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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7대 대통령선거일인 19일 오전 서울 창천동에 마련된 투표소에서 한 유권자가 소중한 한표를 행사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19일에 있었던 제17대 대통령선거에서 한 유권자가 소중한 한표를 행사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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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성인이 된 이후 그동안 각종 공직선거 때마다 빠짐없이 투표를 해왔다. 투표는 대개 초등학교나 중학교에 설치된 투표소에서 했다. 대개는 걸어갈 만한 거리였지만 바쁠 때는 더러 승용차를 몰고 가서 투표를 하고 회사에 나가기도 했다.

지난 17대 대통령선거 때는 더 가까운 곳에 투표소가 있었다. 투표소와의 거리를 좁혀 조금이라도 더 투표율을 높이려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노력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가깝다고 늘 좋은 것은 아니었다. 

투표소는 교회 건물 안에 있었다. 서울 강남 일대의 투표소처럼 유권자들이 길게 줄을 서지는 않았지만 투표소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교회의 십자가가 보이는 복도에서 줄을 서야 했다. 믿고 의지하는 종교가 없지만, 하느님이 "수도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하겠다"는 장로 후보를 찍는지, 다른 후보를 찍는지를 지켜보고 있을 것 같아 왠지 찜찜했다.

그러나 앞으로는 이런 찜찜함을 겪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국가인권위원회(위원장 안경환, 이하 인권위)가 교회나 절 같은 종교시설 내에 투표소를 설치하지 말도록 중앙선관위에 권고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인권위 "헌법 제20조기 보장하는 '종교의 자유' 침해 소지"

인권위는 19일 보도자료를 내고 투표구 내에 투표소를 설치하기에 적당한 장소가 없는 등의 불가피한 사정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종교시설 내에 투표소를 설치하지 말도록 선관위에 권고했다.

인권위의 이같은 권고는 지난 2월 A씨가 '종교시설 내에 투표소를 설치하는 것은 투표행위 자체를 방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종교시설 내에 투표소를 설치하지 않도록 해달라'는 요지로 진정해온 데 따른 결정이다.

이와 관련 인권위는 공직선거 시 종교시설에 투표소를 설치하는 것은 헌법 제20조가 보장하고 있는 종교의 자유를 침해할 소지가 있다고 판단했다고 권고 결정 배경을 밝혔다. 헌법 제20조는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고 돼 있다.

인권위는 또 "국민 중 일부라도 종교상의 이유로 투표를 위해 종교시설에 들어가는 것을 심리적 부담으로 느끼거나 나아가 투표행위 자체를 꺼리게 된다면 이는 선거를 통한 민주주의의 실현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같은 결정은 사실상 '교회에 투표소를 설치하지 마라'는 권고나 마찬가지여서 주목된다. 종교시설 투표소의 열에 아홉은 교회 안에 있기 때문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지난 제17대 대통령선거에서 총 투표소 1만3178개소 가운데 1172개소(8.9%)가 종교시설 내에 설치되었고, 그 중 90%에 이르는 1050개소가 교회 내부에 설치되었다. 종교시설을 이용한 투표소는 어림잡아 10곳에 1곳 꼴인데, 그중 10곳에 9곳은 교회 안에 있다는 얘기다.

종교자유정책연구원·조계종 등이 종교시설 투표소 공론화

교회가 투표소로 사용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신3동 제7투표구. 교회 측은 투표를 마친 주민들을 위해 차와 사탕을 마련했다. 교회가 투표소로 사용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신3동 제7투표구. 교회 측은 투표를 마친 주민들을 위해 차와 사탕을 마련했다.
 지난 총선에서 교회가 투표소로 사용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신3동 제7투표구. 교회 측은 투표를 마친 주민들을 위해 차와 사탕을 마련했다(사진은 기사 내용과 특정 관련이 없습니다).
ⓒ 오마이뉴스 김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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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시설 내의 투표소 설치 문제를 공론화한 곳도 종교자유정책연구원(공동대표 길희성 등, 이하 종자연)과 조계종 종교평화위원회(이하 종평위) 등이다.

종교학자·법조인 등으로 구성된 '종자연'은 이에 앞서 "총선과 대선 등 선거 때마다 종교시설 내에 설치되는 투표소에 대한 시민들의 진정과 반발이 잇따르는데도 시정되지 않고 있다"며 종교·인권단체들과 연대해 헌법소원을 내는 한편으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청원과 국가인권위원회 진정을 추진해왔다.

또 '종평위'도 "선거 때 대도시일수록 종교시설에 투표소가 많이 설치되고 종교시설 중에서도 개신교 교회가 압도적으로 많아 특정종교에 편향된 종교 차별로 간주한다"고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시해왔다. '종자연' 등은 중앙선관위에 정보공개청구(접수번호 2008-1469)를 통하여 수집한 자료를 분석하고, 그 자료를 근거로 헌법소원 및 진정을 제기했다.

'종자연'이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2006년 제4회 지방선거 당시에는 총 투표소 1만2932개소 중 1087개소(8.4%), 제17대 대통령선거에서는 총 투표소 1만3178개소 중 1172개소(8.9%)가 종교시설 내에 설치되는 등 증가 추세다.

종교시설 투표소를 지역별로 보면, 서울시가 2210개 투표소 중 511개소(23.1%)로 전국에서 가장 많았고, 부산시 856개소 중 116개소(13.6%), 인천시 599개소 중 77개소(12.9%) 등으로 주로 대도시일수록 종교시설 투표소 설치비율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종교시설 투표소 비율이 높은 서울시의 경우, 서대문구(39.3%), 은평구(36.3%), 용산구(35.6%), 마포구(31.3%), 동대문구(31.1%) 등에서 30%를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종교시설 투표소 비율... 교회 90%, 성당 8.7%, 절 0.3%

문제는 종교시설 투표소 가운데 교회 등 개신교 관련 시설이 90%로 압도적인 데 비해 천주교는 8.7%, 불교는 0.3% 정도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이는 사람이 많은 도회지로 찾아가는 개신교의 선교 방식과 '명산대찰'로 찾아오는 중생을 기다리는 불교의 전통적인 포교 방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다. 하지만 교회 위주로 선정된 종교시설 투표소는 나같은 무종교자를 포함해, 개신교가 아닌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상당한 심리적 압박으로 작용하는 모양이다.

지난해 대선 당시에도 중앙선관위 홈페이지에는 네티즌의 항의가 빗발쳤다고 한다. 대부분 "투표소가 설치된 종교시설과 다른 종교인이나, 종교가 없는 시민들에게 특정 종교시설 출입을 강제했다"거나 "특정 종교에 선교의 활동장소를 제공했다"는 불만이었다. 중앙선관위의 한 관계자도 "다른 선거 때와 달리 지난 대선에서는 유난히 종교시설 투표소와 관련된 문제제기가 많았다"고 말했다.

현행 공직선거법 제147조 제2항에 따르면 '투표소는 투표구 안의 학교, 읍·면·동사무소 등 관공서, 공공기관·단체의 사무소, 기타 선거인이 투표하기 편리한 곳에 설치한다'고 되어 있다. 이 가운데 종교시설 투표소는 '기타 선거인이 투표하기 편리한 곳'에 해당하는 셈이다.

중앙선관위도 종교시설 투표소 설치는 유권자의 선거 편의와 접근성을 최우선으로 한 투표소 정책에 입각한 것이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종자연'의 분석에 따르면, 제4회 지방선거에 비해 제17대 대통령선거에서 246개의 투표소가 증가했는데, 그중 종교시설 투표소는 85개소가 늘어나 전체 증가분의 34.6%를 차지하는 등 종교시설을 투표소로 이용하는 경향이 커지고 있다.

입지여건이 좋은 위치를 선점하는 대형 종교시설이 많아지고 여기에 공무원의 행정 편의와 관행이 더해지는, 이런 추세라면 멀지 않아 투표소의 절반이 종교시설에 설치되는 '선교(選敎) 일치'의 시대가 오지 마란 법도 없겠다.

그런데 각 지역별 투표율을 비교해도 울산광역시와 제주도를 제외한 나머지 광역시도의 종교시설 평균투표율은 지역별 평균투표율보다 낮게 나타났으며, 전국적으로는 17대 대선 전국 평균 투표율 63%에 못 미치는 60%를 기록했다.

이처럼 종교시설 투표소의 평균투표율이 전국 평균투표율에 못 미치는 현상은 종교시설 내 투표소 설치가 '유권자들의 편의와 접근성 때문'이라는 선관위의 입장과 배치되는 것이다.

17대 대선 전국 평균투표율 63%... 종교시설 투표율은 60%

따라서 공선법 제147조 제2항에 나열된 장소를 제한적 열거 규정으로 보기 어렵지만 적어도 예시된 장소들과 비슷한 성격의 장소에 투표소가 설치되어야 한다는 게 종교·인권단체들의 주장이다. 또 이들은 더 나아가 '국가 행위로 특정 종교에 선교 활동장소를 제공함으로써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고 정교(政敎) 분리의 원칙을 위반'했다는 점을 문제삼고 있다.

물론 이와 같은 문제제기는 국민 일반의 '과도한 행복 추구권'으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인권위 권고는 이미 제기된 헌법재판소의 헌법소원 심리에도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중앙선관위도 인권위의 권고결정에 대해 아직 공식 입장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한 관계자는 19일 "선관위도 헌법소원이 제기된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인권위의 이번 권고가 나오기 전에 이미 종교시설 투표소를 줄여가고 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아직 4·9 총선 투표소 수가 확정은 안 되었지만 투표소를 설치할 공공시설이 없는 곳과 장애인 편의시설이 미비한 곳을 제외하곤 기존의 종교시설 투표소를 제외하라는 지침이 하달되었다고 한다.

선거는 흔히 '민주주의 꽃'이나 '축제의 장'으로 비유된다. 그런데 국민 편의와 접근성이라는 '선의'에도 불구하고 그 선의를 개인의 종교적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국민이 늘고 있다면, 국민의 기본권 보장은 물론 선거의 신뢰를 높이기 위해서라도 종교시설 투표소를 다른 공공기관 투표소로 대체해 나가야 마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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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is free, but facts are sacred! 팩트의 위대한 힘을 믿는다. 오마이뉴스 정치데스크를 세 번 맡았고, 전국부 총괄데스크, 뉴스게릴라본부장(편집국장), 편집주간(부사장)을 거쳐 현재는 국정원과 정보기관에 관한 책을 집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