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존재의 외로움 속으로 그냥 걸었어
 
1995년인가. '그냥 걸었어'란 노래가 유행했던 것 같다. 이 화사한 달맞이 언덕의 벚꽃길은 누구라도 '그냥 걷게 되는 길'이다.
 
돌아가신 외할머니께서도 벚꽃 나들이를 참 좋아하셨다. 외할머니가 화사한 분홍빛 한복을 입고 고궁으로 벚꽃 구경을 가시면, 나도 따라 나서곤 했다. 그때마다 하신 할머니 말씀이 정말 인상적이라 뇌리에서 잘 지워지지 않는다. 
 
"얘야, 난 꽃 구경보다 사람 구경이 정말 좋구나."
 
너무 어려서일까. 그때는 그 말씀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꽃 구경 나오셨는데, 팔짱 끼고 걷는 젊은 연인들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할머니. 그때 외할머니는 북에서 젊은 외할아버지와 팔짱 끼고 걷던 아름다운 연애 시절을 생각하시지 않았을까 싶다.
 
나이든 사람도 벚꽃 구경을 좋아하지만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도 벚꽃길을 좋아한다. 아니 모두모두 꿈결 같이 아름다운 벚꽃길을 좋아한다. 4월은 목련의 계절이라고 하지만, 벚꽃의 계절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시처럼 그림처럼 풍경처럼 걷는다
 
대한팔경의 해운대의 '달맞이 길'은 시처럼 그림처럼 풍경처럼 아름다운 길이다. 봄이면 벚꽃나무 숲 사이로 푸른 바다가 청춘의 빛깔처럼 푸르게 흐른다. 80, 90년대만 해도 젊은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가장 인기가 좋았다. 물론 지금도 많은 연인들이 찾아오지만, 이곳 음식점과 찻집 주인들은 옛날만큼은 못하다고 한결 같이 말한다. 
 
하지만 여전히 이곳은 낭만과 꿈, 시와 바다의 노래가 넘실거리는 청춘의 공간이다. 낭만과 바다를 찾아오는 나그네에게 위안을 주는 장소다. 돈이 없는 가난한 연인들도 자판기 커피만으로도 낭만을 즐길 수 있다. 여유 있는 나그네라면 전망이 좋은 레스토랑이나 찻집에 앉아 봄바다에 떠있는 멸치 배와 각종의 어선들을 액자 속 그림처럼 구경할 수 있다.
 
 
'벚꽃 기차여행' '벚꽃놀이' '벚꽃제' '벚꽃 나들이' 등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모두 '사람 구경'이다. 벚꽃길을 걷는 재미는 사람의 물결에 묻혀서 그냥 등이 떠밀려서 걷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왁자지껄한 군중과 함께 하는 벚꽃 구경, 외할머니 말씀처럼 그게 진짜 벚꽃구경일 테다. 평일이라 그럴까. 달맞이 벚꽃길은 의외로 한적하다.
 
 
달맞이 벚꽃길을 걷는 연인들은 전설처럼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
 
'달맞이 길'이 있는 산은 와우산이다. 이 산에는 사랑하는 연인의 전설이 깃들어 있다. 
 
소가 누운 형상이라 해서 이름지어진 와우산으로 먼 옛날 한 청년이 사냥을 자주 나왔다. 마침 나물을 캐던 아리따운 아가씨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그만 청년이 반하고 말았다. "혹시 지나가는 동물을 보지 못했습니까?"하고 물으니 아가씨는 보지 못했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나물을 캐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아가씨 뒤를 소 한마리가 자꾸 따라왔다. 어쩔 수 없이 아가씨는 소를 끌고 나갔다가 다음날 그 자리로 다시 몰고 나갔다. 그랬더니 소는 사라지고 청년이 나타나서 사랑을 고백한다. 두 사람은 내년 정월 대보름날 만나자고 약속했고, 과연 이듬해 다시 만나 두 사람의 사랑을 이루어졌다고 한다.
 
전설 때문일까. 이 달맞이길을 걷는 연인들은 그 사랑은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다. 반대로 쌍계사 십리 벚꽃길을 걸으면 헤어진다는 말이 있다. 굽이굽이 15도로 이어지는 이 벚꽃길은 정녕 축복 받은 길인 셈이다.
 
 
완전히 완성할 수 없지만, 영원한 사랑의 꽃길
 
하늘하늘 지면서도 피는 벚꽃은 생멸(生滅)의 상징이다. 벚꽃은 해마다 피고 지지만, 나이 많은 부모님이나 노인들에게는 어느 시인의 시처럼 "내년에 이 벚꽃을 다시 볼 수 있을까?"하고 묻게 되는 것이다. 청춘이 짧아서 아름답듯이, 벚꽃 또한 짧게 피어나 아름답다.
 
나무에 움이 튼 자리마다
햇빛과 바람과 수분이
목적도 하나로 쏠려
생명의 신비 근처에까지 와서는
용하게 만나 서로 반갑다고
눈물 글썽이는 것을 느끼노니.
- <잎이 겪는 봄, 여름>, 박재삼

태그:#벚꽃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마음이 곧 인간이다고 한다. 지식은 곧 마음이라고 한다. 인간의 모두는 이러한 마음에 따라 그 지성이 나타난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