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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봉고원의 어느 마을을 가나 어귀마다 한쌍의 돌장승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사진은 아영면 의지마을 입구에 선 돌장승입니다.
▲ 마을 지킴이, 돌장승 한쌍 운봉고원의 어느 마을을 가나 어귀마다 한쌍의 돌장승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사진은 아영면 의지마을 입구에 선 돌장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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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와 경상도가 만나는 곳

충분히 탄력을 받았는데도 자동차로 여원재 오르는 길이 만만치 않습니다. 강원도 한계령에 버금가는 구절양장의 고갯길입니다. 남원에서 경상도로 넘어가자면 만나게 되는 운봉 땅이 바로 그 고개 너머입니다.

한참동안 가파른 고갯길을 올랐으니 내리막이 있을 법도 하건만 외려 넓은 들판만 눈앞에 아득하게 펼쳐집니다. 저 멀리 지평선이 보일 만큼 넓은 땅입니다. 이름 하여 '운봉고원'입니다.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지리산 준령을 병풍 삼아 품 좋게 앉은 땅입니다.

전북 남원시 아영면 유곡마을 입구에 선 한쌍의 돌장승입니다. 이곳에 서면 지평선이 보일 만큼 넓은 벌판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이곳에서 조금만 가면 경상남도 함양군입니다.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계인 셈입니다.
▲ 유곡리 돌장승 전북 남원시 아영면 유곡마을 입구에 선 한쌍의 돌장승입니다. 이곳에 서면 지평선이 보일 만큼 넓은 벌판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이곳에서 조금만 가면 경상남도 함양군입니다.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계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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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의 한 가운데에 서서 지리산을 올려다보면 그것이 산의 능선인지 구름인지 헛갈릴 만큼 장쾌한 눈맛을 주는데, 운봉(雲峰)이라는 마을 이름도 그런 느낌에서 비롯된 지명이지 싶습니다. 적어도 이 마을에서 지리산은 운봉과 동의어입니다.

이웃한 인월과 아영을 아우르는 운봉고원은 행정구역 상 남원시에 속해있지만, 사투리가 섞여 쓰일 만큼 전라도와 경상도의 실질적 경계입니다. 어쩌면 운봉고원의 끝자락인 아영에서 경상도 함양 땅으로 넘어가는 길은 남원시내와 운봉을 잇는 여원재와는 비교가 안될 만큼 손쉽고 가까워 경상도라 해야 더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유곡마을 돌장승 중 한 기는 음습한 그늘에 숨어 서 있습니다. 채 1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큼지막한 창고건물이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의 눈길 한 번 받지 못한 탓인지 표정조차 어둡습니다.
▲ 방치된(?) 돌장승 한 기. 유곡마을 돌장승 중 한 기는 음습한 그늘에 숨어 서 있습니다. 채 1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큼지막한 창고건물이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의 눈길 한 번 받지 못한 탓인지 표정조차 어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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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을에서 지리산과 운봉은 동의어

어쨌든 지리적 여건이 이렇다보니 예로부터 이곳은 목가적인 풍광과는 어울리지 않게 크고 작은 전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전해오는 얘기에 따르면,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가 이곳에서 각축을 벌였으며, 고려 말 이성계가 섬진강을 따라 올라온 왜구를 격퇴한 황산대첩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가깝게는 조선 말 동학농민전쟁 시기 경상도로 진출하려는 농민군과 그 예봉을 꺾으려는 이 지방 민보군이 이곳에서 격렬하게 싸웠으며, 6·25 전쟁 때는 빨치산과 토벌대와의 밀고 밀리는 혈전이 벌어진 곳이기도 합니다.

운봉읍사무소 뒤편에 조성된 서림공원 안에는 당산나무, 서천리 돌장승 한쌍을 비롯해 각종 비석과 조형물들이 가지런히 세워져 있습니다. 각기 다 사연이 있을 테지만, 별 관계가 없는 것들의 집합소입니다.
▲ 서림공원의 석물들 운봉읍사무소 뒤편에 조성된 서림공원 안에는 당산나무, 서천리 돌장승 한쌍을 비롯해 각종 비석과 조형물들이 가지런히 세워져 있습니다. 각기 다 사연이 있을 테지만, 별 관계가 없는 것들의 집합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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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운봉고원을 '돌장승의 밭'이라고 합니다. 이곳을 돌아다니다보면 발아래 밟히는 돌멩이만큼이나 많은 게 돌장승인 까닭입니다. 마을 어귀마다 예외 없이 다정하게 한 쌍이 돼 서 있는데, 가히 운봉의 상징이라 할 만합니다.

마모가 심해 몸체에 조각된 글씨를 읽어내기가 쉽진 않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서운 얼굴 표정만큼이나 섬뜩한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진압한다거나(鎭), 귀신을 쫓아낸다(逐鬼)는 등의 글자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돌장승의 대표격인 운봉 서천리 돌장승입니다. 마을 당산나무의 수문장인 양 당당히 섰는데, 앙다문 입과 툭 튀어나온 눈망울에서 위압적인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 서천리 돌장승 우리나라 돌장승의 대표격인 운봉 서천리 돌장승입니다. 마을 당산나무의 수문장인 양 당당히 섰는데, 앙다문 입과 툭 튀어나온 눈망울에서 위압적인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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쳐다보는 이를 주눅 들게 할 만큼 험상궂은 인상의 돌장승이라지만, 조금 달리 보자면 무언가에 잔뜩 겁먹은 표정인 듯도 합니다. 벙거지 모자를 쓰고는 있지만, 톡 튀어나온 왕방울 같은 눈매에 담긴 무섭고도 슬픈 표정은 가릴 수 없습니다.

수문장처럼 마을마다 선 돌장승은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바람에서라기보다는 이곳에 전란이 끊이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존재입니다. 내남을 구별 짓는 것조차 힘겨울 수밖에 없는 전쟁의 와중에서, 화를 면하기 위해 주술에라도 기대려는 가엾은 민초들의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김개남이 이끄는 동학농민군과 맞서 싸워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로, 오른편 위 모서리가 떨어져나간 것은 동학농민전쟁이 역사적 정당성을 얻게 되면서 한때 수난을 당한 흔적입니다.
▲ 박봉양 토비 사적비 김개남이 이끄는 동학농민군과 맞서 싸워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로, 오른편 위 모서리가 떨어져나간 것은 동학농민전쟁이 역사적 정당성을 얻게 되면서 한때 수난을 당한 흔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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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장승 위치에는 규칙성이 있다

널린 게 돌장승이라지만 운봉읍사무소 너머에 있는 서천리의 그것을 빼면 쉬이 찾을 수는 없습니다. 변변한 안내판도 마련돼 있지 않을 뿐더러 정작 읍사무소에 찾아가 물어도 위치를 정확히 아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입니다. 나이 지긋한 주민들을 붙잡고 물어도 '예전엔 지천이었다'는 말뿐 별반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자동차를 타고 샅샅이 뒤져 어렵사리 돌장승들을 만났고, 위치에 있어서 예외 없는 '규칙성'도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운봉에서 돌장승을 만나려거든 무조건 읍내를 벗어나 외딴 마을을 찾아가라는 겁니다. 마을 입구마다 제주도의 정낭처럼 대문이 되어 지키고 섰을 것이니.

마을 어귀 논두렁에 버려진 채로 서 있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해서인지 심드렁한 표정입니다.
▲ 북천리 돌장승 마을 어귀 논두렁에 버려진 채로 서 있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해서인지 심드렁한 표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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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얼마 전까지만 해도 꽤 번화한 읍내 곳곳에도 많았다지만 모두 사라졌고, 형태가 반듯한 서천리 돌장승 두 기만 최근 읍사무소 뒤편에 조성한 공원 안에 고이 모셔져 있습니다. 기실 서천리 돌장승은 각종 민속 관련 서적의 표지모델로 쓰일 만큼 운봉을 넘어 전국 돌장승의 대표격입니다.

서천리 것을 제외하면 다른 것들은 사실상 방치 상태이며, 심지어는 돌장승 바로 옆에 농산물 창고를 세운 경우도 있습니다. 지금껏 마을의 지킴이로서 남부럽지 않은 대우를 받아왔을 테지만, 건물에 가려 하루 종일 햇볕 한 줌 받지 못하는 지금의 신세가 못내 처량하게 느껴집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롭게 서 있습니다. 세심한 관리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다만 안내판 하나 세워주는 관심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 권포리 장승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롭게 서 있습니다. 세심한 관리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다만 안내판 하나 세워주는 관심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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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장승만으로 다사다난한 운봉 땅의 역사를 다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고려 말 왜구가 희롱했다 하여 자신의 젖가슴을 도려낸 여자의 원혼이 서린 여원재의 전설과 운봉고원을 왜구의 피로 물들인 황산대첩은 이곳에 조선의 창업주 이성계의 범상치 않은 행적이 서려있음을 보여줍니다.

한편 아이러니컬하게도 조선의 멸망을 늦추려는 마지막 몸부림 또한 건국의 터전인 이곳에서 벌어졌습니다. 서천리 돌장승 곁에 귀퉁이가 부서진 채 서 있는 비석 하나가 당시의 역사를 말해줍니다. 이 고장 유생 박봉양의 '토비(討匪) 사적비'가 그것입니다.

여기서 '비(匪)'란 동학농민전쟁 당시 농민군을 가리키는 말로, 당시 일본을 비롯한 외세는 물론 이 나라 양반 유생들의 공통적인 인식이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박봉양이 이끄는 민보군은 남원 땅으로부터 일어나 여원재를 넘어 경상도로 향하던 김개남의 동학농민군을 막아내면서 들불처럼 타오르던 혁명의 기세를 꺾기에 충분했습니다.

봉건왕조의 마지막 몸부림이 서려 있는 곳

그러나 동학농민군 중 가장 급진적이었던 김개남 부대를 맞아 승리를 거두긴 했어도 조선의 멸망을 조금 늦추었을지언정 막아내지는 못했습니다. 임금에 대한 갸륵한 충성심과 조선 왕조에 대한 신실한 사랑으로 말미암은 유학자의 강단 있는 행동이었을 테지만 역사의 평가는 냉혹합니다.

부패와 무능으로 수명을 다한 봉건왕조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다는 겁니다. 사적비가 처음 세워질 때야 구국의 영웅으로 묘사되고 기려졌을 테지만, 동학농민전쟁이 역사적 정당성을 갖게 되면서 박봉양은 수구반동(守舊反動)으로 낙인찍혀야 했습니다.

둔기에 맞아 깨어진 듯 떨어져 나간 비석 오른쪽 귀퉁이의 상처가 그것을 말해줍니다. 언제 그리 되었는지, 또 누구의 소행인지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다만, 서천리 돌장승과 당산나무, 그리고 빨치산 토벌대를 기리는 충혼탑 등과 나란히 선 모습이 무척 데면데면하여 어색할 따름입니다.

지리산이 품어 안은 운봉고원엔 그저 스쳐 지나쳐서는 안 되는 역사가 넓고도 깊습니다. 무심하게 선 돌장승과 비석에는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아온 사람들의 삶이 고스란히 배어 있습니다. 하긴 '목기(木器)의 고장'도 이곳이고, '동편제'의 탯자리 또한 이곳이니, 운봉고원엔 볼거리가 지천입니다.

덧붙이는 글 |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



태그:#돌장승, #운봉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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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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