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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의 그녀처럼 언제나 제일먼저 떠오르고 기억되는 스님은 어릴 적 고향마을에서 보았던 두 분 할머니 스님이다.
 첫사랑의 그녀처럼 언제나 제일먼저 떠오르고 기억되는 스님은 어릴 적 고향마을에서 보았던 두 분 할머니 스님이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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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참배한 절이 방방곡곡 1000여 곳쯤 되니 적지 않은 절을 다녀왔다. 그렇게 많은 절을 다녀왔음에도 '절'과 '스님'을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두 분 할머니스님이 있다. 중년의 나이에 뒤돌아보는 첫사랑의 그녀처럼 언제나 제일먼저 떠오르고 기억되는 스님은 필자가 태어나 소년기를 보낸 고향마을에 있는 작은 암자를 창건한 두 분 비구니스님이다.

무섭고 신기하게 보였던 두 분 할머니 스님

희뿌옇게 기억되는 스님들의 모습은 여느 할머니처럼 쪽 지어 비녀를 꽂은 머리가 아니라 햇빛이 반사될 만큼 빡빡 머리였다. 치마저고리를 입는 게 아니라 잿빛 바지저고리를 입고 사는 스님, 스님이라기보다는 그냥 무서운 윗동네 할머니였다.

논두렁에서 뛰어놀다 다리를 접질려 절뚝거리고, 급체라도 해 명치끝이 아프다고 하면 언제나 커다란 침통을 들고 나타나니 무서웠고, 알 수 없는 우환이 몇 며칠 계속되는 집이 있으면 징과 북을 들고 와 경을 읽어 주던 할머니였기에 신기했었다.

두 분 스님의 어깨에는 항상 무거워 보이는 바랑이 메어 있었다.
 두 분 스님의 어깨에는 항상 무거워 보이는 바랑이 메어 있었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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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와 '팔영', 지금 생각하니 그게 스님들의 법명이었지만 그때는 대개의 아주머니들이나 할머니들의 이름 대신 통용되던 택호(친정동네를 호칭으로 사용하였음. 서울이 친정인 경우 ‘서울댁’이라고 호칭)쯤으로 생각하며 태조할머니, 팔영이할머니라고 불렀었다.

나이는 더 많았지만 키가 작고 호리호리 했던 태조할머니, 요즘 말로하면 글래머로 훤칠한 키에 기골이 장대했다고 기억되는 팔영이할머니의 모습이 나그네가 기억하는 두 분 스님에 대한 첫인상이며 모습이다.

바랑을 멘 모습으로 기억되는 할머니 스님

나그네가 기억하는 스님들의 또 다른 모습은 언제나 바랑을 멘 모습이었다. 뛰어놀다보면 저녁쯤 거르는 것은 다반사였던 악동시절, 숨바꼭질을 하느라 늦은 시간에 동네입구에서 이따금 뵙던 두 할머니의 등에는 보기에도 무거울 만큼 축 처진 바랑이 언제나 매달려있었다.

그렇게 탁발을 하여 등짐으로 지어 나른 보시물로 지었다는 절이다.
 그렇게 탁발을 하여 등짐으로 지어 나른 보시물로 지었다는 절이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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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의 규모는 대웅전과 반 평정도가 될 칠성당이 전부다.
 절의 규모는 대웅전과 반 평정도가 될 칠성당이 전부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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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가 있긴 하지만 기도하러 오는 사람이라면 스님과 함께 생활해야 한다.
 요사가 있긴 하지만 기도하러 오는 사람이라면 스님과 함께 생활해야 한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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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넘고, 강을 건너 이 동네 저 마을을 찾아다니며 하루 종일 목탁을 두드리며 탁발한 보시물, 요즘처럼 현금이 아니고 곡물이 대부분이었을 시주물이 가득 담겼을 바랑은 무거운 모습이었다. 체구가 작아 더더욱 힘들어 보이는 태조할머니의 등에 매달려 있는 쌀자루처럼 생긴 바랑은 구부정한 할머니의 등을 짓누르는 억압처럼 보였다.

두 분 스님이 돌아가신 한 참 후, 군대를 다녀와서야 알았지만 어렸을 때 보았던 할머니스님들의 그런 모습, 하루에도 몇 십리를 걷는 발품으로 탁발하여 모은 시주금, 어깨가 욱신거릴 만큼 등짐으로 지어 나른 좁쌀 한 됫박, 보리쌀 한 줌은 절을 짓는 서까래가 되었고 절을 보수하는 기왓장이 되었었다.

바랑으로 지어나른 시주물로 지은 절

여기저기서 불사를 하느라 이런저런 방법으로 보시를 받고 있지만 나그네가 기억하는 첫 절은 이렇듯 두 할머니스님의 발품과 탁발로 모은 시주물로 지은 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몇 해를 탁발해 대웅전을 짓고, 몇 해를 시주받아 단청을 하고 탱화를 모신 절이 나그네가 보며 자란 고향마을의 대성암이니 이 절은 두 분 할머니스님들의 평생이며 전부였다.

젖은 손으로 잡으면 쩍하고 문고리가 달라붙을 만큼 추웠던 겨울에도 정화수 한 그릇 떠 놓고 석가모니부처님이나 관세음모살님을 찾던 지성스런 사람들이 다니는 절이다.
 젖은 손으로 잡으면 쩍하고 문고리가 달라붙을 만큼 추웠던 겨울에도 정화수 한 그릇 떠 놓고 석가모니부처님이나 관세음모살님을 찾던 지성스런 사람들이 다니는 절이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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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들의 절은 지금도 청빈하다. 꼭 모셔야할 부처님만 모셨을 뿐 별다른 게 없다. 불이문이나 사천왕문은커녕 일주문도 없고, 범종이나 법고, 운판이나 목어를 매달 전각도 없다. 뿐만이 아니다. 아미타부처님을 모시는 극락전, 미륵부처님을 모셔놓는 미륵전, 관세음보살님이나 지장보살님을 모시는 관음전이나 지장전도 없다.

극진히 모시지 못할 거며 제불보살님들만을 모셔놓는 것조차 탐욕이라는 듯 석가모니부처님을 모셔놓은 대웅전, 대여섯 평쯤 되는 대웅전과 한 평도 안 될 것 같은 칠성당이 전부다. 스님만이 기거할 별도의 요사채도 없다. 기도를 하러오는 사람이면 기꺼이 맞아들이는 스님의 공간, 승속을 구분하지 않는 불이의 요사채만 있을 뿐이다.

구경거리가 없으니 여느 절들처럼 찾아드는 구경꾼들도 없다. 애절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찾는 불자들만 찾는 오롯한 도량이다.

동네 꼭대기에 자리하고 있어 첩첩산골에 있는 산중 산사는 아닐지라도 승속의 경계를 어우르는 속세속의 도량이니 고향사람들이라면 종교에 관계없이 누구나가 공유하는 추억의 발심처며 마음의 귀의처다.

변변한 시계조차 없던 60년대, 아침 예불을 올리며 치는 스님의 목탁소리는 시골마을의 새벽을 열어가는 여명의 소리였고, 저녁에 치는 소종소리는 놀이 삼매에 빠진 개구쟁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는 석양빛 울림이었다.

할머니스님을 닮은 노보살님들의 믿음

할머니스님들이 바랑탁발로 일군 절이라서 그런지 절을 다니는 사람들도 요란스럽지 않았다. 큰돈을 선뜻 보시할 형편은 아니어도 부처님을 예경하는 마음만큼은 무수무량이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때 보았던 할머니들의 믿음(불심)이 믿음중의 믿음이었다.

장문의 금강경은커녕 짧은 반야심경조차 제대로 독경하지 못하는 노보살님들이였지만 부처님에 대한 예경과 믿음은 교리를 논하고 경문을 설파하는 여느 불자에 못지않았다. 조금은 어리석다고 할 만큼 한 점 의심하지 않고 부처님을 믿었으니 진지하고 지극하였다.

바랑을 짊어지고 다니던 두 분 스님의 창건 공덕은 돌비석으로 망부석처럼 남아있다.
 바랑을 짊어지고 다니던 두 분 스님의 창건 공덕은 돌비석으로 망부석처럼 남아있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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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 젖은 손으로 잡으면 쩍하고 문고리가 달라붙을 만큼 추웠던 겨울에도 정화수 한 그릇을 떠 놓고 석가모니부처님이나 관세음모살님을 찾던 지성이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가을걷이를 해 방아라도 찧으면 부처님께 올릴 마지쌀과 제사를 지낼 때 올릴 메 쌀을 먼저 챙길 만큼 부처님과 조상님을 섬기던 정성이 그들에겐 있었다. 빌었던 것인지, 기도했던 것인지는 모르지만 무조건이라고 해야 할 만큼 부처님을 믿고 의지했던 모습들이다.

집안에서 언성이라도 높이는 일이 생기면 남을 탓하기 전에 당신이 정성을 다하지 못해 부정한 자신을 탓하던 모습들이야 말로 하심(下心)이며 부처님의 마음을 닮으려는 선(禪)이었다.

적적 열반에 든 할머니스님, 이미 귀객이 된 할머니보살님들이야 더 이상 보이지 않지만 그들이 흔적처럼 남기고 간 청정함이야말로 나그네가 본 첫 불심이며 닮아가야 할 불자의 마음이다.

고드름처럼 꽁꽁 얼어있었어도 돌비석에서 올라오는 느낌은 또 다른 고향의 모습이며 마음의 화롯불이었다.
 고드름처럼 꽁꽁 얼어있었어도 돌비석에서 올라오는 느낌은 또 다른 고향의 모습이며 마음의 화롯불이었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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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에게 있어서는 절과 스님의 대명사로 떠오르는 고향 절 대성암, 어느 여인을 만나도 떠오르는 첫사랑의 그녀처럼 어느 산사엘 가도 덧그림처럼 떠오르는 고향 절을 설날아침 차례를 지나러 가는 길에 들러보았다.

동심도 둘러보고 불심도 추슬러보려 찾아간 절은 고요하기만 하다. 추녀 끝에 달린 수정고드름처럼 두 분 스님의 건립공덕을 기리는 작은 돌비석만 겨울바람을 맞고 있다. 손바닥으로 쓰다듬어보는 돌비석에서 쭐쭐 빨던 엄마젖이 느껴진다. 고드름처럼 꽁꽁 얼어있는 돌비석에서 올라오는 느낌은 또 다른 고향의 모습이며 마음의 화롯불이었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본 절과 스님의 모습은 과거도 현재도 청빈하기만 한 도량일 뿐이다. 첫사랑처럼 떠오르는 두 분 할머니스님의 모습에, 모은 두 손과 가슴은 행복하다.

덧붙이는 글 | 월간 불교에도 게재된 글의 일부를 수정한 내용입니다.



태그:#비구니, #바랑, #탁발, #걸망, #시주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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