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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장(九江)에서 버스를 타고 밤 9시가 넘어서 난창(南昌)에 도착했다. 기차 역 앞에 숙소를 잡았다. 벌써 여행한 지 140일이 됐다. 여름이 지나면서 식욕이 떨어지는 것이 가장 문제다. 혼자 먹다 보니 비슷한 식당에서 늘 먹는 음식을 시키게 된다. 길거리에서 사먹는 것도 지겹지만 더위 속에서 밥을 먹는 것도 꽤 지친다.

 

그래서, 밥과 요리를 사서 에어컨이 잘 나오는 호텔 방에서 먹기 시작했다. 제육볶음 하나와 밥 한 공기, 포도, 복숭아, 고추까지 샀다. 배낭에 여전히 남아있는 고추장도 한몫 한다. 나름 진수성찬이다. 밥을 먹고 나서는 인터넷을 하거나 텔레비전을 본다.

 

 

특히, 중국방송에 관심이 많아 최신 드라마와 오락프로그램을 즐겨 보며 최신 동향을 분석도 한다. 뉴스도 자주 본다. 시사 흐름을 잃지 않는 것도 좋다. 특히 아나운서들의 정확한 발음은 중국어 공부에도 도움이 된다. 이렇게 혼자서도 잘 노는 것이야말로 장거리 여행에서 정신적으로 지치지 않는 방법일 것이다.

 

다음날인 9월 6일, 버스를 타고 텅왕거(滕王阁)를 찾았다. 강남 3대 누각 중 하나인 텅왕거는 장시(江西) 성 간장(赣江)을 바라보고 있다. 후베이(湖北) 성 우한(武汉)의 황허러우(黄鹤楼)는 창장(长江) 강변이고 후난(湖南) 성 위에양(岳阳)의 위에양러우(岳阳楼)는 둥팅후(洞庭湖)에 있다.

 

3곳 모두 서로 다른 지역, 환경, 역사를 지닌 독특한 곳이다. 역시 누각은 물을 바라보고 있어야 제 맛인 듯하다. 중국을 대표하는 3대 누각은 텅왕거 대신에 산둥 성 랴오청(聊城), 고성(古城)에 있는 명나라 시대 누각인 광위에러우(光岳楼)를 꼽게 된다.

 

난창 시를 흐르는 간장(赣江) 변을 바라보고 있는 텅왕거는 당 태종 이세민의 동생인 이원영(李元婴)이 서기 653년에 처음 만든 누각이다. 그는 비록 왕가에서 태어났지만 궁중생활을 좋아하지 않고 서예와 음악, 자연을 좋아하는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겼다.

 

도독(都督) 벼슬을 하던 중 도독부에서 하루 종일 음주가무를 즐기는 것도 모자라 강변을 바라볼 수 있는 이곳에 별궁으로 누각을 세운 것이다. 그는 황제의 동생으로 텅왕(滕王)이라 했으니 누각의 이름이 된 것이다.

 

입구를 들어서니 광장 바닥에 큰 원형의 태극과 팔괘 문양이 보이고 그 앞으로 웅장한 누각의 자태가 나타난다. 베이징 고궁 치엔칭먼(乾清门) 앞에 있는 사자 조각상처럼 두 마리의 암수 사자가 텅왕거 문을 지키고 있다. 누각은 '명삼암칠(明三暗七)'의 건축양식을 따랐다고 한다. 외관으로 보면 3층 회랑(回廊)으로 쌓았지만 내부로 들어가면 7층 구조인 것이다.

 

누각 1층 안으로 들어서니 박물관이 있다. 송, 원, 명, 청나라 시대별로 누각의 발전 모습을 모형으로 전시했다. 분명 시대별로 다른 특성을 지닌 누각이겠지만 전문가의 설명을 듣지 않으면 그 차이를 분별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사방 벽면에는 옛 글자체로 편액들이 걸려 있다. 당시 황족들의 초상화들도 있고 갑옷과 같은 전투 복장들이 전시돼 있기도 하다.

 

6층 꼭대기 한쪽 벽면에는 공연무대가 있다. 도착하자마자 채 1분도 되지 않아 공연이 끝났다. 텅왕이 가무를 즐겼을 법한 노래와 무용이 끝나자마자 관광객들은 배우들과 사진찍기에 여념이 없다. 무용수 아가씨가 외국인 관광객의 아이를 안고 사진을 찍기도 한다.

 

벽마다 당나라 시대를 대표하는 당삼채로 제작된 벽화가 있다. 황(黄), 갈(褐), 녹(绿) 색의 유약(釉)을 기본으로 비교적 저온에서 구워낸 당삼채 도자기는 세계적인 유물이기도 하다.

 

3가지 색깔의 유약으로 화려하고 유연한 동선을 만들어내는 것이 특징이다. 이곳 벽화는 당삼채로 만든 타일을 서로 연결해 만들었다.

 

좌우 벽면에 새겨진 거대한 벽화는 모두 당나라 시대의 대당무악(大唐舞乐)을 주제로 했다. 남쪽 벽화를 용장(龙墙)이라 하고 남성 가무악대의 무용도를 표현하고 있다면, 봉장(凤墙)이라 하는 북쪽 벽화에는 여성 가무악대가 등장한다.

 

 

용장은 적진을 돌파하는 파진악무(破阵乐舞)를 주제로 한다. 좌우로는 역동적이고 강직한 춤사위의 남성 독무인 후등무(胡腾舞)와 자유롭고 활력이 넘치는 검기무(剑器舞)가, 중앙에는 오방사자무(五方狮子舞)가 그려져 있다.

 

봉장은 당나라 시대 궁중 무용인 예당우의무(霓裳羽衣舞)를 주제로 한다. '霓'는 무지개, '羽'는 깃털이니 전부 여성스런 옷을 입고 추는 춤이라 보면 되겠다. 긴 천을 휘날리며 추는 2인 춤인 자지무(柘枝舞)와 긴 치마가 둥글게 펼쳐지는 춤인 후선무(胡旋舞)가 그려져 있다. 이런 춤들은 대부분 서역에서 건너와 당나라 시대에 궁중에서 즐겼던 춤이라 전해진다.

 

계단을 따라 내려오면 각 층 전시실마다 그림과 서예작품들이 많이 있다. 벽면에도 벽화들이 있다. 한 층씩 내려가면서 풍부한 당나라 시대의 정서에 빠져보는 것도 좋겠다.

 

밖으로 나오니 텅왕거 좌우로 2개의 정자가 보인다. 남쪽에 있는 정자를 야장(压江)이라 하고 북쪽에 있는 정자를 이추이(挹翠)라 한다.

 

마치 양 날개를 단 모습이다. 그래서, '하늘에 기대어 우뚝 솟은(倚天耸立)' 산(山) 자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하기도 하고, 장자(莊子)에 나오는 하늘을 날아가는 곤붕(鲲鹏)과 닮았다고도 한다.

 

정면에서 오른쪽 정자인 이추이팅(亭)을 지나니 정말 작은 정원이 있고 그 가운데 인공 호수가 있다. 둥근 원 모양의 문 틈 사이로 바라본 강에는 배들이 떠다니고 강 건너편 높은 빌딩들도 보인다. 모래를 가득 실은 돛단배가 강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연못에 비친 정자가 살짝 흔들리는 물결에 사라졌다가 나타나곤 한다. 연못에는 구곡풍우교(九曲风雨桥)라 이름 붙인 돌다리가 있어서 하나씩 건너면서 연꽃도 보고 수면에 비친 모습도 볼 수 있다.

 

연못 가운데서는 <등왕각서(滕王阁序)>를 지은, 당나라 초기 초당사걸(初唐四杰)로 불리는 시인 왕발(王勃)의 흰색 조각상이 햇살에 빛나고 있다.

 

 

텅왕거를 나와서 시내 중심으로 걸었다. 지도를 더듬어 난창 봉기의 주역인 주더(朱德)를 찾아가는 길이다. 방향을 잡기 위해 지나는 사람에게 물었더니 의외로 알쏭달쏭해서 잘 모른다고 한다.

 

약 1km 정도 걸으니 둥후(东湖)가 있고 그 주변은 번화가이다. 잔잔한 호수를 따라 배를 타는 사람, 낚시를 하는 사람, 호수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도 반갑다. 호수 속에 지은 건물 2층에 있는 커피숍이면서 술집인 곳이 눈길을 끈다. 'CD1925'라는 이름인데 영문 'CD'가 무엇을 뜻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낭만적인 위치에 져우바(酒吧)가 위치하고 그 규모가 매우 커 보였다. 나중에 알아보니 쇼도 하고 춤도 추는 난창에서는 꽤 유명한 곳이었다.

 

저우언라이를 위해 직접 요리를 한 주더

 

호수를 따라 한참 걸어 겨우 화위엔쟈오제(花园角街)에 있는 혁명원로 주더 집 간판을 찾았다. 시내에서 약간 벗어난 골목길이라 주변 거리에 성인용품을 파는 가게들이 몇 군데 있다. 중국의 경우, 번화가를 제외한 곳곳에서 노골적으로 성인용품을 판다. 버젓이 간판을 걸고 있는 가게들의 모습을 보면 가끔은 당황스럽다.

 

화위엔쟈오2호(花园角2号)가 주더의 옛집 주소이다. 이곳은 공산당이 주도한 난창 봉기(起义)를 일으키기 위해 거주하던 집이다. 그래서, 고향 집이라는 뜻의 구쥐(故居)가 아니라 져우쥐(旧居)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바깥은 거의 6m는 될만한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주더는 스촨(四川) 성 북부의 이룽(仪陇) 출신이다. 주더는 1886년 생으로 평생을 혁명가로서 군인의 길을 걸었다. 그는 신중국 수립 후 인민해방군 총사령(总司令)이 된다.

 

1927년 8월 1일 일어난 난창 봉기는 제1차 국공합작의 느슨한 틀을 깨고, 노동자와 농민이 주체가 되는 정권(工农民主政权)을 수립하기 위한 중국공산당의 신호탄이었다. 주더는 이를 주모하기 위해 이곳을 거점으로 일을 추진했다.

 

 

봉기가 있기 며칠 전인 7월 27일 주더는 초조한 마음으로 중요한 인물을 기다리고 있었다. 봉기의 계획을 함께 협의할 인물이었으니 그는 바로 자신을 입당 소개한 저우언라이(周恩来)인 것이다.

 

오랜 친구를 만난 기쁨을 만끽하며 주더는 난창의 군대상황과 봉기 계획을 보고한다. 저우언라이는 상세하고 치밀한 계획에 기뻐했다고 한다. 그리고 주더는 직접 주방에서 요리를 해서 함께 식사를 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요리했던 고추, 가지 등 야채가 전시돼 있기도 하다.

 

 

2층 구조의 허름한 집이지만 천장은 비교적 높은 편이고 좁은 마당이 있는데 마당은 하늘을 향해 뚫려 있어 햇살이 비치고 있다. 거실 오른편 주더가 기거하던 방에는 침대와 책상이 하나 놓여있다.

 

거실에는 당시 저우언라이가 잠을 잤던 간이침대와 탁자, 옷걸이가 놓여 있다. 그리고 주더가 대접했다는 야채도 있고 마작 패, 옷과 부채 등과 함께 봉기를 기념하는 사진들이 전시돼 있다.

 

난창 봉기야말로 주더와 저우언라이의 합작품이라 할 정도로 두 사람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7월 31일 저녁 밀고자가 생긴 것을 발견한 주더는 저우언라이에게 즉각 보고하고 거사를 8월 1일 새벽 2시로 당기게 됐다. 전투가 시작되자 일사분란하게 적들을 무장해제하고 4시간여 만에 모든 작전을 끝냈다. 여명이 틀 때 즈음 3천여 명의 적군을 섬멸(缴获)하고 5천여 종의 무기와 백만여 발의 총알, 수문의 대포를 노획(缴获)했다. 난창을 완전 점령한 것이다.

 

 

바로 당일 오전 숭칭링(宋庆龄), 저우언라이, 허룽(贺龙), 예팅(叶挺), 주더를 비롯 25명으로 구성된 혁명위원회를 구성하고 봉기선언문을 통과시켰다. 이것이 저우언라이와 주더의 이름이 처음으로 기재된 첫 번째 문서라고 한다. 동시에 봉기를 주도한 부대를 재편성한다.

 

장제스(蒋介石) 군대가 난창으로 진주하자 곧 혁명위원회와 군대는 차례로 철수(撤离)한 뒤 군대를 지휘해 남하(挥师南下)했다. 저우언라이가 이끄는 주력군은 광둥성 해안가인 차오저우(潮州)와 산터우(汕头) 부근으로, 주더가 지휘하는 부대는 메이저우(梅州) 근처 싼허댐(三河坝)에 머물면서 둘은 헤어지게 된다. 저우언라이의 주력군은 장제스 군대와 전투에서 대패한 후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주더가 이끄는 부대는 장시성과 광둥성 등지를 전전한다. 정규전에서 유격전으로 전술을 바꿔 이동했으며 7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옛 벗인 판스셩(范石生) 부대에 의탁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도 적군에 발각되자 후난(湘南)으로 이동해 1928년 1월 다시 한 번 후난봉기를 거행하게 된다.

 

그리고 4월, 부대를 인솔하고 징강산(井冈山)으로 들어간다. 닝강룽(宁冈砻) 시에 있는 원씽거(文星阁)에서 마오쩌둥과 만나게 되는데 이를 역사에서는 '주더와 마오쩌둥의 합류(朱毛会师)'라 한다. 주더 부대는 곧 홍사군(红四军)이 된다.

 

저우언라이와 함께 혁명을 모의하고 끝까지 군대를 이끌고 결국 마오쩌둥과 합류한 주더. 마오쩌둥 국가주석과 저우언라이 총리, 그리고 주더 총사령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오후 2시가 벌써 지났다. 주더의 집을 보고 나오는데 중국사람이 아는 체를 한다. 왜 한국사람이 이런 곳에 와서 관심을 가지고 여행을 하는지 몹시 궁금해 한다. 주더를 아는 것도 이상하다는 눈치이다. 한참 동안 담배를 피면서 그가 이야기하는 것을 계속 들었다. 아쉽지만 버스 시간이 다 되어 헤어져야 했다.

덧붙이는 글 | 중국문화기획자 - 180일 동안의 중국발품취재 
blog.daum.net/youyue 게재 예정


태그:#난창, #주더, #텅왕거, #저우언라이,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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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발품취재를 통해 중국전문기자및 작가로 활동하며 중국 역사문화, 한류 및 중국대중문화 등 취재. 블로그 <13억과의 대화> 운영, 중국문화 입문서 『13억 인과의 대화』 (2014.7), 중국민중의 항쟁기록 『민,란』 (2015.11)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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