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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하면 먼저 2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하나는 유명한 불교문화유적지 앙코르와트(Angkor Wat)이고 다른 하나는 1970년대 벌어졌던 ‘킬링필드’다.
      
캄보디아는 1세기경 카운디냐(Kaundinya)라는 인도 브라만에 의해 건설된 후난(扶南)왕국이 그 역사의 시작으로 알려져 있다. 9세기부터 13세기까지 동남아를 평정한 앙코르 왕국은 캄보디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국으로, 앙코르와트와 같은 고도로 발달된 유적을 남겼다.

1862년 베트남과 사이공조약을 체결한 프랑스는 이듬해 캄보디아를 식민지로 예속시켰는데, 현지에서 만든 책자를 보니 프랑스인들이 앙코르와트의 찬란한 문명에 감동해서 “한 번 더 가고 싶은 곳”(앙코르: Encore)이라는 의미로 이름을 이렇게 지었다고 한다.
      
진실화해위원회에 일하는 우리 일행의 출장 목적이 '대표적 민간인 학살 사례 국가인 캄보디아의 실상과 학살 이후 전개 과정 확인'에 있었기에 우리 초점은 자연히 ‘앙코르’ 보다는 ‘킬링필드’에 맞춰졌다. 출장은 지난 해 12월13일(목)부터 12월18일(화)까지 4박6일로 방문자는 김경남 위원님 포함 총 6명이었다.
      
12월14일(금) 아침 10시에 제일 먼저 방문한 곳은 유엔 지원 하에 2006년7월 설립된 국제전범재판소(ECCC)였다. 30도가 넘는 고열 속에 복잡다단한 검문검색을 거쳐 입구 안에 서있는 한 서양인에게 “어디가면 여기 대변인 피터 포스터씨를 만날 수 있을까요?” 라고 물었는데 그 서양인이 “제가 피터 포스터입니다”라고 한다.
     
ⓒ 김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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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는 유엔에서 파견된 캐나다인으로 약 30분 동안 우리 일행을 재판소 여기저기로 안내하며 설명해 주었다. 특별히 크메르 루주 정권의 제2인자였던 누온치아(80세)와 제3인자였던 이엥사리(81세), 부인인 이엥 티리트 전 사회부장관, 키우 삼판(76) 전 대통령, 카잉 켁 레우(64) 전 투올슬렝 형무소장이 구금되어 있는 건물도 보여주었다.
      
그 후 우리 일행은 재판소 행정소장실로 안내되었다. 그곳에서 소장인 션 비솟(Sean Visoth)과 부소장 미셀 리(Michelle Lee)를 접견했다. 이 재판소는 수사단계에서부터 재판에 이르기까지 캄보디아 국적 재판관과 유엔에서 임명된 재판관과 합의 하에 업무를 진행하도록 되어 있다.

특히 캄보디아 국적 재판관이 수적으로 다수지만 유엔에서 임명된 재판관의 동의 없이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이 제도를 'Super Majority'라고 부르고 있는데, 국제사회(특히 미국)가 캄보디아 국적 재판관을 신임하지 못하는데 기인한다. 우리위원회 집단희생국 사건과 연관성 측면에서 보면 현재 재판이 진행중인 전 투올슬렝 형무소장에 대한 수사와 판결은 집단 희생국 사건인 형무소 사건에 대해 법적 책임의 법리와 입증 방법 등 여러 면에서 시사점을 제시해 주었다고 본다.
      
ⓒ 김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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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는 ADHOC으로 알려진 캄보디아 과거청산을 위한 인권단체를 방문해 툰 사래이(Thun Saray) 대표를 면담했다. ADHOC은 1980년대 투옥되었던 인권운동가들에 의해 설립되어 1991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캄보디아 8개 주요 비정부인권단체 중 최초의 단체다.

인권, 민주주의, 자유의 신장을 위해 활동하는 단체로 초기에는 지방정부로부터 위협을 받기도 했다. ADHOC 역할 중 하나는 전범재판과정에서 증언이나 자료를 확보하고 증거자료를 제출하여 가해자의 처벌가능성을 높이는 것이다. 아울러 재판과정의 감시와 비판기능을 수행한다. ADHOC은 이런 가해자의 법적처벌과 피해자의 보호를 위한 법률구조활동을 통해 국가의 불법인권침해를 종식시키기 위한 인권 캠페인의 리더 역할을 수행한다. 
      
12월15일(토) 우리는 아침부터 투올슬랭 집단 학살 박물관을 방문했다. 고등학교로 사용되던 이 건물은 1976년을 기점으로 수용소로 탈바꿈했는데, 수감자들의 직업은 노동자, 농민, 엔지니어, 지식인, 교수, 선생, 학생, 장관, 외교관 등이었다. 1975년부터 1978년까지 약 17,000명의 사람들이 이곳에 수감되었는데 그 중 살아서 나온 사람은 겨우 6명이었다.

수감자들은 새벽 4시 반에 기상하여 일과를 시작하였는데 간수들로부터 평균 하루 4회씩 고문을 받았다. 고문 장면의 일부를 사진으로 찍어서 고문실 벽에 붙여두었는데 가장 끔직한 장면은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아기 엄마의 머리를 나무에 고정시키고 드릴로 뒤에서 구멍을 뚫는 사진이었다. 이 사진을 보자 너무 역겨워 토할 것만 같았다. 
      
그 후 우리는 청아익(Cheoung Ek) 집단학살 기념관을 방문했다. 이 기념관에는 크메르 루주 집권 당시 학살된 희생자들의 추모위령탑과 유해 그리고 1980년대 말 발굴했던 현장들이 있다. 1975년부터 1979년 크메르루주는 이 지역에서 약 17,000여 명의 반체제인사를 처형하였으며, 희생자들 대부분은 주로 투올슬랭 같은 수용소에서 트럭으로 옮겨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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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메르 루주 정권 붕괴 이후 1980년대 말 발굴에서 8,895구의 유해가 발견되었으며, 현재 유해는 일부 추모 위령탑에 진열되어 있고, 발굴현장은 주위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이렇게 많은 인간의 두개골을 한 번에 본 것이 처음이라 속이 느글거렸다.
      
12월 17일(월)은 주캄보디아 신현석 대사와 오찬면담을 가졌다. 신 대사는 캄보디아인들이 오랫동안 프랑스의 식민지를 당했어도 오랜 문화와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어서 결국은 독립 국가를 이룩했다고 평가했다. 한 민족에게 그 문화와 정체성을 잊지않고 유지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 번 실감하는 자리였다.  
      
오후에는 1992년 설립된 비정부기구 인권단체 LICADHO를 방문해 대표 낼리 필로지(Naly Pilorge)와 면담을 가졌다. LICADHO는 다양한 인권사례의 데이터베이스화와 편찬사업, 인권교육, 각종 인권침해에 대한 감시, 의료지원, 고문후유장애자 복귀서비스 및 고문반대운동, 여성 및 어린이인권 신장운동과 국가인권위원회 설립준비를 하고 있는 단체다.

낼리 여사는 전범재판소를 “국제사회의 압력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정치적 쇼’ 이며 꼭두각시에 불과하다”고 맹렬히 비난하였다. 그래서 LICADHO는 과거보다는 ‘지금 여기서’ 벌어지는 인권문제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번 출장을 통해서 필자는 캄보디아의 과거청산이 쉽지 않은 이유에 대해 이런 생각이 들었다.

첫째, 정치적으로 훈센 현 총리를 비롯해 크메르 루주와 연루되었던 인물들이 정치적 주요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점.
둘째, 경제적으로 대다수 국민이 호구지책과 열악한 생활고로 과거사 문제에 정신적 여유를 할애할 수 없는 실정.
셋째, 사회적으로 많은 수의 가해자 처벌시 내전이 우려되므로 현재 수준의 극소수 수뇌부에 대한 가해자 처벌이 사회 안정을 위해 바람직하다고 정부와 비정부관계자가 판단한다는 점.
넷째, 문화적으로 모든 국민이 크메르 루주와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어 있는 상황에서 누구를 비난하기보다는, 국민 90% 이상이 불교인인 불교국가답게, 과거에 대한 무관심 나아가 용서와 화해를 추구하고 있는 상황.

이런 이유로 인해 캄보디아에서의 과거청산은 쉽지 않은 것으로 판단되었다. 

많이 느끼고 배운 출장이었지만 귀국길의 마음이 밝지만은 않았다. 찬란한 앙코르 와트의 평화스러운 불교문화를 지닌 나라이면서, 동시에 불과 3년 만에 약200만 명의 무고한 생명이 학살된 킬링필드의 나라. 선악이 혼재된 인간의 양면성을 극단적으로 느끼게 해 준 여행이었다.


태그:#캄보디아, #과거사, #전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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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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