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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동교에서 바라본 연산천.
 관동교에서 바라본 연산천.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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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백 장군 최후의 결전장이었던 황산벌

황산성 답사를 위한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한다. 연산시장이 있는 연산리에서 철길을 지나 관동교를 건넌다. 이곳이 백제의 계백 장군이 결사대 5천을 거느리고 출전하여 신라 장군 김유신의 5만 군사와 최후 결전을 벌였던 황산벌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조는 계백의 최후에 대해 간략하게 서술하고 만다.

又聞唐羅兵已過白江·炭峴 遣將軍 伯 帥死士五千 出黃山 與羅兵戰 四合皆勝之 兵寡力屈竟敗 伯死之 於是合兵禦熊津口 瀕江屯兵 定方出左涯 乘山

또 당나라와 신라의 군사가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말을 듣고 (왕은) 장군 계백(伯)을 보내 결사대 5천 명을 거느리고 황산(黃山)에 나아가 신라 군사와 싸우게 하였다. (계백은) 네 번 크게 어울려 싸워[會戰] 모두 이겼으나 군사가 적고 힘도 꺾이어 드디어 패하고 계백도 죽었다.

역사는 승자의 전리품이다. 패자에게 너그럽기를 기대하는 건 망상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무열왕조는 당시의 상황을 세세히 묘사하고 있다.

秋七月九日 庾信等進軍於黃山之原 百濟將軍 )伯 擁兵而至 先據 設三營以待 庾信等 分軍爲三道 四戰不利 士卒力竭 (중략)左將軍品日 喚子官狀 一云官昌 立於馬前 指諸將曰 “吾兒年十六 志氣頗勇 今日之役 能爲三軍標的乎” ○○官狀 曰 唯 以甲馬單槍 徑赴敵陣 爲賊所擒 生致 伯 伯脫胄 愛其少且勇 不忍加害 乃嘆曰 新羅不可敵也 少年尙如此 況壯士乎 乃許生還

(660년) 가을 7월 9일에 유신 등이 황산(黃山) 벌판으로 진군하니, 백제 장군 계백(伯)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먼저 험한 곳을 차지하여 세 군데에 진영을 설치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유신 등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네 번을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고 사졸들은 힘이 다빠지게 되었다.

이렇게 형편없던 신라군의 사기를 끌어올린 것은 화랑 관창의 죽음이었다. 16세 소년 관창을 사로잡은 계백은 처음엔 살려주었으나 재차 돌격해오자 할 수 없이 죽이고 만다. 관창의 죽음으로 사기가 크게 오른 신라군은 백제군을 무찌른다. 마침내 계백은 죽고 좌평 충상과 상영(常永) 등 20여 명은 사로잡히는 것으로 싸움은 끝이 난다.

벌판 한가운데로는 연산천이라는 꽤 너른 하천이 흘러가고 있다. 아마도 예전엔 하천 폭이 훨씬 크고 유량(流量)도 많았을 것이다. 계백이 황산벌을 마지막 싸움터로 택한 것이 이것 때문이었던가. 그는 소위 말하는 배수의 진을 쳤던 것이다. 연산천을 사이에 두고 서로 대치하고 있었을 백제군과 신라군의 광경을 상상한다.

 황산벌과 황산성이 있는 함지봉 남쪽 봉우리(264m봉).
 황산벌과 황산성이 있는 함지봉 남쪽 봉우리(264m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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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동리 마을 뒷편 산기슭에 있는 연산향교.
 관동리 마을 뒷편 산기슭에 있는 연산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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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리 뒤로 난 산길을 통해서 황산성을 오르기로 한다. 다른 길도 있지만, 연산향교에 잠시 들렀다가 가기 위해서이다.

관동리는 황산벌에 접해 있는 마을이다. 16세 소년 관창을 사로잡은 계백이 "나이가 어리고 용감함을 아껴서 차마 해치지 못"하고 돌려보냈으나 다시 침입하므로 부득이 잡아 죽인 곳이 이곳이라 한다. 처음엔 관창골이라 불렀는데 차차 변해 관청골 또는 관동으로 된 것이다.

마을 고샅은 한가하다. 달래를 캐는 할머니 외엔 사람의 그림자조차 아른거리지 않는다. 마을을 벗어난 지점에 향교가 있다. 다행히 문이 닫혀 있지 않아 밀치고 들어서니 대성전을 비롯한 모든 건물들이 고색창연하기 이를 데 없다. 함부로 손대지 않아 기품을 잃지 않은 것이다.

 황산성 가는 산길.
 황산성 가는 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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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 중턱에 있는 약사암에서 바라본 연산면.
 산 중턱에 있는 약사암에서 바라본 연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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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 왼쪽 담장을 끼고 산길을 올라간다. 산벚나무는 벌써 꽃이 졌나보다. 가지마다 꽃 진 자리가 선명하게 남았다. 이제 거의 시들기 시작한 현호색과 한창을 구가하는 타래붓꽃이 줄지어 나그네를 맞는다. 과거로 가는 길은 사색을 통해서 가야만 하는 오솔길이다. 그러니까 난 지금 두 개의 오솔길을 동시에 걷는 셈이다.

그러나 오솔길은 진득하게 이어지지 못한다. 얼마 가지 않아 붉게 파헤쳐진 인도가 나타난 것이다. 역사의 오솔길을 걸으면서 차츰 외연을 넓혀가던 내 상상력은 마치 불에 데기라도 한듯 화들짝 깨어난다.

임도 위엔 약사암이란 오래되지 않은 암자가 결가부좌를 틀고 있다. 약사여래시여. 어디 몹쓸 길 내는 사람들 고치는 약은 없을까요? 약사암 뒤에서 내려다보니 연산면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출세간에서 바라보는 세간이 측은하다.

아직도 물이 마르지 않고 샘솟는 성안 우물

 우물.
 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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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창터지. 황산성(충청남도기념물 제56호)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다.
 군창터지. 황산성(충청남도기념물 제56호)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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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오르막길을 올라가니, 참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공터가 나온다. 공터에서 약간 아래로 내려가자 우물이 나타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그 우물인가? <신증동국여지승람>은 황산성의 둘레가 1740척(527m), 높이가 12척(3.7m)이며, 성 안에 우물 1곳과 군량을 보관하던 군창이 있었다고 전한다.

조금 더 아래로 내려서자, 너른 공터가 나온다. 군량을 보관하던 군창이 있던 곳인가 보다. 공터는 남쪽을 향해 열려 있다. 그렇다면 이곳 어딘가에 남문지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성으로 올라오는 길목 중 가장 평탄한 통로인데다 건물지가 있는 걸로 보아 그 문이 성의 주출입문이었을 것이다. 황산벌로부터 약 10여 리 떨어져 있는 이곳에 계백 장군의 지휘사령부가 있지 않았을까.

성 안에서 '황산인방(黃山寅方)', '대안(大安)'이라고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고 백제 특유의 삼족토기(三足土器)를 비롯한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고려시대 와편·자기 조각들과 조선시대 백자 조각 등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백제 멸망 이후에도 황산성은 계속 사용되었던 모양이다. 

 채 허물어지지 않고 남은 성벽.
 채 허물어지지 않고 남은 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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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산길을 올라간다. 산의 8부 능선쯤에서 아직 허물어지지 않은 성벽을 만난다. 피붙이라도 만난 듯 몹시 반갑다. 군데군데 성돌 무더기도 흩어져 있다. 황산성은 연산평야와 논산평야가 내려다보이는 해발 264m의 산봉우리를 빙 둘러 돌로 쌓은 산성이다.

채 허물어지지 않은 성벽을 들여다보니, 깬돌을 모가 난 쪽이 겉으로 나오도록 쌓았음을 알 수 있다. 백제 웅진시대와 사비시대에 걸쳐 축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성은  본래의 둘레가 870m였다고 한다. 백제부흥군의 거점이었을 것으로 비정되는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8호 질현성보다 약간 큰 성이다.

현재 성벽은 거의 무너진 것으로 보인다. 올라오는 내내 이곳 말고는 성벽을 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너무 아쉬워할 건 없다. 무너질 건 무너지고 사라질 건 사라지는 게 순환하는 자연계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오늘, 내가 답사에서 기대한 것은 성벽을 보고자 함이 아니라 전체적인 안목을 기르고자 함이니. 

계백이 없었다면 백제의 멸망은 얼마나 더 초라했을까

 함지봉 정상 장대지에 남아 있는 석축.
 함지봉 정상 장대지에 남아 있는 석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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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지봉 정상에서 바라본 연산면 일대.
 함지봉 정상에서 바라본 연산면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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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산 정상(해발 264m)에 올라선다. 연산평야와 논산평야가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이다. 봉우리엔 국사봉까지 '8.2km 더 가야한다'라는 이정표가 서 있다. 건물 한 채 정도 들어설 만한 공터가 있고, 공터 남쪽엔 철쭉이 심어져 있다. "성의 북쪽 봉우리에는 30㎡의 넓은 대지가 있는데 장수가 올라가 지휘하던 장대터로 짐작된다"라고 쓰인 문화재청 자료에 따르면 이곳이 장수가 군사를 지휘하던 장대터인 모양이다.

그러나 문외한인 내가 보기엔 허물어진 돌무더기로 보나 북쪽이라는 위치로 보거나 이곳은 봉수대 자리가 틀림 없어 보인다. 도대체 장수가 얼마나 목청이 크길래 이곳에 서서 저 산 아래 병사를 지휘한단 말인가.

서쪽으로는 백제의 서울이었던 부여가 아련히 바라다보인다. 신라군과 맞서 싸우며 계백장군도 이곳에 올라 부여를 바라봤을까. 그리고 자신이 벌이는 싸움이 과연 처자를 베힐만한 가치가 있는 싸움인지 생각했을까. <삼국사기> 열전 계백조는 계백의 최후를 이렇게 전한다.

以一國之人 當唐·羅之大兵 國之存亡 未可知也 恐吾妻 沒爲奴婢 與其生辱 不如死快” 遂盡殺之 至黃山之野 設三營 遇新羅兵將戰 誓衆曰 “昔句踐以五千人 破吳七十萬衆 今之日 宜各奮勵決勝 以報國恩” 遂戰 無不以一當千 羅兵乃却 如是進退 至四合 力屈以死

"한 나라 사람이 당나라와 신라의 대군을 당해내야 하니 국가의 존망을 알 수 없다. 내 처와 자식들이 포로로 잡혀 노비가 될 지 모르는데, 살아서 욕을 보는 것보다는 차라리 쾌히 죽는 것이 낫다." 드디어 가족을 모두 죽였다. 황산의 벌에 이르러 세 진영을 설치하고 신라의 군사를 맞아 싸울 때 뭇 사람에게 맹서하였다."옛날 구천(句踐)은 5천 명으로 오나라 70만 군사를 격파하였다. 오늘은 마땅히 각자 용기를 다하여 싸워 이겨 국은에 보답하자." 드디어 힘을 다하여 싸우니 한 사람이 천 사람을 당해냈다. 신라 군사가 이에 물러났다. 이처럼 진퇴를 네 번이나 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힘이 다하여 죽었다.

그가 맞은 최후는 장려하다. 계백이라는 존재마저 없었다면 백제의 멸망은 얼마나 서글프고 형편없고 초라한 것이었을까. 백제의 태양이 지는 그 순간 역사에는 계백이란 태양이 솟아난 것이다.

산봉우리엔 죽은 백제 군사들의 넋인양 하얀 조팝나무꽃이 군데군데 피어 있다. 서기 660년 봄에도 조팝나무 꽃은 저렇게 흐드러지게 피어났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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