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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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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약을 받은 폐비 윤씨가 정인(情人) 김처선의 등에 업혀 생의 최후를 맞이했다. 왕비와 내시의 관계만 아니었다면 둘만의 세계를 향해 야반도주라도 감행했을 것 같은 두 사람은 그렇게 마지막 이별을 나누었다. 지난 19일 <왕과 나> 제51회에 방영된 장면이다.

차라리 <왕비와 나>라고 명명했더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르는 이 드라마에서 그저 눈빛으로만 연모의 정을 나눈 두 사람, 김처선과 폐비 윤씨. 그들의 실제 관계는 어떠했을까? 실제로도 그들은 ‘플라토닉 러브’의 주인공들이었을까?

목숨을 걸지 않고서는 결코 시도할 수 없는 두 사람의 사랑을 보면서,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시청자들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드라마 상의 두 연인이 잘못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없었겠지만, 그런 일이 실제 역사 속에서 벌어졌을 것이라고 믿은 사람들도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단정하고 넘어가기엔 어딘가 개운치 않다. SBS 홈페이지의 <왕과 나> 코너에서는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스스로 거세한 내시의 감동적 일대기’라는 문구까지 걸어놓지 않았는가? 손톱만큼의 가능성이라도 있으니까, 드라마에서 저토록 ‘확신’있게 두 사람의 사랑을 묘사하는 건 아닐까? 그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었는가를 타진하기 위해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쟁점을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쟁점은 김처선이 과연 연인을 위해 내시가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김처선이 내시가 된 이유를 알려주는 기록을 찾기란 쉽지 않다. 내시들이 어떤 동기로 입궁했는지를 기록할 만큼 조선시대에 종이가 넉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산>에서 방영된 것처럼 불필요한 문서를 물에 씻어서 재활용할 정도로 종이를 귀중히 여기는 시대였다.

사정이 이와 같기 때문에, 그가 내시가 된 과정은 다른 일반적인 경우에 준해 추정할 수밖에 없다. 궁궐에 있는 연인을 위해 내시가 된다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김처선의 경우도 그렇게 상식적인 수준에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내시 김처선은 조선 제5대 군주인 문종 재위기(1450~1452년)에 영해(寧海)로 유배된 적이 있다. 이것은 그가 이미 제4대 군주인 세종 재위기(1418~1450년) 때부터 궁궐에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편, 윤씨가 궁궐에 들어간 때는 제9대 군주인 성종 때였다.

만약 이 둘이 정말로 사랑하는 사이였다면,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스스로 궁궐에 들어간 궁녀의 감동적 일대기'가 되었을 것이다. 김처선이 윤씨보다 훨씬 먼저 입궁했으므로 그렇게 보는 게 마땅할 것이다. 따라서 김처선이 연인을 위해 스스로 거세를 선택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소년 김처선 역의 주민수와 소녀 윤소화 역의 박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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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유에서 거세했건 간에, 궁궐에 함께 있는 동안에 두 사람이 연모의 정을 나누었을 수는 있지 않을까? 그럴 가능성을 규명하기 위해, 김처선과 윤씨의 나이차를 살펴보기로 한다. 이것이 둘째 쟁점이다.

물론 국경도 초월하는 사랑이, 연령이라고 초월하지 못하란 법은 없다. 그렇다 해도 나이차는 남녀관계에서 주요 조건 중 하나다. 김처선과 중전 윤씨는 몇 살 차이였을까?

그런데 애석하게도, 김처선(1505년 사망)과 윤씨의 출생연도(1482년 사망)를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보다 많은 자료를 살펴보지 못한 탓일 수도 있겠지만, 실록에서는 그것을 확인할 수 없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가지 정황자료를 바탕으로 두 사람의 나이차를 추정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이, 문종 재위기(1450~1452년)에 죄를 지어 유배를 당할 정도였다면, 김처선이 1430년대나 그 이전에 출생했다고 보는 게 상식적일 것이다. 한편, 1476년에 연산군을 낳은 윤씨는 1450년대 이후에 출생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성종이 1457년 태생이므로 윤씨는 1450년대 혹은 1460년대 사람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두 사람은 20년 정도의 나이차가 나게 된다. 나이차가 그보다 컸거나 작았을 수도 있다. 여기서는 중간치를 고려한 것이다. 20년 정도의 나이차가 나도 얼마든지 사랑할 수는 있겠지만, 일반적 상식으로는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신체적 흠결'에도 불구하고 젊은 중전의 마음을 끌 수 있으려면 적어도 젊음이라는 조건은 갖추었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나이차가 크다 해도 김처선이 대담하게 중전 윤씨에게 접근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별다른 매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열 번 찍어 성공했을 수도 있다. 그럴 가능성을 규명하기 위해 성종 시기에 그에 대한 평판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이것이 셋째 쟁점이다.

2월 16일자 기사인 '수양대군의 속을 썩인 자유분방한 내시, 김처선'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세조 집권기까지만 해도 김처선은 툭 하면 말썽을 일으키는 '고문관' 내시였다. 그런데 <왕과 나>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성종 시대에 들어서면서 김처선은 왕실의 사랑을 받는 인물이 되었다. 왕명을 잘 전달하고 대비의 병을 낫게 하는 등의 공로가 있었기 때문이다.

김처선이 이처럼 성종대에 왕실의 신임을 받았다면, 그가 성종의 부인인 중전 윤씨와 연모의 정을 나누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봐야 할 것이다. <왕과 나>에서처럼 그들이 '소문난 연인'이었다면, 김처선은 성종보다도 훨씬 먼저 이 세상을 하직했을 것이다. <왕과 나>에서 그가 무사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작가의 은덕'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사료상으로는 김처선과 중전 윤씨의 사랑을 확인할 길이 없다. 마지막으로 이번에는 두 사람의 접촉 여부에 관해 살펴보기로 한다. 애정관계를 추정케 할 만한 접촉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것이 넷째 쟁점이다.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따르는 김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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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처선과 윤씨가 같은 시기에 궁궐에 있었고 또 김처선이 성종대에 왕실의 신임을 받았으므로, 두 사람이 접촉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두 사람이 전혀 모르는 사이였을 가능성은 전무하다고 해도 될 것이다. 문제는, 두 사람의 애정관계를 추정케 할 만한 접촉 기록이 남아 있는가 하는 점이다.

김처선이 윤씨와 관련하여 사료에 언급된 사례로는 <성종실록> 성종 10년(1479) 6월 3일자 기사를 들 수 있다. 성종이 김처선을 시켜 대비에게 윤씨 폐비에 관해 보고했다는 기록이다. 사료상으로 볼 때, 김처선과 폐비 윤씨가 관련된 사례로는 이 정도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 정도의 기록으로는 두 사람의 애정관계 여부를 추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 김처선이 사약 마신 폐비 윤씨를 등에 업는 <왕과 나> 제51회 장면은 어떻게 된 것인가? <성종실록> 성종 13년(1482) 8월 16일자 기사에 따르면, 성종 임금이 윤씨의 사사 현장에 파견한 내시는 김처선이 아니라 조진이라는 인물이었다. 사료상으로 볼 때에, 김처선이 윤씨의 최후를 목도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위의 네 가지 쟁점을 검토한 결과, 내시 김처선과 중전 윤씨가 신분을 초월한 플라토닉 러브를 나누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두 사람은 한때 후궁과 내시로서, 중전과 내시로서의 공식적 관계밖에 갖지 않았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중전 윤씨 앞에서 고개를 숙인 실제의 김처선이 마음속으로 '엉큼한 생각'을 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랫사람인 김처선을 대하는 중전 윤씨가 혹시라도 '부적절한 생각'을 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사료상으로는, 두 사람이 비록 눈빛으로라도 사랑을 나누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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