의 생활 터 무장대들은 산속에서 겨우 목숨을 유지했다.(제주4.3평화공원에서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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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한라산에 남아있던 무장대에 대한 수색 및 토벌은 경찰전투대와 주민들로 구성된 특동대의 몫이 되었다. 당국은 주민들로 하여금 중산간에서의 고사리 채취나 우마 방목을 금지시켜 무장대를 주민들로부터 고립시켰다. 그리고 삐라와 언론을 동원하여 귀순공작을 지속했다.

1952년 6월 22일 경찰은 한국전쟁 이후 귀순한 무장대원이 23명에 이르렀다고 발표했다. 이후에도 사살되거나 생포된 무장대와 귀순한 무장대의 소식이 언론을 통해 끊임 없이 보도되었다. 생포되거나 귀순한 무장대원들을 반공교육장에 동원되기도 했다.

한편 산에 남아있던 무장대들은 생명을 잇는 것이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1952년 6월 5일에 보도된 제주신보의 기사를 보면 당시 무장대원들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다.

"지난 5월 2일 밤 11시경 무장 비무장을 합한 약 30명의 공비가 북제주군 애월면 납읍리 부락에 내습하였는데 그들은 주로 식량, 의류 등 탈취를 목적하고 부락 내부에 침입하려고 애썼던 것으로 그 중 1명의 무장공비는 동리(납읍리) 리서기 김창옥씨 댁에 뛰어들어 식량을 강요하였다. 그때 김씨는 공비를 식량창고에 안내하는 것처럼 교묘한 태도를 취하고 기회를 엿보아 공비에게 용감히 덤벼들어 그가 소지한 99식 장총 1정과 실탄 5발을 탈취하여 이를 물리쳤다고 한다."

오랜 산 생활 끝에 생사를 오가던 무장대원들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여 무참히 무너지고 있었다.

종전 선언 이듬해인 1954년이 되자 당국은 "산에 남은 무장대는 남자 4명과 여자 2명으로, 이들은 두 갈래로 분리되어 서로 연락이 두절된 상태"라고 했다. 그리고 그 해 무장대원 한명이 투항하여 산에 남은 대원은 5명으로 줄었다. 그리고 2년이 지났다.

무장대들은 주변의 오름을 돌아다니며 초근목피로 생명을 이어갔다.
▲ 송당 주변의 오름들 무장대들은 주변의 오름을 돌아다니며 초근목피로 생명을 이어갔다.
ⓒ 장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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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4월이 되니 송당의 현 송당목장이 있는 곳에서 무장대원 한 명이 경찰유격대에 의해 사살되었다. 사살된 대원은 구좌읍 상도리 출신 정권수였다. 한편 경찰은 남은 4명의 무장대원들의 대원들의 신상을 발표했다. 김성규(중문면 색달리, 36세), 오원권(구좌읍 송당리, 39세), 변창희(제주시 이호동, 22세), 한순애(조천읍 와산리, 23세) 등이 그들이었다. 그중 김성규가 두목이고, 죽은 정권수는 부두목이라고 했다.

그리고 다시 해가 넘어갔다. 57년 3월 23일 남아있던 유일한 여성 무장대원이던 한순애가 생포되었다. 제주시 월평동 견월악 인근에서 수색 중이던 사찰특수유격대에게 붙잡힌 한순애의 가방 안에서 발견된 것은 무기가 아니라 소형 그릇, 모포, 쌀과 보리 등이었다.

3월 27일이 되자 김성규와 현창희가 한라산 중턱에서 경찰과의 전투 끝에 사살되었다. 그리고 4월 2일이 되자 오권권도 생포되었다. 제주 4·3이 일어난 지 꼭 9년이 되었던 1957년 4월 3일에 언론은 제주도 '공비'들이 괴멸되었다고 환호성을 질렀다.

"2일 제주도의 공비 한 명을 생포함으로써 제주도는 공비가 한 명도 없는 낙토가 되었다. 치안국에 들어온 보고에 의하면 2일 0시 7분경 현지 경찰서에서는 북제주군 구좌면 송당리 '장기동' 부락에서 공비 오원권을 생포하는 동시에 카빈총 1정을 노획하였는데, 이는 27일 공비 세 명을 소탕한 탕전의 추가 전과라고 한다."

'장기동'은 조선시대 1소장이 인근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1소장은 다른 목장에 비해 길이가 길었다.
▲ 장기동 벌판 '장기동'은 조선시대 1소장이 인근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1소장은 다른 목장에 비해 길이가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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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까지 남았던 무장대원 오원권은 체포되기 직전 초토화된 자신의 고향마을인 장기동 주위를 배회하다 경찰에 붙잡혔다. 불타 없어진 장기동 마을과 젊은 시절을 산에서 보낸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며 설움에 젖었지도 모른다.

서울로 압송되어 치안국에서 조사를 받은 후 오원권이 언론사와의 회견에서 남긴 말이다.

"내가 산에 들어갈 때 8개월이었던 아들이 지금은 10살이 되었을 것이다. 빨리 보고 싶다. 부친은 지금 83세다. 부친을 모시고 아들놈하고 농사나 지어 나가면서 살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가 생포되기 전에 장기동을 배회하던 이유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누구에게든지 고향과 가족은 삶의 위로이며 영혼의 안식처인 것이다. 남의 고향을 파괴하는 것이 얼마나 큰 비극을 야기하는지 지난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지금 정부가 귀담아 들었으면 좋겠다.


태그:#장기동, #무장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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