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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말이 있다.

 

"민주주의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다.  선거날에만."

 

정치인들이 국민을 대신해서 나라를 다스린다는 '대의제'의 한계를 풍자한 말이다. 표를 얻는 날에만 국민 대접을 해 주고, 당선된 다음에는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나라를 좌지우지 하는 정치인들때문에 생긴 말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형 민주주의'에서는 이야기가 한 발 더 나아간다.

 

"민주주의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다. 기표소 안에서만, 그리고 입을 다무는 한."

 

 

미국인 친구에게 한국 선거법을 이야기하다가 실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 친구에게 인터넷에 '선거 결과에 영향을 줄 의도로' 글을 올리면 감옥에 갈 수도 있다는 말을 해 주었기 때문이다. 친구는 이렇게 물었다. 

 

"'선거 결과에 영향을 줄 의도'가 아니면 글을 왜 올려?"

 

그 친구는 아직도 내 말을 믿지 않는다. 그 친구의 상식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이기 때문이다.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구속이라도 되어야 할 판이다.

 

일기예보는 선거운동 아닌가?

 

대운하 반대운동이 선거운동에 해당한다는 선관위의 해석은 놀랍다 못해 희극적이다. 그렇다면 선거 전 일기예보도 금지해야 한다. 날씨가 투표율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 혹시나 일기예보가 맞지 않는 경우는 '허위사실을 유포'한 데 대해 철퇴를 내려야 할까?

 

어쨌든 우리는 스스로 뽑은 국회의원들 덕에 이런 나라에 살게 되었다.  이제 신문에 칼럼 하나를 쓰려면 법조항부터 살펴야 한다. 최근 개정된 공직선거법을 찾아 인쇄해 보니 150페이지가 넘는다. 이걸 다 읽고 글을 쓰면 대략 차기 총선쯤 글이 나올 것 같다.  

 

이 답답한 심정은 글로는 잘 표현되지 않는다. 오히려 시각적 이미지가 더 효과적일 것이다. 이 상황을 그림으로 표현하면 이쯤 될 것이다.

 

'빨강모자소녀'가 늑대와 대면하고 있다. 뒤에는 상황을 모르는 할머니가 서 있다. 소녀는 할머니에게 무슨 말을 해 주려고 하지만 늑대가 소녀 입을 막으며 말한다. (여기서 사냥꾼 역을 맡은 경찰은 늑대 편으로 등장한다.)

 

"입 닥치고 투표나 하셔."

 

 

그동안의 조롱, 표로 완성하자

 

우리는 지난 두 달간 이명박 정부의 실정을 열심히 비판하고 조롱했다. 그 가운데 '어륀지'를 머리에 쓴 전 인수위원장도 등장했고, '운하철도 999'와 '삽질 쥐'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재기발랄함도 표를 통한 심판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비판적인 국민여론과 상관 없이 전국의 많은 학교들이 사실상 몰입교육을 시작했고, 운하계획 역시 수면 아래에서 차근히 진행되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사실 정치권이 두려워하는 것은 이런 재기발랄한 조롱이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더 낡은 방식, 즉 기표소에서 투표행위를 통해 조롱을 완성하는 것을 더 두려워한다.

 

한국의 선거가 따분하고 재미없는 것은 사실이다. 자신의 정치적 견해도 마음대로 표현하지 못한 상태에서 투표장에 밋밋하게 서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자면, 무슨 70년대 콜레라 예방주사라도 맞기 위해 서 있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앞으로 정치판이나 선거판이 좀 재미있으려면 당신처럼 '쿨'한 사람도 한 두 시간 고문 같은 지루함을 참아내야 한다. 안 그러면 평생 이렇게 재미없는 선거를 치러야 할 테니까.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투표하는 사람에게 전국 국공립 유료시설에 사용할 수 있는 2000원짜리 할인권을 준다. 정부가 국민들에게 해 준 게 많지 않으니, 이런 거라도  제대로 챙기도록 하자. 

 

이번 총선은 대선보다 중요하다

 

 

한국과 미국의 발전상을 비교분석하는 학자들이 자주 쓰던 말이 있다. "한국은 민주화, 미국은 양극화"라는 말이다. 그러나 더 이상 사실이 아니다. 국민들의 입을 막는 제도의 도입이 말해주듯 '민주화'는 이미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고, 양극화는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니게 되었다.

 

이번 총선은 이명박 대통령이 추진하는 친 기득권 정책의 원동력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대선보다 훨씬 중요하다. 이명박 대통령직인수위 방침이었던 '건강보험 당연지정제 폐지'만해도 그렇다. 마이클 무어의 <식코>를 본 사람이라면, 미국이 결코 서민의 낙원이 아님을 알 것이다. 또 내가 몸담은 미국 대학교의 한 학기 등록금은 1500만원에 달한다. 이것은 주립대의 이야기고, 사립대는 이에 비해 50퍼센트 이상 더 비싸다. 주립대는 주내 거주인들에게 할인 혜택을 주지만, 사립대는 그런 것도 없다.

 

위의 금액은 순수한 등록금이고, 여기에 교재비나 주거비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보험료를 보자. 학생들이 들어야 하는 보험료는 3인 가족 기준으로 일 년에 700만원이 넘는다. 여기에 치과보험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처럼 비싼 보험료로 인해 미국에는 무보험자가 수두룩하다. 매년 2만 명이 보험이 없어 죽어가고, 5천만 명이 그 대열에 서서 살얼음판 같은 삶을 산다. 마이클 무어가 <식코>에서 말하듯, 이들의 유일한 대비책은 '사고 나지 않고 병에 걸리지 않도록 신에게 기도하는 것 뿐'이다. ('신앙이 최고의 복지정책'이라는 한국 김성이 복지부장관의 정책과 정확히 일치한다. 비록 그가 미국 국적의 딸에게 한국의 의료보험 혜택을 주는 나약한 믿음을 보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현재 미국을 괴롭히는 문제는 현 정부가 추구하는 '의료민영화'와 '등록금 자율화'의 결과를 예고한다. 그나마 미국인들은 선거 때 말이나 편하게 할 수 있다. 우리는 도대체 뭔가? 정부는 양극화와 민영화로 악명 높은 미국도 상상하지 못할 친재벌(정부 용어로 '비지니스 프렌들리') 정책을 추진할 계획이다. 신문-방송 겸영과 금산분리제 폐지는 그 중 일부일 뿐이다.

 

'쿨한' 기권이 의사표현이라고?

 

기권이 '쿨'한 의사표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선거 결과에 대해서도 불평하지 말고 '쿨'하게 살 각오를 해야 한다.

 

비정규직, 학력차별, 1000만원에 육박하는 등록금, 돈이 없어 죽어갈 동료들, 이를 무시하고 놀러가는 게 자랑스러운 일일 수 없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문제도 아니고, 투표에 가장 무관심한 것으로 알려진 20대를 가장 괴롭힐 문제들이다.

 

앞으로 5년간 "나는 찍지 않았'읍'니다"라고 말하며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조금만 지루함을 참으면 오늘 이후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번에는 제대로 찍었'읍'니다."

 

 


태그:#총선, #양극화, #민영화, #의료민영화, #선거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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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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