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윈난성은 중국에서도 다양한 소수민족이 사는 지역이다. 그동안 윈난 서북부는 험한 산맥으로 둘러싸여 접근이 쉽지 않았다. 중국은 작년 3월 아시아횡단철도 다리-루이리를 잇는 338km 구간 공사를 착공하여 본격적인 윈난 서북부 개발과 서남아시아 진출을 진행하고 있다. 최근 현지를 다녀온 모종혁 통신원의 르포를 통해 개발과 변화의 바람을 타고 있는 윈난 서북부의 현실을 6차례에 걸쳐 싣는다. <편집자주>

 

 

 

"방방후이(棒棒會)는 봄이 도래하고 농경 시즌이 시작되었음을 기리는 리장 인민들의 축제 한마당이지요." 무궈준(木國軍·39)

 

중국 윈난(雲南)성 서북부에 위치한 해발 2416m의 리장(麗江). 지난 20일부터 24일까지 리장에서는 특별한 장터가 열렸다. 리장 최대 민족인 나시(納西)족을 위시하여 한족·바이(白)족·이(彛)족·티베트인 등 여러 민족들이 참가한 물자교역회 '방방후이'가 5일 동안 성대하게 벌어진 것.

 

일명 '미러후이'(彌勒會)로도 불리는 방방후이는 매년 정월대보름에 열린다. 방방후이가 열리는 기간 동안 리장에는 주변 도시인 다리(大理)·샹글리라(中甸) 뿐만 아니라 멀리 쿤밍(昆明)·판즈화(攀枝花)·라싸 등지에서 다양한 민족과 각양각색의 상인이 몰려와 북새통을 이룬다.

 

방방후이가 윈난성을 대표하는 전통 물자교역회가 된 것은 리장의 역사가 이유다. 리장은 나시족의 성산인 해발 5596m의 위롱(玉龍)설산을 비롯, 칭장(靑藏)고원과 윈구이(雲貴)고원이 맞닿은 곳에 위치한 고산도시다. 높고 거대한 산맥 자락에 자리잡은 리장은 한대 기후라곤 하나, 연평균 온도가 섭씨 12.6~19.8℃로 일정하다. 한여름 더울 때는 18.1~25.7℃, 겨울철에도 4~11.7℃ 정도이니, 사시사철 만년설을 간직한 위롱설산을 끼고서도 큰 추위가 없다.

 

아름다운 자연풍광과 더불어 리장에는 고풍스러운 목조 가옥들이 수백여 채 모여 독특한 군락을 이루고 있다. 리장고성이라 불리는 촌락군은 1253년 원나라 후비리에(忽必烈)가 대군을 이끌고 윈난에 진공하여 다리국을 정벌할 때 병영을 세웠던 자리였다. 1382년 리장을 통치하던 지방관 아자아(阿甲阿)가 명나라에 귀속하자, 명태조 주원장은 아자아 일족에게 무(木)씨 성을 하사하고 리장 일대 주민을 다스리는 지방호족인 투스(土司)에 임명했다.

 

무씨 투스는 오늘날과 같은 리장고성과 도시 구조를 만들었는데, 초기 통치기간 중에 높은 세금 탈취와 토지 수탈을 일삼았다. 무씨 투스의 폭정을 견디다 못한 주민들은 몽둥이(棒棒)를 들고 대규모 투쟁에 나섰다. 민중 봉기에 놀란 무씨 투스는 주민들의 부담을 낮출 것을 약속하고 위안 잔치를 벌여주었다.

 

투쟁을 끝내고 다시 농토로 돌아가야 했던 리장 주민들은 고성에서 필요한 농기구를 장만해야 했기에 주민간의 물물교환이 이뤄지게 됐다. 투쟁의 도구로 쓰이던 크고 작은 몽둥이는 곡괭이·낫·호미·도끼 등 농기구로 변모했고, 물자가 교역됐던 그 날을 기념하여 해마다 방방후이가 열리게 됐다.

 

 

 

호족 투스에 대한 투쟁에서 비롯된 물자교역회 '방방후이'

 

리장은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어 사시사철 중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몰려드는 관광객으로 들끓는다. 1996년 5000여 명에 불과하던 관광객 수는 1997년 12월 세계문화유산 지정 이후 2006년 460만 명을 돌파했다.

 

115만 명의 리장시 전체인구 중 여행업에 종사하는 주민만 10만여 명이고, 리장시 재정수입의 50%는 관광산업에서 나온다. 리장시는 외국 관광객을 더욱 많이 유치하기 위해 공사비 10억 위안(한화 약 1300억원)을 투입, 2009년 완공 예정인 국제공항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작년 말에는 리장과 다리 간 고속도로도 착공했다.

 

리장시는 고성의 핵심인 전통민가 복원과 도시 곳곳을 지나는 수로의 수질 향상에도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본래 리장이 세인들의 주목을 받게 된 데에는 명·청시기에 건축된 수백여 채의 가옥과 집 사이를 흐르는 맑은 물에 있다.

 

1996년 2월 리장을 강타한 진도 7의 초대형 지진은 사망자 293명, 부상자 3700여 명 등 처참한 인명피해을 내고 수많은 건물을 붕괴시켰다. 지진의 피해 속에 외곽 신도시는 폐허가 됐지만, 옛 기와집이 밀집한 고성 내부는 피해가 적었다. 기둥과 대들보를 맞춤식으로 결합한 전통 건축양식은 목재끼리 상호 버팀 작용을 하여 붕괴가 적었던 것이었다.

 

지진은 리장 주민들에게 큰 재앙을 가져다주었지만 동시에 기회도 안겨 주었다. 고성의 전통민가와 도로, 수로 등 계획적이고 촘촘한 도시 구조가 강진의 피해를 적게 해 주었음이 각종 언론을 통해 보도되면서, 리장은 곧 커다란 유명세를 타게 됐다. 특히 중국정부가 고성 전체를 세계문화유산에 등록시킨 것은 리장에게 도약의 날개를 달아준 격이 됐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자마자 리장은 일약 유명한 관광명소로 부상하여, 작년 10월 중국 여행사이트인 시에청(携程)이 뽑은 중국인이 가장 가고 싶은 여행지 중 1위를 차지했다. 같은 해 12월 상하이에서 열린 제1회 중국 관광산업포럼에서 선정한 중국 10대 휴양도시 중 하나로 뽑히기도 했다.

 

고성을 상품 브랜드화 하려는 리장의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2003년부터 리장고성 보호관리국은 미국 문화유산기금회의 지원을 받아 231만 위안(약 30억원)을 출자하여 새로이 민가 299채, 정원 236개를 복원했다. 리장고성의 복원 프로젝트는 웅장한 위롱설산을 배경으로 나시족의 민족 특색을 살리는데 주력했다. 작년 10월 유네스코는 리장고성 프로젝트의 특수한 가치를 인정하여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지역 문화유산보호상'을 수여했다.

 

유네스코 심사위원들은 "리장고성 프로젝트는 역사적인 도시를 도시 현대화와 관광개발의 위협 속에서 효과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면서 "리장고성은 지역경제와 민족특색이 강화된 건축물의 복원과 과학적인 보호를 진행한 경우"라고 평가했다.

 

 

 

중국 최고관광지 리장에 찾아든 빈부격차와 민족성 해체

 

리장은 오늘날 한 해 500만 명에 가까운 국내외 관광객이 찾는 유명 관광지로 도약했지만, 그 이면에는 극심한 빈부격차와 도농불균형이 도사리고 있다. 2006년 현재 리장 도시 주민의 평균소득은 1만7009위안(약 221만원)으로 1610위안(약 21만원)에 불과한 농촌 주민 소득의 10배에 달한다.

 

향토학자 무궈준은 "리장 도시 내에서도 여행업을 위시한 서비스산업에 종사하는 주민과 그렇지 않은 주민 간의 소득 격차가 3, 4배 난다"고 지적했다. 무는 "전체 리장 주민의 85%에 달하는 농촌 거주민의 불만이 갈수록 커지고 일자리를 찾아 고향을 떠나 고성으로 몰려드는 농촌 젊은이들도 늘고 있다"고 말했다.

 

리장 원주민인 나시족을 위시한 소수민족의 급속한 한화(漢化)와 정체성의 붕괴도 문젯거리다. 나시족은 중국 내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자신만의 언어·문자·종교·문화 등을 가진 흔치 않은 민족이다. 지금도 사용되는 세계 유일의 상형문자인 동파문(東巴文), 자연신과 조상을 섬기는 다신종교인 동파교는 나시족의 독자적인 민족성을 입증한다. 전통 음계부호인 공척(工尺)으로 표시된 악보를 매개로 말로 전하고 마음으로 가르쳐서 중국 고대음악의 살아있는 화석으로 불리는 나시음악은 나시족의 우수성을 보여준다.

 

700여 년의 풍상을 이겨내고 옛 모습을 유지한 고성과 함께 나시족의 독특한 문화와 풍습은 리장을 빛내는 상징이었다. 고성과 나시족의 매력은 외지 관광객을 불려 들여 리장 주민들에게 막대한 부를 안겨주었다.

 

관광산업을 앞세운 현대화와 물질문명은 리장에 경제적 풍요를 가져다주었으나 지역 공동체와 민족 정체성의 붕괴라는 부작용은 어쩔 수 없었다. 나시족은 천당 가는 길에 여자는 7계단을 오르고 남자는 9계단을 올라야 한다는 속담이 전해져 내려오는 모계중심 사회였지만, 지금은 한족 가정과 별반 차이가 없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리거나 일부 특징을 부각시켜 만든 동파문자도 오늘날 제대로 읽고 쓰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동파교를 믿는 나시족은 위롱설산의 깊은 오지에 위치한 몇몇 산골마을 주민들만이 전부이고, 나시음악은 배우려는 젊은이들이 없어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다.

 

리시(李錫) 리장민속박물관 관장은 "지난 10여 년간 빛의 속도로 진행된 개발과 성장은 리장 나시족 사회를 급속히 해체시켰다"면서 "중국정부도 지속적인 관광산업의 발전을 위해 민족 문화와 지역 공동체 유지에 힘쓰고 있지만 현대화·상업화로의 대세는 막을 수 없다"고 말했다.

 

 

 

"방방후이는 리장 정체성을 되찾고 타민족과의 소통 공간"

 

혼돈의 상황 속에서 방방후이는 매년 음력 2월 8일 열리는 산둬숴(三朶碩)와 더불어 리장의 정체성을 지켜주는 중요한 행사다. 리장 주민들은 방방후이 기간 동안 가족·친척과 함께 물자교역장에 몰려나온다.

 

자오칭(昭慶)시장에서 만난 허린은 "달리 사려는 물건이 딱히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이에게 각종 농기구와 화초·수목 등을 구경시켜주려 나왔다"고 밝혔다. 7살 난 아들을 데리고 나온 그는 "도심에 살아 민족 전통의 농경생활을 전혀 알지 못하는 아이에게 방방후이는 재미있고 소중한 체험"이라고 말했다.

 

난초 수집가로 쿤밍에서 왔다는 리예는 "쿤밍에도 떠우(斗南) 꽃시장이 있지만 방방후이에서는 윈난 서북부 일대의 난초 애호가가 모두 몰려 진귀한 난초를 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리는 "최근 경제적으로 성공한 부자들이 늘면서 투자가치가 있는 물건에는 모두 손을 대고 있다"면서 "지금까지 수집한 희귀한 난초만 수십 여종"이라고 자랑했다. 나시족 전통 방석을 가지고 나온 한 할머니도 "농한기에 집에서 짠 것"이라며 "좀 팔아서 손주들 옷이나 사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지난 21일 <윈난일보>는 "자오칭시장과 위롱촌에서 각각 열린 방방후이 첫 날 동안 8만여 명이 물자교역장을 찾았다"면서 "방방후이는 단순한 물자교역회를 넘어 민족축제의 장이 되어가고 있다"고 전했다. <윈난일보>는 "이전 방방후이에서는 각지에서 몰린 사람들이 농기구와 생활용품 위주의 교역을 했었지만 오늘날에는 자신이 키운 화초와 수목이 대량 거래되어 윈난 원예산업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무궈준은 "외부인들에게 리장은 단순히 전통민가 안에 장사하는 식당·술집·상점 등이 현란한 관광지 정도로 인식되고 있다"면서 "리장은 30만에 불과한 나시족이 주변 여러 강대 민족과 어울려 살면서 농경생활을 해나가는 생존공간"이라고 강조했다. 무는 "리장 사람들은 방방후이를 통해 자신의 조상들이 어떻게 살아왔고 다른 마을에 사는 주민들과의 소통 방법을 배우고 타민족을 이해했다"면서 "방방후이는 봄을 알리는 축제인 동시에 리장 공동체를 유지하는 중요한 행사"라고 말했다.

 

단순한 관광지가 아닌 다양한 민족이 공존하는 고산도시 리장. 리장의 봄은 방방후이와 함께 시작됐다.

 


태그:#윈난성, #리장고성, #리장, #방방후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