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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얼울려 더 고운 안개 속의 유채밭
▲ 뤄핑의 유채꽃 산과 얼울려 더 고운 안개 속의 유채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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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노란 벌판 위를 뒹굴고 싶다.
▲ 뤄핑의 유채꽃 저 노란 벌판 위를 뒹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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뤄핑(羅平)은 운남을 처음 찾았을 때부터 꼭 가보고 싶던 곳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유채꽃 밭 사진을 어느 잡지에서 얼핏 본 이후, 그 풍경이 내 마음에 새긴 듯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 속의 길은 늘 현실의 길이 되지 못했다. 운남을 찾는 여행자들이 제일 먼저 발 딛는 곳인 따리와 리지앙을, 혹은 징홍이나 더친을 가느라 일반적인 여행지와 동떨어져 있는 뤄핑은 늘 뒤로 밀리기 일쑤였다.

처음 뤄핑을 꿈꿨을 때, 나는 운남의 곳곳을 단 한 번에 다 돌아볼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생각이 얼마나 허황된 것이었는지, 두어 군데의 여행지만 둘러보아도 빠듯한 내 일정은 끝난다는 것을, 운남에 가보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만큼 운남은 넓고 큰 땅이었다.

유채꽃밭에 대한 그리움은 그저 따리나 리지앙의 교외에서 스치듯 만나는 손바닥만한 밭들에서 달랠 수밖에 없었다. 그리움도 마음에 오래 담아두면 병이 되는 법일까? 누지앙 여행을 계획하면서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여행의 마지막 일정에 뤄핑을 가겠다는 결심을 했다. 이번 여행에서조차 뤄핑을 가지 못한다면 어쩌면 영영 가지 못할 것 같은 조바심이 들어서였다. 누지앙의 눈 속에 갇혀 그렇게 조바심을 쳤던 것도 마음 한 구석에 뤄핑에 대한 그리움이 남아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봄과 겨울이 함께 있는 길

아침 9시에 쿤밍을 출발한 차는 석림(石林) 가는 방향을 따라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를 거침없이 달린다. 하늘은 눈부시게 파랗다. 따리, 누지앙의 추위와 폭설이 남의 나라 일 같을 정도다. 석림을 지나자 길 가로 나무들이 푸른 잎을 햇살에 반짝이고 있다. 개나리꽃이 노랗게 핀 길을 지나니 아득하게 펼쳐진 평원이다. 봄 농사를 준비하는지, 밭에서 괭이질을 하는 사람들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저 사래 긴 밭을 언제 다 갈아 고랑을 만들까 하는 걱정조차 따스한 햇살 아래 스르르 녹아 없어지는 것 같다.

눈 간 데 끝까지 밭이 펼쳐지고, 밭 위로 둥글게 하늘이 휘어져 있다. 하늘과 땅의 만남이 시야 끝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하늘 위에는 흰 구름이 몇 점 느긋하다. 푸른 하늘과 흰 구름, 끝없는 지평선이 이곳이 구름의 남쪽 땅 운남임을 증명하는 것 같다.

길 가 군데군데 벚꽃도 피어있고, 유채꽃이 노랗게 얼굴을 내밀고 있는 밭도 드문드문 보인다. 유채꽃을 보자 벌써 뤄핑에 다 온 것처럼 마음이 설렌다.

한동안 달리던 차가 샤오링(召令) 톨게이트 근처 휴게소에 멈춘다. 휴게소라고 해야 주유소 하나에 화장실만 있는 곳이다. 화장실에 갔다가 나오는데, 사람들 몇이 우리 차 옆에 선 승용차에 매달려 있다. 승용차에서는 물이 새고 있다. 차 주인인 청년은 물을 받아다 냉각수 통에 넣으며 걱정이 태산이다.

“아직 2천 km는 더 가야 하는데….”

쿤밍에서 출발한 그들 일행의 목적지는 푸젠성(福建省)이란다. 설을 쇠러 고향에 가는 길이라는 청년의 얼굴에는 걱정보다 그리움이 가득하다. 아직 일주일이나 남은 설을 쇠러 벌써 길을 떠나야 할 만큼 중국 땅이 넓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청년은 우리에게 손을 흔들고는 시동을 걸고 다시 달려간다. 차 뒷자리에 고향 친척들에게 줄 것인지, 선물이 가득하다.

우리도 다시 출발한다. 여전히 길은 따사롭다. 간간이 소나 마차가 고속도로를 막고 있다. 차는 짐승의 무리들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달린다. 가축들의 느린 속도와 자동차의 빠른 속도가 공존하는 도로에는 햇살이 가득하다.

유채꽃이 일구어내는 부드러움
▲ 뤄핑의 유채꽃 유채꽃이 일구어내는 부드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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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조금씩 높아진다. 햇살이 따뜻하던 평평한 길이 점점 산길로 바뀐다. 안개와 구름이 짙어지기 시작한다. 운무 속에 유채꽃이 곱게 피어있는 비탈 밭도 있다. 점점 뤄핑이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밭에는 푸른 작물들이 안개 속에 자라고 있다. 길은 갈수록 점점 안개로 채워진다. 차창으로 파고드는 바람도 꽤 차다. 봄에서 겨울로 순간 이동을 한 것 같다.

고속도로를 벗어난 차가 안개 속 흐릿하게 보이는 유채꽃밭을 지난다. 길가로 온통 유채꽃이 지천이다. 눈 가는 끝까지 유채 밭이다. 그런데 꽃이 아직 만개하지는 않았다. 이제 피기 시작하는 중인가보다.

차가 천천히 뤄핑 시내로 들어선다. 시내도 온통 안개다. 차에서 내리니 온 몸이 안개에 축축하게 젖는다. 다락 논이 있는 웬양의 안개도 대단하더니, 뤄핑의 안개 또한 못지않다. 몸으로 파고드는 공기 역시 차다. 온 몸이 으스스 떨린다. 시내에는 관광객이 하나도 없다. 아직 유채꽃이 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유채꽃이 활짝 피는 춘절 무렵이면 방을 구할 수 없을 정도로 관광객이 밀려든다는 뤄핑은 아직은 안개만이 주인처럼 도시를 감싸고 있을 뿐이다.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물줄기, 구룡폭포

늦은 점심을 먹고 뤄핑 시내를 벗어나 구룡폭포를 찾는다. 작은 시내라 몇 분 지나지 않아 길은 유채꽃밭 속에 포위된다. 뤄핑에서는 어디를 가든지 유채꽃에 묻힌다. 두리번거리면 왼쪽도 오른쪽도 앞도 뒤도 다 유채꽃이다. 길은 그 유채꽃 속으로 나 있다.

한때 뤄핑은 남조국의 석성군(石城郡)에 속했었고, 대리국이 세워진 뒤에는 대리국 석성이기도 했다. 석성은 돌로 만든 성이라는 뜻인데, 그러나 뤄핑에는 돌보다 유채꽃이 많다. 유채꽃으로 이루어진 성인 유채성(油菜城)이라는 말이 더 맞을 것 같다.

안개 자욱한 뤄핑 시내. 안개는 도시와 사람을 칭칭 휘어감는다.
▲ 뤄핑 안개 자욱한 뤄핑 시내. 안개는 도시와 사람을 칭칭 휘어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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뤄핑에서 구룡폭포까지 약 32km를 가는 내내 사방이 안개와 유채꽃이다. 빗방울처럼 유리창에 안개가 부딪친다. 흐릿한 안개 저편으로는 노란 유채꽃이 피어있다. 그 풍경이 꿈과 같다. 안개가 걷히고 햇살이 나면 몽환적인 저 유채꽃의 풍경이 현실로 보일까? 나는 꿈과 현실의 어디쯤을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유채꽃 길을 뒤로하고 도착한 곳이 구룡폭포, 아홉 마리 용이 솟구치는 것 같아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일까? 매표소에서 대나무 숲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 올라가니 케이블카 타는 곳이다. 빨갛고 귀엽게 생긴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 내리는 곳이 바로 전망대다. 구룡폭포 아래쪽 마을과 숲과 강물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은 경치다.

산 비탈길을 따라 조금 걸으니 발아래 거대한 폭포가 몸을 내던지고 있다. 신룡폭포(神龍瀑布)다. 낙차 56m,폭 112m의 장대한 물줄기가 쉴 새 없이 쏟아진다. 물소리에 귀가 먹먹하다. 이 폭포를 구룡제1폭포라고도 부른단다. 폭포의 물이 흘러가는 물줄기가 바로 구룡하(九龍河)다. 구룡하에 있는 여러 폭포들을 구룡폭포라고 부르는데, 그 중 가장 크고 우람한 것이 바로 이 신룡폭포다. 그저 한 줄기 물이 흘러내리는 폭포가 아니라 여러 개의 물줄기가 넓게 쏟아진다. 한여름 비가 오는 때는 저 넓은 절벽 가득 물이 쏟아진단다.

넓고 크고 긴 폭포. 아홉 마리의 용일까?
▲ 구룡폭포 넓고 크고 긴 폭포. 아홉 마리의 용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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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용틀임이 느껴지는 듯 하다.
▲ 구룡폭포 물의 용틀임이 느껴지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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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포수 뒤로 약 10m 정도 되는 동굴이 있고, 폭포 아래의 수심은 잴 수 없을 정도로 깊다는 구룡폭포를 뒤로하고 좀 더 오르니 정인폭포(情人瀑布)가 나온다. 낙차 43m에 폭 39m인 정인폭포는 신룡폭포보다 규모는 작지만 한데 모여 쏟아지는 물줄기가 대단하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폭포 물을 맞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뜻일까?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폭포를 찾아야 한다는 말일까? 정인 폭포라는 이름만으로도 사랑스럽다.

이 지역에 주로 살고 있는 소수민족인 푸이족(布衣族), 수이족(水族) 등의 젊은 처녀 총각들은 매년 음력 2월 2일이면 각각 민족의상을 입고 구룡폭포 근처에 모여든다. 그들은 서로 마음에 맞는 짝을 찾아 춤추고 노래를 부르는데, 청년들의 춤은 높이 뛰어올랐다 내려오며 발을 구르는 역동적인 것이라고 한다. 그들이 부르는 사랑의 노래가 폭포의 물소리와 어울려 하늘 끝까지 날아오를 정도란다.

구룡폭포군에는 저렇게 작고 귀여운 폭포도 있다.
▲ 구룡폭포 구룡폭포군에는 저렇게 작고 귀여운 폭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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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물 넘쳐 느릿느릿 흘러가네.
대나무 한 가지 그 물 따라 가네.
속 빈 대나무 물에 가라앉지 않네.
총각의 진실한 마음에 아가씨 떠나지 않네.
- 수이족(水族) 민요

아마 정인폭포가 그런 그들의 사랑을 뜻하는 것은 아닐까? 내 귓가에는 그들이 부르는 소수민족의 사랑 노래가 폭포 소리에 뒤섞여 들리는 것 같다.

말 그대로 사랑이 이루어지는 폭포일까?
▲ 정인폭포 말 그대로 사랑이 이루어지는 폭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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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평 산 위에는 휴대전화 첨탑이 높고

구룡폭포를 뒤로 하고 돌아오는 길에도 여전히 안개가 자욱하다. 안개는 아예 비처럼 차창에 흘러내린다. 안개 저편으로는 노란 유채꽃 밭이 촉촉이 젖어있다.

뤄핑에서 유채꽃밭을 보는 장소로 가장 널리 알려진 진지평(金鷄平)을 찾는 길은 녹록치 않다. 안개에 젖어 진지펑 마을 입구에 이르니, 차가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모여 있다. 작은 마을에 어디서 사람들이 이렇게 모여들었을까? 길 가로 노점이 길게 늘어서 있고, 온갖 물건들이 판매된다. 장날인가보다. 그 중 한 곳에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모여 밥을 먹고 있다. 결혼식 피로연쯤 되는 것 같다.

안개에 젖은 진지펑의 유채꽃밭
▲ 뤄핑의 유채꽃 안개에 젖은 진지펑의 유채꽃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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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인파를 뚫고 차가 지나갈 수 없어 그냥 내려 걷는다. 안개비에 길은 질퍽질퍽하다. 바지가랑이가 흙탕물에 다 젖는다. 그래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재미있다. 먹고 마시고, 물건을 사는 일상의 활력이 내게도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다.

그 인파를 뚫고 마을을 나서자 언덕 같은 산이 있다. 진지펑을 전망할 수 있는 곳이다. 미끄러운 길을 조심스레 디디며 올라가니 금방 정상이다. 산 정상에는 우람한 철탑이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 휴대전화 송신탑이다. 이렇게 전망하기 좋은 장소를 막고 송신탑을 세우다니.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관광객의 편의를 위해 이곳 사람들의 편리가 희생되어야 하나 하는 의문도 든다. 아름다움과 편리는 서로 공존할 수 없는 것일까? 그런 엉뚱한 생각이 드는 것은 바라보는 경치가 너무 아름답기 때문이다.

사방이 안개에 젖어 유채 밭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흐릿한 안개 속으로 첩첩 이어진 노란 유채 밭이 아득하게 펼쳐져 있다. 흐린 풍경이라 도무지 현실감이 들지 않는다. 몽환(夢幻)!

섬처럼 유채밭 사이에 떠있는 산들
▲ 뤄핑의 유채꽃 섬처럼 유채밭 사이에 떠있는 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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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통 유채 천지에 군데군데 섬처럼 산이 솟아있다. 그 산도 안개에 젖어있다. 유채의 바다에 떠있는 섬 같은 산이 흔들린다. 어쩌면 내 마음이 흔들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보고 있으면 저절로 나 자신이 유채꽃의 바다로 빨려드는 것 같다. 세상에서 가장 매혹적인 색깔이 바로 노란 색임을, 그것도 환한 노랑이 아니라 저렇게 안개에 싸인 희미한 노랑임을 새삼 깨닫는다.

사방을 둘러봐도 유채꽃이다. 봄의 상징인 유채꽃이지만, 이렇게 수많은 꽃송이들이 모여 있으니 계절조차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다. 일상의 땅을 떠나 유채꽃의 나라에 찾아온 이방의 나그네는 안개에 젖고 상념에 젖는다.

뤄핑은 아열대 기후 지역에 속한다. 연평균 기온이 15도 정도이고, 서리가 내리지 않는 날이 일 년 중 280일이나 된다. 여름철 평균 강우량은 1743mm로 운남에서 가장 비가 많이 오는 지역이다. 연평균 상대 습도 85%인 다우다습(多雨多濕)에 기후가 비교적 따뜻한 땅인 것이 유채를 기르기에 적당한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뤄핑이 중국 최대의 유채 산지로 자리 잡게 된 것이리라.

유채의 기름을 짜고, 남은 찌꺼기는 사료로 쓰니 버릴 것이 없는 식물인데, 거기에 장관의 풍경을 연출하여 관광 수입까지 얻게 되니 그야말로 일석이조 아니 일석삼조인 셈이다. 뤄핑의 유채 밭은 대략 30만m2 정도 된다니 어마어마한 크기다. 매년 3월이면 유채화절(油菜花節) 축제가 열리는데, 이 무렵이 유채꽃을 보기에 가장 적당한 때란다. 그러나 나처럼 일상의 일에 매여 있는 사람에게는 삼월 뤄핑 방문은 그림의 떡이다. 유채화절 무렵에도 아침이면 안개가 자욱한데, 해가 뜨면 안개가 걷히며 노란 유채의 바다가 펼쳐진다니, 그저 상상만 해도 그 장관에 눈앞에 그려지는 듯하다.

홀린 듯 안개에 젖은 유채 천지에 빠져 있다가 다시 마을로 내려오는데, 이제 철시를 시작한 장터 어느 가게에서 어린 아이 하나가 꺼이꺼이 울고 있다. 무슨 일 때문에 저리 울음 끝이 질긴지 모르겠지만, 나는 문득 저 아이의 질긴 울음 끝에 유채가 느릿느릿 꽃을 피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질긴 울음 뒤에 유채꽃처럼 환한 웃음을 배어 물 날이 아이에게 오듯이, 안개 걷히고 노란 웃음을 웃고 있을 유채꽃의 날을 상상해 보는 내 마음이 저절로 환해진다.

그날 밤, 나는 숙소 곁의 허름한 술집에 들러 취하도록 술을 마신다. 낮에 본 유채꽃의 환몽에서 아직 깨지 못한 마음이 나를 술집으로 이끈 것일까? 둥근 무쇠 불판 위에 유채 기름을 듬뿍 바르고, 호박과 부추, 어묵, 생선 따위를 구워 먹는 맛이 그만인 집이다. 유채꽃을 보고, 유채꽃 기름을 먹는 뤄핑의 밤이 안개에 젖어 깊어간다.

유채 기름으로 구워먹는 음식의 맛이 향긋하다
▲ 유채기름 전 유채 기름으로 구워먹는 음식의 맛이 향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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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우지에도 안개에 젖어   

아침에 일어나 창 밖을 보니 여전히 안개다. 오히려 어제보다 더 짙다. 환한 햇살 속에 빛나는 유채꽃을 기대했는데 오늘도 역시 불가능할 것 같다. 하긴 벌써 한 달째 이런 안개 자욱한 날씨가 계속되고 있다니, 내가 왔다고 갑자기 날씨가 좋아질 리가 없으리라.

이렇게 애 닳고 마음 졸이며 시간을 보내야 비로소 햇살에 빛나는 유채꽃이 피어나리라. 때가 되어야 꽃이 피고, 매운 겨울을 지나야 봄이 오는 것처럼, 세상 모든 것들이 ‘견딤의 세월’ 없이는 새로운 날을 맞이하지 못하는 법이다. 이 자욱한 안개의 시간이 지천의 유채꽃을 피우기 위한 견딤의 나날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의 위안이 조금은 되는 것 같다.

나무는 유채꽃 속에서 손님처럼 서 있다.
▲ 뤄핑의 유채꽃 나무는 유채꽃 속에서 손님처럼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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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채밭 너머에는 또 유채밭, 끝 간 데를 모를 뤄핑의 유채밭이 아득하다.
▲ 뤄핑의 유채꽃 유채밭 너머에는 또 유채밭, 끝 간 데를 모를 뤄핑의 유채밭이 아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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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식사 후 찾은 곳은 니우지에(牛街)다. 역시 장관의 유채꽃을 조망할 수 있는 언덕이지만, 안개가 시야를 가린다. 흐릿한 안개 속으로 다락논 층층이 유채꽃이 얼굴을 들고 있다.
좀 더 높은 언덕으로 올라가면 나을까 하고 산길을 오르는데, 안개비에 길이 미끄럽다. 진흙이 발에 척척 감긴다. 올라가봐야 안개 때문에 전망은 마찬가지일 것이 분명해 포기하고 다시 길을 내려온다. 내려오다가 보니, 여전히 안개 속에 노란 유채꽃이 파스텔 톤으로 곱다.

아쉬움이 남는다. 나는 안개 자욱한 유채 밭을 바라보며 머릿속으로 햇살 가득 내리쪼이는 풍경을 상상해 본다. 햇살은 노란 유채꽃에 자락자락 내려앉으리라. 노란 꽃 아래로는 파란 잎새들이 더 싱그러우리라. 벌 나비도 꽃 속에 숨어 꿀을 찾느라 정신이 없을 테다. 어디 세상에 없는 풍경이 햇살 고운 날에는 이곳에 펼쳐질 것이다. 그런 상상이 가능한 것만으로도 뤄핑의 유채 밭을 찾은 의미가 충분하다고 스스로를 위안 한다.

아쉬움과 몽환의 풍경을 동시에 간직한 채 뤄핑을 떠난다. 나오는 길, 동네 어귀에서 커다란 돼지를 잡아 털을 벗기고 있다. 어느 집에서는 종이꽃으로 만든 장식을 단 나무 세 개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무슨 일일까? 궁금증은 이방의 땅을 헤매는 나그네에게 고치지 못할 병이다.

차에서 내려 물어보니, 장례 준비를 하는 것이란다. 돼지를 손질하던 노인이 웃으며 설명을 해 준다. 상을 당한 집에는 저렇게 종이꽃 나무를 세 그루 세워야 한단다. 그 나무를 신삼수(神三樹)라고 하는데, 그 나무를 세워야 영혼이 저승으로 편히 갈 수 있다고 한다. 돼지 잡는 곁에서 아이들은 신이 나 뛰어다니고, 뜨거운 물이 김을 내며 끓고 있다. 저 아이들도 돼지 오줌보를 받아들고 공 대신 차며 놀까? 나는 문득 어린 시절 시골에 살던 때를 회상하며 그 아이들을 바라본다.

떠나는 우리에게 노인은 자꾸 밥을 먹고 가라고 붙잡는다. 시간 때문에 할아버지의 고마운 마음만 받고 서둘러 길을 떠난다. 머물지 못하고 떠날 수밖에 없는 것이 여행자의 운명이다. 아니, 어쩌면 세상을 사는 모든 사람들, 생명들의 운명이리라. 그 운명을 순순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삶이 아름다운 것 아닐까?

뤄핑을 떠나는데, 여전히 안개는 천지를 가득 채우고 있다. 고속도로 군데군데 살얼음이 얼어 통제되고 있다. 안개는 좀체 걷히지 않고, 길가로 서리에 제 몸을 얼린 채 나무들이 떨고 있다.

상고대 핀 나무들과 차를 막는 자욱한 안개는 뤄핑을 떠나는 내내 곁에 머물고 있다. 끝이 없을 것처럼 밀리는 안개와, 안개 속에 숨어 피고 있는 유채꽃이 떠나는 나를 전송하고 있다.

길은 점점 낮아진다. 길이 낮아지자 안개도 옅어진다. 유채꽃도 점점 보이지 않는다. 샤린(沙林)을 지나자 언제 그랬느냐 싶게 하늘이 푸르다. 다시 가 없는 지평선이 펼쳐지고, 그 끝에 하늘과 땅이 맞닿아 있다. 눈이 부시다. 눈부신 풍경이 낯설다. 뤄핑, 안개 자욱하고 유채꽃 곱던 곳이 꿈속의 풍경 같다.

인생을 한바탕 꿈이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장자(莊子)의 호접지몽(胡蝶之夢)처럼, 뤄핑이 내게는 꿈이었을까, 아니면 이 맑고 푸른 풍경이 꿈일까? 어쩌면 둘 다 꿈인지도 모른다. 안개 속에서는 푸른 하늘을 꿈꾸고, 푸른 하늘 아래서는 안개 낀 유채꽃의 풍경을 그리워하니 말이다. 이제 나는 일상의 지겨움과 나른함에 지칠 때마다, 꿈처럼 뤄핑의 안개와 유채꽃을 그리워하게 될지 모르리라.

아, 안개 짙어 유채꽃 더 고운 뤄핑이여!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제가 운영하는 카페 http://cafe.naver.com/borisogol.cafe 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그동안 제 여행기를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태그:#뤄핑, #중국, #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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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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