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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곧 개화할 봄의 전령 목련
▲ 목련 이제 곧 개화할 봄의 전령 목련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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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길을 나서자는 친구의 말에 선뜻 짐을 챙긴다. 대지는 지금 막 새싹이 움트는 정도지만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냉기 대신 봄의 채취가 묻어 있는 요즘, 안 그래도 벤치에 늘어지게 앉아 쬐는 나른한 햇볕이 그리웠던 터였다.

어디를 갈까 한참을 숙고하다 우리가 향한 곳은 용문사, 천년된 은행나무로 유명한 바로 그 용문사였다. 그곳은 경기도 양평에 위치해 당일 나들이 코스로 손색이 없을 뿐만 아니라, 최근 본 영화 <원스어폰어타임>의 첫 장면에 용문사가 등장하면서 아련한 옛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어린 눈으로 보았던 그 거대한 은행나무는 아직 건재할까? 600년 된 숭례문도 제대로 간수 못하는 이 시대, 천년도 넘은 그 나무가 아직까지 그 자리를 잘 지키고 있는지 문득 궁금해진 것이다.

다가오는 봄의 하늘
▲ 하늘 다가오는 봄의 하늘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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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사 가는 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랬고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은 운전하기 힘들 정도로 나른하고 따뜻했다.

서울을 벗어나 미사리를 지나자 예와 다름없이 팔당에서 두물머리까지의 그 길이 펼쳐졌다. 잘 닦여진 도로 덕에 예전처럼 구불구불 강기슭 구경하는 맛은 덜했지만 어쨌든 도로 옆으로 보이는, 햇살이 산란되는 한강의 유유한 흐름은 장관이었다. 춘천으로 뻗은 길이 다 그렇지만 지나는 그 자체만으로도 낭만이 실린 길이었다.

이윽고 도착한 용문사. 그러나 그곳은 내 아련한 기억처럼 조용하고 소박한 공간이 아니었다. 대신 그곳은 용문산국민관광단지라 하여 크고 떠들썩한, 여러 사람들의 욕망이 스며든 공간이었다. 어떻게든 관광명소를 개발해야 하는 지자체의 욕망과 어떻게든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매출을 올려야 하는 지역민들의 욕망의 만남.

모든 것이 경제로 통하는 이 시대에 그 궁합을 마냥 백안시 할 노릇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렇게 잊혀져간 조용하고 고즈넉한 산사가 아쉬웠다. 용문사를 떠들면 떠들수록 용문사가 사라져가는 역설적인 현실이 가슴 아팠다.

피안으로 가는 길
▲ 용문사 일주문 피안으로 가는 길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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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장한 용문사 은행나무와 사찰
▲ 용문사 은행나무 웅장한 용문사 은행나무와 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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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소년은 무엇을 저리도 간절하게 빌고 있을까?
▲ 기원 저 소년은 무엇을 저리도 간절하게 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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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을 지나 본찰로 다가간다. 길옆의 계곡은 아직 얼어있었지만 그 밑을 흐르는 소리는 이미 봄이 와 있음을 졸졸거리며 이야기 하고 있었다. 길 양 옆으로 우거진 나무숲이 끝나는 순간, 저 멀리 늠름하게 서 있는 은행나무가 보였다.

저 밑으로 흐르는 봄의 소리
▲ 용문사 계곡 저 밑으로 흐르는 봄의 소리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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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약 1100~1500여년으로 추정되며, 높이 62여m, 밑둥 둘레가 14m로서 동양에서는 가장 크다는 용문사 은행나무. 예전에 어떤 TV프로에서는 이 은행나무의 가치를 1조원이 훌쩍 넘어 2조에 가까운 것으로 계산했었다.

2조원이라. 그러나 그 엄청난 액수 보다는, 그냥 그 자리에 전설을 안고 서 있는 은행나무의 가치를 판단함에 있어서도 돈의 가치를 들이대는 이 사회의 천박함이 영 못마땅했다. 모든 것을 돈으로 환원해야 이해할 수 있는 사회. 하긴 인간의 목숨마저 돈으로 환원하는데 은행나무 따위가 무어 대수겠는가.

용문사 은행나무의 가치는 그것이 단순히 크고 오래되었기 때문에, 전설을 품고 있기 때문에 높은 것이 아니다. 신라 마의태자의 지팡이가 변해 은행나무가 되었는지는 아닌지는 결코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그 전설이 1000년을 넘게 이어져오고 있다는 사실이, 이 은행나무를 1000년 전의 사람들과 지금의 내가 함께 보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것은 은행나무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 시공간을 뛰어넘어 공유되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시공간을 뛰어넘은 어떤 존재의 공유. 그것은 곧 역사의 시작이다. 인류의 기원이자 축복인 문자가 몇 천 년의 시간을 이어주듯이, 은행나무는 1000년 전의 선인들과 지금 이 땅에 태어난 나를 이어준다. 100년도 살지 못하는, 유한적이고 하잘것없는 나를 지금까지 이어져 온 역사의 한 명으로 증명해주는 존재인 것이다.

천년의 세월을 버틴 힘
▲ 세월의 힘 천년의 세월을 버틴 힘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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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최근에 만들어진 전각은 왠지 허전하다.
▲ 용문사 대웅전 어쨌든 최근에 만들어진 전각은 왠지 허전하다.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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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련한 기억 속의 풍경 보다는 덜 고색창연했던 그 곳
▲ 용문사 전경 아련한 기억 속의 풍경 보다는 덜 고색창연했던 그 곳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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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를 지나쳐 계단을 오르니 대웅전을 비롯한 전각들이 눈에 띄었다. 그러나 그것들 대부분이 최근에 와서 만들어져서인지 나의 기억에서처럼 고풍스럽거나 수려하지 않았다. 역시 추억은 아름답게 채색되는 법인가?

색을 입어가는 계절
▲ 다가오는 봄 색을 입어가는 계절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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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나이 먹은 만큼 나의 시선에 많은 편견이 들어앉은 탓이리라. 다만 전각이 소실되어도 사찰의 명당은 유지되는 법. 전각 너머, 은행나무와 어우러진 유려한 풍경이 이곳에 고찰이 있었음을 강변하고 있었다.

지장전 옆에 앉아 잠시 따뜻한 햇볕을 쬔다. 사람들의 옷차림은 아직 겨울을 벗지 못했지만 다들 다가오는 봄소식으로 흥에 겨웠는지 발걸음이 가벼워 보였다. 더불어 평온해지는 내 마음.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세상 이치에 비추어 나를 뒤돌아본다.

용문사 내려오는 길. 저기 보이는 봄소식에 친구가 시 한 수를 읊조린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 고은 '그 꽃' -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용문사, #경기도, #양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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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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