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도무지 답이 없다. 사실 선거에 관련된 정치 영화를 소개코자 했다. 하지만 세상이 어디 그러 한가, 현실이 영화를 뛰어넘는 초현실주의의 시대 아닌가. 안 그래도 정치혐오증에 걸린 이들이 한둘이 아닌데, 정치 영화를 보다가는 투표소로 가는 이들의 발길을 끊어 버리기에 안성맞춤이다 싶었다. 

시골 보이스카웃 단장이 워싱턴 정가에 진출한다는 내용의 고전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는 철지난 감동 연설극으로 비춰질 가능성이 크고, 2년 전 작고한 로버트 알트만 감독의 <밥 로버츠>는 국회의원들을 모두 협잡꾼 모리배로 보이게 한다. 청량리 성매매 여성이 총선에 승리한다는 내용의 우리 영화 <대한민국 헌법 1조>는 그 만듦새가 꼭 우리 정치판처럼 허접하고, 미 고등학교 회장 선거를 배경으로 한 <일렉션>은 선거와 투표 행위 자체를 약육강식과도 같은 세상에 대한 알레고리로 만들어 놓았다.

예술과 정치가 원래부터 평행선을 달리기 마련이라지만, 4월 9일 투표일까지 정치 영화는 되도록 보지 말 것을 권한다. 젊은 세대의 투표율이 관건인 시대니 만큼 정치영화 대신 차라리 다큐멘터리 <식코>를 권한다.

그래서 영화 대신 각 당의 총선용 홍보영상물을 둘러봤다. 기존 정당의 정책과 반하는 이미지로 승부하고,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놓는 영상물들도 보인다. 보수정당과 진보정당의 표현 전략이 비슷한 것도 흥미롭다. 모든 영상을 보는 데 30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홍보 영상을 보면 그 당의 이데올로기가 보인다.

먼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친절하게 정당정책 비교프로그램을 마련해 놨더라.  '정당별 입장보기'에 이름을 올린 정당은 모두 6개. 통합민주당·한나라당·자유선진당·민주노동당·창조한국당·친박연대, 그리고 그외 진보신당의 홈페이지에 들러 각 홍보 동영상을 찾아봤다.

[한나라당] 다시 시장에 간 그들, 간략한 보수화 전략

한나라당 홍보 영상물 고등어 편
 한나라당 홍보 영상물 고등어 편
ⓒ 한나라당

관련사진보기


먼저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국밥 영상으로 짭짤한 재미를 봤던 한나라당의 키워드는 '경제'와 '서민'이다.

"한나라당이 서민의 장바구니를 든든히 채워내겠습니다"라는 '고등어' 편은 시장에서 고등어를 사러 장에 간 주부의 사연이다. 대통령에 이어 어김없이 재래시장을 찾았다. 대통령이나 우아해 보이는 그 주부가 일상에서 재래시장을 얼마나 이용할지는 의문이지만.

고등어 한 마리밖에 살 돈이 없다는 주부에게 <라디오 스타>에서 고스톱을 치던 단역 배우 할머니는 실랑이 끝에 3000원에 한 마리, 그리고 덤으로 한 마리를 더 안긴다. "서민에겐 고등어가 경제입니다, 경제부터 살려내겠습니다"라는 여성 성우의 목소리가 짠하다.

짝패인 '남편의 노래'와 '아내의 노래'는 각기 삶에 찌든 배우자에게 노래 한 자락을 불러주는 부부의 이야기다. 작아져 버린 아이들 옷 때문에 걱정하는 부인, 퇴근 후 피곤해 하는 남편을 걱정하며 "서민의 웃음을 되살리겠다"는 다짐을 하는 CF다.

한나라당 3종 세트는 박근혜를 내세워 "진정으로 거듭나겠습니다, 한 번 더 기회를 주십시오"라고 읍소했던 지난 총선과 이명박 후보가 욕쟁이 할머니의 국밥을 말아먹던 지난 대선 영상의 중간 지점을 택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화두인 '경제'에 집중하면서 '서민'을 주인공으로 삼았는데, 의도적으로 조명을 무척이나 어둡게 해서 찍었고 성우의 내레이션은 무척이나 가라앉아 있다.

정권을 잡았으니 특정 정치인을 내세우지 않을 만큼 자신감이 붙었다는 건 알겠는데, 이 60초 짜리 이야기식 공익광고 콘셉트는 잔뜩 찌푸린 서민경제를 반영하는 듯 하다. 비관주의를 퍼트려 유권자를 보수화시키는 전략인 셈이다.

하지만 비관적 정조로 승부하는 이 영상에는 어떠한 비전이나 정책도 없다. 그저 오매불망 '경제'란 화두에 매달리는 척 하면서 서민들을 인질로 삼는다. 이렇게 먹고 살기 힘든데 개혁, 정치적 이슈가 무슨 필요냐고 항변하는 이 무시무시한 보수 이데올로기. 흑백에 가까운 이 화면들을 마주하면 기이하게도 마음이 편안해 짐을 느낄 것이다. 한마디로 편집의 승리요, 보수정당답다.

☞ 한나라당 홍보영상

[통합민주당] 할 말은 많은데 힘은 없다

강금실 선대위원장을 메인에 내세운 통합민주당 홈페이지
 강금실 선대위원장을 메인에 내세운 통합민주당 홈페이지
ⓒ 통합민주당 홈페이지 캡쳐화면

관련사진보기


통합민주당의 홍보영상은 가장 할 말이 많아 보인다. 4분 45초 동안 고소영·강부자 내각의 한달 반가량의 실정, 열린우리당 시절의 실정, 그리고 이명박 정부에 대한 견제까지를 모두 담고 있다. <반지의 제왕>이 괜히 긴 것이 아니다. 보여줄 게 많으니 당연히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통합민주당이 가장 확실히 자각하고 있는 건 자신들이 야당이라는 사실이다. 그것도 국회 과반수는커녕 개헌저지선 확보조차 불확실한, 벼랑 끝에 매달린 야당. 영어몰입교육이나 대운하와 같은 한나라당의 '닭짓'에 대한 반대로 시작해 자기반성을 거쳐, 지지를 호소하는 이 홍보 영상은 그러나 감동도 진실함도 없어 보인다.

한나라당의 2분짜리 정책 동영상에 비해 통합민주당의 영상은 힘이 없다. 주연이 지난 총선만 해도 한나라당에서 활약했던 손학규 대표라서가 아니다. 자기성찰과 여당 비판, 확연히 다른 두 장르 사이에서 길을 잃었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이 경제 살리기란 허황된 구호를 외치고 있다"고 일갈하지만 "중산층과 서민의 정당"이라 자임하는 그들도 내세울 건 반대밖에 없어 보인다. "국민이 민주개혁세력에 등을 돌린 이유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지만 국민의 뜻은 잘 모르는 것 같다. 전통적인 편집과 음악이지만 자기 비전이 없으니 중심 스토리가 부재해 보인다.

스타가 없는 걸까? 유시민도 없고, 정몽준에 밀리는 정동영도 약발이 떨어지고, 손학규와 박상천으로는 부족해 보이는 게 분명하다. 강금실 선대위원장의 목소리를 1인칭 자막으로 담고, 양희은의 <상록수>를 배경음악으로 깔은 이 홍보영상이야말로 현 통합민주당의 안쓰러운 처지를 그대로 반영하는 자기 성찰의 극치다.

☞ 통합민주당 홍보영상

[민주노동당] 영상은 감동적인데... 지난 5년간 뭐했지?

50~60대 유권자를 노리는 정당답게 홍보영상 하나 없는 자유선진당을 지나쳐 민주노동당 홈페이지에 가보니, 3개의 영상이 대문을 차지하고 있다. '마징가 Z'를 닮은 민노맨을 내세운 플래시 애니메이션이 눈에 띈다. '노동자 서민의 대표정당'을 표방한 이 동영상은 별다른 특색이 없다. 전국 정당의 홍보동영상이라고 하기엔 너무 '없어 보인다'고 할까.

그러나 환경미화원 홍기덕 비례대표 후보와 농민 문경식 비례대표 후보의 클로즈업과 일하는 모습을 담은 2번째 영상은 짧지만 강력한 정서를 환기시킨다. 별다른 배경 음악 없이 '노동자'와 '농민'을 대변하고 있음을 호소하는 이 영상은 다큐멘터리가 줄 수 있는 감동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선천성 면역결핍증 환자인 10살 원경이와 엄마를 주인공으로 삼은 '인간극장'류의 영상 또한 60초만으로도 가슴을 먹먹하게 할 정도다.

종북주의 논쟁에 시달린 정당이라 믿을 수 없을 만큼 '노동자' '서민'에 포커스를 잘 맞췄다. 플래시 애니메이션 하나로 일관했던 지난 총선에 비교한다면 진일보 그 자체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이 싸워야 할 적은 역시나 내부가 아닐까? 여전히 노동자, 서민의 정당이지만 지난 5년간 진정 그리했냐고 반문한다면 그들은 무어라 대답할 수 있을까.

☞ 민주노동당 홍보영상

[진보신당] 영화인들이 지지해서 그런가? 편집이 좋네

각본을 놓고 봤을 때, 그리고 형식으로 봤을 때 그나마 짜임새 있는 영상은 아무래도 진보신당의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아닙니다'는 메시지는 '종북주의' 뉴스 보도와 맞물려 선명하게 다가온다.

노회찬·심상정이란 스타를 내세우는 동시에 비례대표 박영희·이남신 후보를 내세운 것도, '4월 9일 진보가 새로워집니다, 민생이 바뀝니다'는 슬로건 아래 13번을 강조한 것도 나름 효과적이다. 영화인들이 지지하는 정당인만큼 편집 감각이 돋보인다.

진보신당 홍보영상

진보신당 홈페이지에 게재돼 있는 홍보 영상물.
 진보신당 홈페이지에 게재돼 있는 홍보 영상물.
ⓒ 진보신당홈페이지

관련사진보기


[창조한국당] 문국현당 이미지... 이게 연출 의도야?

창조한국당은 지난 총선 민주노동당의 전철을 밟고 있다. 그 중 창조한국당에 1억원을 기부했다는 할머니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플래시 애니메이션이 눈에 띄는데 "니들이 살기 좋은 세상이 와야 할 텐데. 난 니들한테 믿음을 산 겨"라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내용의 전부다. 그 믿음이 무엇인지, 또 지난 대선을 거치며 그 믿음이 남아 있는지도 사실 의문이다. 결정적으로 창조한국당 영상은 '문국현당'이라는 당의 이미지를 쇄신하기에 역부족으로 보인다. 물론 그것이 의도한 결과라면 할 말 없지만.

☞ 창조한국당 홍보영상

[친박연대] 아... 이건 패러디다, 코미디다

최고의 압권은 친박연대다. 박근혜의 연설과 치적을 담은 영상 위로 "결국 저는 속았습니다, 국민도 속았습니다, 권력이 모든 것을 정당화 할 수는 없습니다, 정의를 이길 수는 없습니다"라는 박근혜의 목소리가 들려오면 이건 차라리 하나의 패러디자 코미디다.

"원칙과 정의가 무너졌습니다"라면서 '박근혜'만이 그들의 원칙이요, 정의라는 데 이르러서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친박연대 홍보영상

기권은 18대 총선의 '공공의 적'

이제 'D-2'다. 어떤 정당은 자신들의 색깔을 공고히 하고, 어떤 정당은 그 흔한 홍보영상 하나 없다. 또한 이 영상들이 얼마나 선거에 영향을 미칠지 장담할 순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짧은 영상들을 분석해 보면 각 정당의 색깔과 이념만큼은 분명하다는 점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 정치와 관련된 영화들은 이틀 동안 잠시 끊으시라. 그리고 열심히 뉴스도 보고, 각 정당의 정책도 비교 해 보시라(물론 정책으로 승부하는 선거가 아니란 건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그리고 나서 9일 투표소로 향하시라. 볼 만한, 희망적인 정치영화를 만들게 하는 힘, 영화보다 더한 현실을 '현실적으로' 만드는 건 모두 유권자의 힘에 달려 있다. 기권은 18대 총선의 '공공의 적'이다.


태그:#총선, #홍보동영상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