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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핵·개방 3000'으로 상징되는 일방적 상호주의에 매달려왔던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에 미묘하지만 의미있는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변화의 계기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싱가포르 북미 회담에서 핵 신고 문제에 대한 잠정합의가 있었고, 이에 대해 부시 행정부가 승인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이다. 북미관계가 진전되는데 이명박 정부가 계속 대북 강경 노선을 고집할 경우 남북관계와 한미공조 모두 '빨간불'이 켜질 수 있다.

 

또 하나는 총선이 끝났다는 점이다. 이 대통령은 17일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이 자신에 대한 공세를 퍼부은 이유로 두 가지를 들었다. 하나는 북한이 남한의 새로운 정부를 길들이려는 의도이고, 다른 하나는 4.9 총선에 영향력을 행사해보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 대통령의 후자에 대한 인식이 중요하다. 즉, 이명박 정부가 북한의 대남 공세의 의도가 총선에 있었다고 생각하면, 이에 대한 대응도 총선을 의식하게 된다는 점이다. 북한의 공세에 북한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일 경우, 결과적으로 북한의 의도에 말려들게 되고 이에 따라 보수진영의 표 이탈을 우려했다는 해석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총선에서 승리한 이명박 정부는 국내 정치에 대한 의식을 줄이고 보다 현실적인 관점에서 대북정책을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대통령, 네오콘의 기대 '일축'

 

이명박 대통령이 미국에 도착한 다음 날(16일), 미국의 대외정책에 있어서 네오콘의 '나팔수' 역할을 해온 <월스트리트저널>은 사설을 통해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강력히 비난하면서, 이명박 대통령이 "싱가포르 합의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에 관해 부시 대통령을 설득할 입지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 대통령과 면담한 공화당 중진 의원들도 마찬가지 주문을 내놓았다.

 

이들이 싱가포르 잠정합의에 관해 문제삼은 것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미국이 북한에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UEP) 문제나 시리아와의 핵 협력 의혹 등은 제외한 채 플루토늄 프로그램만 언급한 북한의 핵 신고를 수용하려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철저한 검증이 누락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네오콘들은 '레이건'을 벤치마킹 하겠다던 부시가 '클린턴'을 닮아간다고 힐난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의 새로운 대통령이 부시를 설득해주길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은 이러한 네오콘의 기대를 저버렸다. 그는 17일자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싱가포르 회담 결과를 수용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우리는 북한의 시리아와의 핵 협력이나 우라늄 농축 활동에 대한 최종적 결과를 알지 못한다. 우리가 확실히 알 때까지 좀더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북한 체제의 성격을 고려할 때, 북한이 이들 두 가지 활동에 대해 간접적으로 시인한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북핵 문제를 풀 수 있는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게 한다. 이것은 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북한이 앞으로 어떠한 핵확산 활동에도 관여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이는 이 대통령이 부시 행정부가 하고 싶었던 말을 그대로 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마디로 '싱가포르 잠정합의를 한미 양국이 승인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이 대통령은 북핵 문제에 대한 역지사지(易地思之)의 태도도 일부 보여주었다. 그는 "북한이 핵 합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대해, "한국과 미국의 관점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의 관점에서 본다면, 북한 역시 우리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역지사지의 태도가 앞으로 남북관계와 북핵 문제를 푸는데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명박 정부, 대북 식량지원 추진하나?

 

또 한가지 중요한 대북정책 변화의 기류는 대북 식량 지원에서 나타난다. 이 대통령은 남북 경제협력은 북한의 비핵화와 연계시키고 식량 지원은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추진하겠다는 기존 입장을 밝히면서도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졌다. "누가 먼저 요청을 하든 관계없이" 북한의 식량 사정이 대단히 어려운 만큼, "필요성이 커진다면, 우리는 북한에 식량 지원하는 문제를 논의할 기회를 찾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명박 정부는 이전까지 북한이 요청하면 식량 지원 여부를 논의해볼 수 있다는 입장을 견지했었다. 그런데 이 대통령의 이러한 발언은 북한의 요구 여부와 관계없이 식량 지원을 추진할 의사를 간접적으로 피력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미국도 50만톤의 식량 지원을 추진하고 있는데, 한국이 나몰라라 하는 것에 대한 부담감도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절호의 기회 맞이한 이명박 정부

 

국내적으로 많은 논란을 야기하면서 남북관계를 경색시킨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은 '북핵 폐기 우선주의'와 '한미공조 우선주의'를 두 축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발상을 전환해보면, 이 두 가지 원칙은 현 시점에서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닐 수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북핵 문제의 진전이 없으면 남북관계의 후퇴는 불가피해진다. 북핵 신고 문제가 꽉 막혔던 얼마 전까지는 그랬다. 또한 미국의 대북강경책을 고수한다면, 미국에 코드를 맞추는 한미공조는 그야말로 재앙이 될 수 있다. 그런데 부시 행정부는 이미 바뀌었다. 적어도 대북정책에 관해서는 그렇다.

 

이 두 가지 사정은 이명박 정부가 원칙을 지키면서 전향적이고 능동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이다. 북미간의 싱가포르 잠정합의와 이에 대한 부시 행정부의 승인은 이 대통령 스스로 말한 것처럼 '진전'이다. 북핵 문제에 진전이 있으면 남북경협을 활성화하겠다는 약속을 이행할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한미공조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번 한미정상회담에서 싱가포르 회담 결과를 공식적으로 승인하고, 북핵 폐기와 북미관계 정상화 및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과 같은 근본문제를 논의하자고 공식 천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면, '한미공조를 통한 북핵 해결'이라는 원칙을 과시하면서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프로세스를 본격 가동할 수 있게 된다. 통미봉남의 우려도 상당 부분 씻을 수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이번 정상회담에서 부시 대통령에게 북미, 혹은 다자 정상회담을 권유해보는 것도 고려할 법하다. 캠프 데이비드 회담이 상징하듯, 두 정상은 공식적인 의제 이외에도 여러 가지 현안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이 대통령이 부시의 개인적인 호불호를 떠나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는 것이 '임기 내 북핵 해결'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는데 얼마나 효과적인 방식인가를 설득한다면, 얼굴 붉히는 일 없이 한국은 훌륭한 중재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대통령은 이번 정상회담에서 북핵 및 한반도 평화체제 문제에 핵심 의제로 다뤄야 한다. 오늘날 양국이 공유할 수 있는 공동의 가치와 이익 가운데 이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한국의 경제살리기를 위해서도 부시의 업적을 고려하더라도 그렇다. 공연히 국내의 반발을 야기할 수 있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이나 한미 '전략동맹' 추진보다 이 대통령 스스로 그토록 강조해온 '북핵'에 집중해야 할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태그:#한미정상회담, #이명박, #부시, #싱가포르회담, #북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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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네트워크 대표와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의 관심 분야는 북한, 평화, 통일, 군축, 북한인권, 비핵화와 평화체제, 국제문제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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