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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생에 오아시스가 존재한다면 그곳은 어디인지요 ? 제게는 세 곳의 오아시스가 있습니다. 그것은 길, 영화상영관, 영어상영관 입니다. 길은 떠나기 위해존재 하지요. 길 위에서 인간은 부딪치고, 화해하며, 깨닫고 성장합니다. 길 위에 설 때면 저는 막막한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여행자처럼 아득한 위안을 느낍니다. 영화에서 만나는 수많은 길. 그 길 위에 서 있는 아름다운 캐릭터들은 우리의 인생 지도를 채워주고, 불 밝혀 주는 위도와 경도 등대이지요.”   

<나의 영어는 영화관에서 시작됐다>는 산문집을 낸 외화번역가 이미도 씨의 책 프롤로그에 나오는 말이다. 영화관에서 수많은 영화를 보고 나서 엔딩 크레디트에 나오던 이름, 번역 이.미.도. 라는 이름을 수없이 봤던 기억이 난다. 외화번역가 이미도씨를 지난 3월 18일 스타벅스 역삼점에서 만났다.

이름이 여성적이어서 그랬을까? 이미도 라는 사람은 여자인 줄 알았는데 만나고보니 인생을 47년이나 살아온 떠꺼머리(?)총각이었다.

이날 만남은 책 읽는 스타벅스 ‘저자와의 대화’ 행사차원에서 마련된 자리였다. 스타벅스는 온-오프라인을 연계한 독서문화 활성화 캠페인의 일환으로 지난 2006년 1월부터 네이버와 공동으로 ‘저자와 만남’ 행사를 지속적으로 펼쳐왔다.

이날은 교육방송인 EBS와 기자 몇몇 사람과 독자들 등 약 30여명이 모인 단촐한 자리였다. 그는 관심을 갖고 마음에 드는 질문을 한 독자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나의 영어는 영화관에서 시작됐다>라는 산문집과 <영어로 영화보기(?)> 라는 책을 잔뜩 들고 와서 나눠 주기도 하였다.

이날 저자와의 대화는 독자들이 궁금증을 질문하면 저자가 이에 답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미도씨는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중간에 돌발퀴즈를 내고 이를 맞히는 사람에게 디저트와인을 선물하는 센스(?)도 보여줬다.

영어 실용서를 쓰다가 창작활동을 하게 됐다고 말하는 그는 앞서 영화리뷰를 썼는데 언론매체에서 잘 안 써 주더라며, 그래서 창작에의 갈증을 겪다가 책을 직접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내친김에 창작활동까지 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가 낸 산문집 <나의 영어는 영화관에서 시작됐다>에는 영화를 번역하면서 그가 겪었던 각종 에피소드와 번역가의 외로움과 어려움, 즐거움과 괴로움 등이 오롯이 담겨 있다. 지난 15년 동안 그가 번역해 온 영화는 극장용 영화만도 무려 450여 편. 영화가 좋아 영어에 미쳤고, 영어 때문에 영화번역가가 된 사연, 일반인이 잘 모르는 영화번역의 고단함과 이면사 등이 39개의 에피소드로 묶여있다.

그 책 내용을 읽어보니 영화 보면서 실감하지 못했던 사연들이 소개되어 있었다.

번역의 괴로움 번역의 즐거움

그는 번역자의 괴로움을 외줄타기에 비교한다. 자칫 헛디디면 오류의 비난을 듣는다는 것이다. 

"책 번역과는 다르죠. 영화는 자막의 한계와 대중성 추구 때문에 생략하고 쉽게 풀어써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속어나 욕설, 성적인 표현도 우리 정서에 맞게 둔갑시켜야 합니다.”

그의 산문집 <나의 영어는 영화관에서 시작됐다>에 번역의 괴로움과 즐거움에 대해 소개한 것들 중에서 번역자의 괴로움이나 어려움을 추려서 몇 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그가 번역한 영화 <벅스 라이프>는 시작부분에서 개미들이 줄지어 가을걷이를 하는데, 큰 나뭇잎이 떨어져서 길을 막자 주인공 개미가 호들갑을 떨고 있을 때 감독관이 달려와서 이렇게 달랜다. "It's nothing compared Twing 1993"  이 대사의 뜻은 '1993년에 일어난 나뭇가지 추락 사고와 비교해봐, 그에 비하면 (나뭇잎 추락 사고는 )아무 것도 아니야'라는 것.

미국인이라면 말뜻을 금방 알아듣겠지만 그런 식으로 직역하면 우리나라 관객은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다고. 이 대목에서 삼풍백화점 참사가 떠올라 마침 영화 속 계절이 가을이기에 이미도씨는 이런 분위기로 번역을 하였다고 한다.
“1993년 ‘단풍참사’ 도 잘 이겨 냈쟎니!”

미국영화 <뜨거운 오후>는 은행 강도의 인질극 내용으로 알파치노가 주연을 하고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한 영화였는데 이 영화의 원제는 'Dog day afternoon' 이었다. 그런데 이 영화가 국내에 처음 비디오로 소개될 때는 ‘개 같은 날의 오후’ 라는 제목을 달고 출시됐다는 것.

dog day의 사전적 정의는 'the hottest day of the year'라는 뜻으로 연중 가장 더운 삼복더위를 뜻한다고 한다. 그걸 간과하고 문자 뜻대로만 해석하여 제목을 지었던 것. 나중에야 제목의 원 뜻을 살려 ‘뜨거운 오후’ 로 바로 잡혔으니 다행이라고 그는 말한다.

욕 번역의 아슬아슬한 외줄타기

번역의 어려움 중에서 욕 번역의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도 털어놨다. 무명의 풋볼선수와 에이전트의 끈끈한 우정을 그린 영화 <제리 맥과이어>를 번역할 때의 에피소드는 그야말로 센세이션을 일으키기도 했단다.

제리(톰 크루즈)가 아이스하키 선수의 어린 아들을 위로한답시고 빈말을 늘어놓자 꼬마가 가운데 손가락을 홱 치켜들었다. 미국 관객들은 상상을 못할 상황이기 때문에 이 장면에서 그들은 분명 기겁을 했을 거라며, 이 분위기를 아우를 수 있는 번역문이 생각이 안 나 난감했었다고 한다.

게다가 순식간에 끝나버리는 대사이기에 그걸 '수정과에 띄운 잣 같은 녀석'이라거나 ‘수박처럼 씨 발라먹을 자식' 같이 기다랗게 표현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는데 <제리 맥과이어>의 기술 시사회 전날 번역자는 어쨌거나 과감하게 결정을 내려야 했다는 것.  

“ 'Fuck you' 라는 욕을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어린’ 꼬마가 쭉정이 같은 빈말만 늘어놓는 ‘어른’을 상대로 통쾌하게 일격을 가하는 상황에 딱 맞아 떨어질 번역이란 제 생각엔 하나밖에 없었으니까요. 영화가 최초로 공개되던 날, 저 역시도 기자들의 반응이 무척이나 궁금했기에 초긴장 상태로 영화를 보고 있었답니다. 그랬는데 ‘오 마이갓! 뽂~~~큐!' 라는 자막이 뜨자 시사회장이 터져나갈 정도로 폭발적인 반응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바닥을 발로 꽝꽝 차는 기자도 수두룩했고요. 그런 뜨거운 반응에 힘입어 저의 뽂~큐! 자막은 죽다가 살아난 번역자막이 됐답니다. 휴우! 십년 '감수'! ” 

이런 에피소드를 영화를 보는 관객이 얼마나 알아차릴 수 있을까? 번역자만이 외롭게 혼자앓는 고통임을. 이외에 미성년자가 관람할 수 없는 단어들이 나오기도 하는 데 단어의 뜻만 그대로 직역하면 일하기는 훨씬 쉽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될 경우 심의에서 통과되기가 힘들고 또 미성년자 관람불가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굿 월 헌팅> 같은 좋은 영화를 못 보게 될까봐서 등급심의에 문제가 될 만한 소지가 있는 설정과 대사를 순화하기도 한단다.

다시 말해 등급심의를 통과하기 위해 의도된 오역을 하게 되는데 예를 들면 영화 <굿 윌 헌팅>에 나오는 'blow job'이라는 대사도 그런 사례였다.

"그대로 번역하면 미성년자 관람 불가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쳤죠. '영감이 내 틀니까지 삼켰잖아요'라고."

그러나 인터넷에 왜 'blow job이 그렇게 번역됐느냐고 따지기도 하는 댓글들이 가끔씩은 올라오기도 한단다. 오역의 질타에 대해선 그는"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영어해석을 못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깊은 뜻(의도된 오역) 있는 줄은 나도 그를 만나고 그의 책을 읽고서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등급을 배려해서 하는 융통성 있는 번역은 영화를 제작하고 수출하는 국가에서도 존중하는 점이기도 하다는 것.

나를 일깨운 내 인생의 영화  <블루>, <제리 맥과이어>, <스탠드 바이미> 

그동안 번역한 영화 중에 제일 기억에 남는 영화가 무엇이냐고 묻자 애니메이션 영화인 <뮬란>이라고 말한다. 뮬란에 나오는 언어들이 바른 영어로서 번역하기도 좋았지만 좋은 영어를 배우기에도 적합한 영어였다고 한다. 이미도씨 자신을 일깨운 인생의 영화는 무엇이었냐는 질문에 그는 <블루>, <제리 맥과이어>, <스탠드 바이미>를 꼽았다.

이 세 편의 영화들은 모두 그의 인생의 성장과, 인생길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 이중에서 프랑스 영화인 <블루>(blue)는 그를 번역가의 길로 데뷔시켜 준 영화라고 했다. 영화 <블루>는 주인공인 줄리엣 비노쉬가 교통사고로 졸지에 가족을 다 잃고 자신을 어둠속에 가둔 채 서서히 죽음을 준비해가는 과정에서 푸른빛의 음악과 교감하면서 새로운 삶을 위한 길을 떠나게 된다는 줄거리다.

blue에는 ‘멍’이란 뜻도 들어 있는 데 사랑하는 가족을 모두 잃은 상실감 때문에 생긴 가슴속의 먹먹한 멍으로부터 푸른 자유로의 비상이 역설적이어서 좋아한다고 말한다.

톰 크루즈 주연의 <제리 맥과이어>. 약삭 빠른 처세법으로 성공에 길들여지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환멸을 느낀 제리가 일방통행식으로 고속성장만을 추구하는 회사에 겁도 없는(?) 제안서를 내고 결국은 해고되고 마는데 그가 낸 제안서는 '수입이 줄더라도, 고객수를 줄이더라도, 고객에게 더 많은 애정을!'이라는 뜻이었다.

외화번역가로 입문하자마자 넘치는 의욕과 일 욕심에 가속 페달을 밟을 무렵 마침 제리 맥과이어를 만났고, 제리 맥과이어의 가르침 처럼 번역 작품의 수를 줄여, 작품마다 더 많은 애정을 쏟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그는 <블루>와 <제리 맥과이어>가 번역가의 길을 가게 한 '내 인생의 영화'라면 <스탠드  바이미>는 영화 애호가로서 꼽은 작품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영화는 열 살 안팎의 소년 넷이 작고 외딴마을을 떠나 이틀 동안 겪는 모험을 그린 성장 드라마인데 집을 떠난 소년들이 시골의 흙먼지 길과 꼬불꼬불한 국도, 진흙탕길 등 수많은 길을 걷는데 우리 생의 여정이 평탄과 굴곡, 혼돈, 우회로로 뒤얽혀 있음을 상징하고 있다고 한다.

미도라는 이름이 아름다운 미(美), 길도(道)여서일까? 그는 특히 길에 대한 애정이 남 다른 것 같았다. 미도라는 이름은 ‘아름다운 길을 걸으라’ 는 뜻에서 아버님이 직접 지어준 이름이란다. 부전자전일까? 그의 아버지도 미군 통역관을 지냈다고 한다. 대학 때의 전공은 스웨덴어(한국외대)였지만 그는 군에서 해외 파견요원의 영어교육을 전담하는 영어교육대대의 영어교육장교였다.

번역은 고통과 쾌감이 동시에 따르는 ‘창작행위’

이미도 씨는 '번역은 반역이다!' 라고 일갈한다. 그는 번역이 직업이다 보니 번역의 고달픔과 한계에 부딪칠 적마다 아담과 이브가 추방되기 직전의 낙원이 그립다고 책에서 쓰고 있다. 그 땐 인간에게 하나의 언어만이 존재했고 의사소통에 불편이나 어려움은 없지 않았겠느냐는 것. 번역은 고통과 쾌감이 동시에 따르는 ‘창작행위’ 라고 그는 표현한다. “번역이 없으면 영화도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 같은 번역가의 존재 이유죠."

외화란 말 그대로 국산영화가 아닌 외국에서 만든 영화이다. 그들의 언어와 그들의 문화에 맞게 만들어진 말들을 우리의 상황에 맞는 말로 번역을 해야 한다. 그가 번역한 영화를 보며 관객이 기쁨과 환희 때론 슬픔을 맛볼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한다.

이미도의 간단 프로필

직업/영화번역가, 작가·출판인.   
영화번역수 /450여편
이외 조선일보 KBS 방송 등에서 영어 해설.
다수의 대학, 통번역대학원 등에서 영어특강,
저서/ 이미도의 등 푸른 활어영어,
영화백개사전 영어백과사전,
나의 영어는 영화관에서 시작됐다  
블로그(blog.naver.com/midomiho)

공군에서 영어교육장교로 일한 게 계기가 되어 제대 후 한 선배가 번역 한번 해보라고 해서 시작한 게 번역가의 길을 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창작물은 작가가 아는 만큼 쓴 결과물이지만 번역은 번역가가 아는 만큼의 수준을 뛰어넘는 언어와 내용까지 우리말로 옮겨야 할 때가 있기 때문에 그는 번역할 때 더 조심스럽다고 한다.

그렇기에 번역이 반족짜리 창작행위에 그치지 말고 소설쓰기처럼 완전한 창작에 도달하게끔 노력해야 한다는 이윤기씨의 지적에 전적으로 공감한다는 것. 

번역을 하지 않는 시간에는 어떻게 보내느냐고 묻자 여전히 영화보기를 한단다. 영화는 만든 사람과 이를 보는 관객이 만끽하는 일종의 게임 같은 것이라고 답한다. 

그에게는 쉬는 것도 일의 한순간이다. 마지막 질문으로 결혼은 왜 안 하였느냐고 묻자 영화속에서 빠져서 15년을 번역하며 살다보니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도 모르게 갔다고 한다.
잘 때도 영어로 꿈꾸고, 쉴 때도 영화보기를 한다는 그는 결혼을 안 한 것이 아니고, 못했다고 답했는데 그는 이미 결혼을 한 것 같았다. 누구와 ? 영화와 그리고 번역이라는 아이와 이미 함께 살고 있지 않은가 ?


태그:#이미도,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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