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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시의 아침은 오토바이 소리로 시작된다

 

 

둥둥둥…. 처음에는 무슨 들소 떼들이 몰려나온 줄 알았습니다. 1월 14일, 남양주시와 자매결연을 맺은 베트남의 빈시를 방문하기 위해 열다섯 명의 청소년들과 함께 호치민시에 도착했을 때의 첫 인상입니다. 호치민시는 패망한 월남의 수도인 사이공의 현재 지명입니다. 

 

버스에서 내린 호치민시는 무척 많은, 상상한 것보다 몇 곱은 넘는 오토바이 떼로 가득 찼습니다. 엄동의 한국에서 다섯 시간만에 옮겨온 섭씨 29도의 남국 정취도 느끼기 전에 오토바이가 먼저 달려왔습니다. 씨클로도 아니고, 아오자이 입은 소녀의 자전거도 오토바이 떼로 베트남 여행은 시작되었습니다.

 

호치민시의 첫인상은 대단히 역동적이었습니다. 거리는 소음과 더불어 지독한 매연 냄새로 들끓습니다. 입을 천으로 가리거나, 마스크를 낀 사람들이 일제히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것도 인상적인 풍경입니다.

 

거리를 달리는 것은 오토바이뿐만이 아닙니다. 앞에 수레를 매단 오토바이, 자전거, 자전거와 오토바이의 결합체, 세 발 달린 오토바이. 그야말로 거리는 온갖 탈 것들의 집합체입니다. 그냥 걸어 다니는 사람들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무엇이든 바퀴 달린 탈 것에 몸을 싣거나, 제 자리에서 쉴 때도 오토바이 위에 비스듬히 몸을 뉘고 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던 사람들이 4년 전부터 오토바이로 바꿔 타기 시작했답니다. 베트남 전체에는 약 1500만 대의 오토바이가 굴러다니는데, 호치민시에만 250만대가 있다고 합니다. 수많은 오토바이들이 서로 부딪치지 않고 굴러가는 것은 거의 곡예 수준입니다.

 

앞뒤로 탄 어른 둘 사이에 어린 아이를 끼워 태운 모습, 한 손으로 휴대폰 전화를 하면서 비좁은 틈새를 빠져나가는 모습은 보는 사람이 아찔할 지경입니다. 그렇다고 사고가 없는 것은 아니랍니다. 한 해에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이 2만5천 명 정도라고 하니, 목숨을 건 곡예가 아닐 수 없습니다.

 

 

호텔에 짐을 풀고, 버스에 올라 시내 구경에 나섰습니다. 1880년경에 프랑스의 노트르담 성당을 3분의 1로 축소하여 지었다는 노트르담 성당은 문이 열려 있고, 안에는 신도들이 앉아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사회주의 국가인 베트남에는 신앙의 자유는 있지만, 선교의 자유가 제한되어 있다고 합니다. 각자가 원하는 종교를 믿을 수는 있지만, 남에게 어떤 종교를 믿으라고 선교할 수는 없다는 말이지요.

 

이어서 도착한 곳은 예전 프랑스 총독부가 있던 건물로 월남이 패망하기 전까지 대통령궁이었고, 지금은 상업 전시장으로 쓰인다고 합니다. 1975년 4월 30일, 월맹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이곳에 진입하면서 긴 전쟁은 끝이 나게 됩니다.

 

인도차이나의 황금빛 젖줄, 메콩강

 

1월 15일. 호치민 인근의 미토시(My Tho)로 출발했습니다. 미토시는 호치민시에서 70킬로미터 떨어져 있어 버스로 두어 시간을 달려야 합니다. 한자로 ‘美土’라는 뜻의 미토시는 중국인들이 이주해 와 개척한 도시로 메콩강에서 호치민시로 통하는 포구입니다.

 

메콩강으로 가기 전에 영장사라는 절에 들렀습니다. 1849년에 지어졌다는 빈트랑(영장사)사원은 당시로서는 귀한 시멘트를 써서 지은 사찰로 중국풍의 형식과 아름다운 정원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안에 들어가보니 죽은 이들의 사진과 이름이 적힌 위패 같은 것들이 곳곳에 놓여 있었습니다.

 

사찰의 앞에는 거대한 불상이 서 있는데, 어느 여인이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바라보기도 힘들 만큼 높은 불상을 망연히 바라보고 앉아 있었습니다.

 

 

영장사를 나서서 메콩강으로 향했습니다. 총 길이 4300킬로미터에 달하는 메콩강은 중국,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을 거치는 강으로 인도차이나의 젖줄이라 불릴 정도로 그 유역은 비옥한 옥토입니다.

 

미토시와 같은 남부 지역에서는 일년에 마른 논에 네 번 볍씨를 직파하는 4기작을 하고, 중부지역은 세 번 모를 내어 심는 3모작을, 북부 지역은 2모작을 한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급격한 산업화가 이뤄지면서 농촌에서도 농사를 기피하고, 논밭에 들어선 공장에 다니는 경향이 많아졌다고 합니다.

 

베트남에는 한국이 남긴 지난날의 부끄러운 상처들이 아직도 많은데, 한국인과 베트남 사람 사이에 태어난 라이 따이한이 약 9000명 정도가 있다고 합니다. 이들에 대한 정부 차원의 대책은 없는 가운데 최근 어느 목사님이 이들을 모아 직업훈련을 시켜, 베트남에 진출한 한인기업체에 우선 취업시키는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지난 일을 굳이 되살려 추궁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관광지마다 몰려온 한국 단체관광객들이 벌이는 음주가무의 행각과 베트남 사람들에 대한 무례한 언행들을 대할 때면 내 얼굴이 먼저 붉어집니다. 경제적으로 조금 여유가 생겼다고 거들먹 거릴 수 있다고 해도 적어도 그 여유 가운데 일부가 베트남인의 고통과 참담한 역사에 기대어 있음을 새 까먹듯이 잊지는 말아야 하겠습니다.

 

 

메콩강은 그 줄기에 수많은 생명들을 먹여 살리는 넉넉함 그대로 황금빛을 띠고 있었습니다. 진흙물로 누런빛을 띠고 있지만 물 속에 흐르는 흙의 입자가 극히 고와서 그 물에 흰 옷을 빨아도 모래알이 묻거나, 누런 물이 들지 않는다고 합니다.

 

메콩강 유역은 강의 수심과 별 차이가 없는 저지역이 많다고 하는데, 큰 비가 와도 범람하는 일이 의외로 적다고 합니다. 신기하게도 큰비가 메콩강의 수위가 낮아지는 썰물 때에만 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과학적으로는 육지와 바다의 기온 차 때문이라고 하는군요.

 

열대 과일 농장으로 가기 위해 배를 탔습니다. 배 안에는 코코넛 열매가 잔뜩 실려 있었는데, 하나씩 깎아서 대롱을 꽂아 주어 과액을 먹어 보았습니다. 메콩강에는 모래 채취선과 거대한 다리를 놓는 바지선들이 어수선하니 오가고, 강가에는 수상 가옥도 보였습니다.

 

민물고기를 양식하는 가두리라고 합니다. 점심에 코끼리 귀를 닮은 엘리펀트 피시라는 물고기 튀김요리를 먹었는데, 붕어를 닮은 그 물고기를 양식한다고 합니다. 침실이 있는 큰 여객선도 지나치는데, 메콩강을 따라 캄보디아로 가는 배라고 합니다.

 

 

섬에 있는 농장에 도착해서는 좁은 수로를 6인승의 카누로 이동했습니다. 야자수 나무 사이로 배 한 척이 겨우 지나갈 만큼 좁은 수로 사이로 지나는 뱃길은 이국적인 정취를 느끼게 합니다. 농장에서는 주로 관광객을 상대로 파파야, 파인애플, 망고, 선인장 열매 등의 열대과일과 코코넛으로 만든 과자, 벌꿀 등을 팔았습니다. 소금에 찍어 먹는 맛이 이색적입니다.

 

 

호치민시로 돌아오는 길은 수많은 오토바이와 차들로 막혔습니다. 퇴근 시간 무렵의 러시아워에 붙들린 것입니다. 도저히 꼼짝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거리를 용케도 앞으로 나아가는 게 신기했습니다.

 

베트남은 일찌감치 주 5일제를 시행하고 있었고, 888제도라 하여 하루에 8시간 일하고 8시간은 자기계발, 8시간은 휴식을 취하는 일과로 짜여져 있답니다. 한낮에는 낮잠 시간이 있어서 이 시간에는 거리가 썰렁하니 빈다고 합니다.

 

베트남인들의 행복지수는 우리보다 높은 편이라고 합니다. 월 급여는 십 만원이 채 안 되지만 최근 급격한 경제 개발과 도시화에 힘입어 호치민시의 경우 부동산 임대 등의 부수입으로 월 몇 백 만원의 소득을 올리는 이들이 많다고 합니다.

 

기름값은 비싼 편이고, 자동차에도 높은 세금을 붙여 우리나라의 경차가 찻값 500만원에 세금 1300만원을 합쳐서 무려 1800만원 정도에 팔린다고 합니다. 거리에는 실제로 많은 고급 외제차가 자주 눈에 띄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호화로운 결혼식 풍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날씨가 더운 탓인지 이곳에서는 결혼식을 저녁에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식장 앞에 꽃바구니를 든 화동과 들러리들이 즐비하니 늘어서 있고, 호화롭게 꾸민 외제차가 휘황찬란합니다.

 

베트남 여성들은 여름에도 긴팔 옷을 입는다고 하는데, 흰 피부를 미인의 상징으로 여겨 햇볕에 그을리는 것을 막기 위한 몸 관리라고 합니다.

 

호치민의 생가, 빈시를 찾아서

 

1월 16일. 이번 여행의 주 목적지인 빈(Vihn)시로 떠나는 날입니다. 짐을 챙겨 탄소나트 국제공항으로 나갔습니다. 12시에 출발 예정인 비행기를 타기 위해 짐을 부치고 탑승 수속을 밟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탑승구 앞에 줄을 서 있자니 탑승시각을 10여분 앞두고, 결항이라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악천후 때문이라는 말뿐으로 아무런 대책이나 설명도 없었습니다. 이런 일이 흔한 듯 다른 탑승객들은 전혀 동요하지 않는 표정이었습니다.

 

일정에 차질이 생긴 데다가 다음날 운항 여부도 장담할 수가 없어 난감하기만 했습니다. 버스로 가자면 하루나 이틀이 걸린다는 말에 전전긍긍하다가 빈시 못 미처에 있는 다낭시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로 했습니다. 오후 2시 30분경, 다낭시로 가는 비행기를 타고 오후 5시 30분경에 도착하였습니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곧바로 버스로 이동을 했습니다.

 

늦은 시각에도 쉴새없이 마주치는 관광버스들로 인해 실내등을 켜지도 못한 채 컴컴한 밤길을 흔들리며 몇 시간이고 달린 끝에 새벽 2시 30분경에 빈시에 도착했습니다. 호텔 앞에 나와서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빈시 관계자분들을 만나니 피로도 잊혀졌습니다. 빈시는 초겨울의 날씨로 쌀쌀했습니다. 호텔 방안에 있는 온수 작동이 제대로 되지 않아 찬물로 몸을 씻고, 난방기 조절법도 몰라 그대로 몸을 웅크리고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습니다.

 

1월 17일. 빈시의 인민위원회(시청)를 방문했습니다. 두 시간의 활발한 청소년 교류 활동에 대한 의견을 나눈 뒤 빈시에 대한 소개 영상자료를 관람했습니다. 평소 다산의 저서를 탐독하였다는 호치민의 생가가 있는 빈시와 다산의 생가가 있는 남양주시 간의 청소년들의 교류는 뜻깊은 일입니다.

 

 

시의 안내로 고등학교와 중학교를 들렀습니다.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교문에 늘어선 학생들의 물결에 당황했습니다. 아마 전교생이 몰려나온 듯, 손에 장미꽃을 든 학생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한국 학생들을 에워싸고 악수를 하거나, 사인을 받으려는 표정이 흡사 인기 연예인을 만나는 팬들 같습니다.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교장실로 안내된 방문단은 학교에 대한 소개와 대화의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국제 학력 경시대회에서 일등을 한 학생이 다니고 있다는 자부심이 강했는데 실제로 이 학교는 빈시의 명문학교라고 합니다.

 

 

교복은 우리 학생들의 것과 비슷했는데, 여고생의 경우에는 아오자이를 입는 것이 특이했습니다. 베트남 전통의상인 흰색 아오자이는 인문계고교, 푸른색 아오자이는 실업계여고의 교복이라 합니다.

 

주로 남부 지역의 학교에서 착용하는 아오자이는 하노이와 같은 북부지역에서는 풍기문란하다는 이유로 착용을 금지시킨다고 합니다. 학생의 경우에는 오토바이 운행이 금지되어 있어 자전거로 통학을 합니다. 교복이나 용의규정은 엄정하여 반바지처럼 노출이 심한 옷은 대학생의 경우에도 금지되어 있다고 합니다.

 

교사의 지시는 절대적이어서 학생들은 교사의 말에 순종하여 잘 따르며, 체벌은 원칙적으로 없다고 합니다. 규정을 위반한 학생에게는 별도의 교육과 상담으로 지도한다고 합니다. 교원에 대한 평가는 학년말에 교사 상호간, 교장 등에 의해 평가된다고 합니다.

 

영어를 포함하여 프랑스어와 러시아어의 외국어교과 외에 약 11개 교과를 배우는데, 예체능 교과가 없는 점이 우리와 다릅니다. 예체능 교과는 지역 복지관에서 활동한다고 합니다. 집회결사의 자유가 제한되어 있는 까닭에 국가적으로 인정하는 단체와 구락부활동(C.A) 외에는 학생들의 집회나 동아리 활동이 금지되어 있다고 하는데 최근에는 댄스 구락부 활동이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합니다.

 

학교 시험은 거의 논술형으로 복수의 교사가 각각 5점씩 채점하여 합산하여 평가한다고 합니다. 체육 대신에 모든 학생들은 예전의 우리네 교련과 같은 군사훈련을 이수하여야 하고, 나이가 되면 군대에 입영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다만 대학생의 경우, 일년에 20일 가량의 군사훈련으로 현역 입영이 면제된답니다.

 

대학 시험은 일정한 점수에 도달하는 모든 학생의 입학을 허용하나, 입학 정원의 40% 정도만을 졸업시키는 졸업정원제가 철저하다고 합니다. 학비는 내국인의 경우 학기당 13만원 정도, 외국인은 70만원 정도라고 합니다. 대체로 베트남의 학생들은 체구가 작고, 어려 보였습니다. 한국의 청소년들에 대해 관심이 많고 우호적이었습니다.

 

이어서 방문한 중학교에서는 도서관과 실험실 등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여 둘러보았습니다. 도서관은 교실 한 칸 정도로 작고 장서수도 빈약하였으나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습니다. 과학 실험실과 컴퓨터실도 작지만 정성들여 준비되고 잘 손질되어 있었습니다. 학급당 인원은 25명 정도로 우리와 마찬가지로 담임선생님이 있다고 합니다.

 

학교 방문을 마치고, 이곳에 오는 공식 방문객들은 누구나 참례하게 되어 있는 호치민 생가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베트남 사람들이 가장 숭배하고, 친근히 여기는 호치민이 태어난 마을은 연꽃이 많이 자생하여 연꽃마을이라고 불린답니다.

 

 

베트남 전통 농가로 뵈는 생가에는 안내인이 있어 우리를 위해 자상한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호치민의 아버지는 이곳 마을에서 유일한 대학 출신이었답니다. 마을로 돌아온 그의 부친은 마을 아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고, 이에 감사하는 마을 사람들이 집을 지어 주었다고 합니다.

 

우리네 초가와 닮은 생가는 문과 벽만이 있을 뿐, 안은 그냥 흙바닥이고 한쪽에 침대와 소박한 가구들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의 부친이 직접 만들었다는 찬장과, 뒤주, 불이 나서 끄트머리가 타 버렸다는 침대가 그대로 놓여 있었습니다.

 

전쟁 중에 마을 사람들은 호치민의 생가가 폭격에 불탈까봐, 기둥만 남겨 놓고 지붕과 벽을 뜯어 보관하다가 종전 후 다시 복원하였다 하니 호치민에 대한 그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이끌던 호치민은 고향을 단 한 차례 방문했었고, 고향의 가족들도 그를 한 번밖에 만나지 못했다 합니다.

 

마을 입구에는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기념품점이 있는데, 으레 이런 곳에 있게 마련인 호치민이 그려진 기념품들이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물어 보니, 호치민의 얼굴이 그려진 상품들은 금지되어 있다고 합니다. 체게바라가 그려진 티셔츠들이 불티나게 팔리는 것과는 대조적인 일입니다.

 

빈시로 돌아와 시박물관에 들렀습니다. 빈시에 관한 자료들보다 호치민에 관한 사진자료들이 더 많았습니다. 그곳에서 베트남의 방송기자들이 찾아와 한국 청소년방문단에 대한 취재가 이뤄졌는데 방문단을 맞이하는 그들의 기대와 관심이 큰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일정이 늦어지는 바람에 저녁 늦게야 청소년 문화 교류 행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문화원에서 준비한 행사장에는 베트남 청소년들의 다양한 춤과 노래 공연이 있었습니다. 우리네 부채춤과 비슷한 화관무와 동요 율동, 재즈 댄스 같은 공연이 있었습니다. 우리 청소년들의 춤과 노래에 열광적인 박수와 환호를 보내며, 베트남 청소년들은 동방신기 등의 한국 연예인 사진을 내보였습니다.

 

홈스테이를 하게 될 베트남 청소년들과 함께 짝을 지어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막바지에는 모닥불을 피우고 강강술래 같은 원무를 추었습니다. 어른들은 베트남 전통의식인 듯 발효주를 담은 통에 짚 대롱을 꽂고 돌아가며 시음하는 의식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한국의 청소년들을 위해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준비한 게 역력한데 비행기 결항으로 일정이 늦춰져 아쉽게도 시간을 줄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행사가 끝난 뒤, 짝을 이룬 양국의 청소년들이 홈스테이를 위해 베트남 친구네 집으로 떠났습니다. 말은 잘 통하지 않았지만 신기하게도 아이들은 금세 친해졌습니다. 세상이 아이들만 같으면 낙원이 될 것 같았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남양주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베트남, #호치민시, #빈시, #미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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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동면 광대울에서, 텃밭을 일구며 틈이 나면 책을 읽고 글을 씁니다. http://sigo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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