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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치동은 그나마 영어교육환경이 좋다고 평가받는다. 그렇다면 이 지역 학생들은 이명박 차기 정권의 영어교육방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사진은 대치역 입구 표지판.
▲ "여기는 대치동, 대치역" 대치동은 그나마 영어교육환경이 좋다고 평가받는다. 그렇다면 이 지역 학생들은 이명박 차기 정권의 영어교육방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사진은 대치역 입구 표지판.
ⓒ 신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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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차기 정권이 영어교육강화방안을 놓고 좌충우돌하고 있다. 영어몰입교육을 실시하겠다더니 반대 여론이 만만치 않자 ‘그런 방안을 발표한 적 없다’며 슬그머니 꼬리를 내린다.

영어교육을 제대로 하겠다는 데 대해 반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방향 자체까지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문제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여론도 수렴하지 않고 마치 혁명하듯 설익은 정책을 밀고 나간 데 있다.

학교 현장과 영어 교육 실태를 정확하게 진단한 뒤에 거기에 맞춘 정책을 내놓아야 한다. 그런데 이명박 차기 정권은 이 모든 것을 무시했다. 정말로 오만하게 행동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영어교육을 능률적으로 하고 싶으면 우선 학생들의 이야기부터 들어봐야 한다.

이들의 영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영어 공부에서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 영어 교사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영어 공부의 필요성을 얼마나 느끼고 있는지,  어떤 방안이 가장 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지에 대해 점검해야 한다. 교육 주체인 학생들을 고려하지도 않고 책상 머리에서 만든 정책은 부실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기자는 지난 주말 서울 대치동 학생들에게 이명박 차기 정권의 영어교육강화방안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아래에 등장하는 학생들은 우리나라에서 명문 중의 명문으로 꼽히는 대치동의 어느 중학교 3학년 학생들이다.

이 학교에는 영어유치원 출신이거나 조기유학을 다녀왔거나 영어 사교육을 받아 영어 실력이 출중한 학생들이 많다고 한다. 이를테면 우리나라에서 그나마 ‘영어 교육 환경’이 좋은 지역의 학생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름을 밝혀도 좋다는 학생들이 있었지만 취재원 보호를 위해 예명을 썼다. 결정적으로 어색한 문맥만 가다듬어 학생들의 이야기를 그대로 소개했다. 필요한 부분만 발췌하여 기사를 쓰면 이들의 생각이 온전하게 전달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영어몰입교육방안을 철회한 것과는 별도로, 영어교육정책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학교 현장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중요하다. 이 학생들의 발언이 열심히 노력하는 영어 교사들의 힘을 빠지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상처는 덮어두지 말고 드러내서 치료해야 한다.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서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풀린다.

학원들이 즐비하게 들어선 대치동의 한 학원 빌딩.
▲ "대치동 학원 건물" 학원들이 즐비하게 들어선 대치동의 한 학원 빌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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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선생님 발음이 마치 독일어 구사하는 것 같다"
이재학 (예명·대치동 ㄱ중학교 3학년)

우리 학교에는 영어를 잘하는 아이가 많다. 그런데 영어를 잘하는 선생님은 극히 드물다. 우리 학교 영어 선생님들은 모두 발음이 좋지 않다. 선생님들이 영어 발음을 낼 때는 마치 독일어를 구사하는 것처럼 들린다. “정말 영어 선생님 맞아?”라고 의심할 정도다. 우리말로 하는 수업도 못 알아 듣겠는데 영어로 하면 얼마나 이상할까.

우리 학교에는 영어회화 시간이 있다. 이 수업을 진행하시는 선생님은 작년까지만 해도 우리말로 수업하셨다. 하지만 우리 학교에서 가장 실력이 있는 분이기에 2007년부터 영어로 회화 수업을 시작하셨다. 아무래도 우리말로 하는 것보다 속도도 느리고 우물쭈물하는 기색도 역력하셨다. 수업 분위기는 최악이었다. 마치 선생님 혼자 수업하시는 것 같았다. 이런 식으로 진행되다보니 진도를 절반 밖에 못나갔다. 결국 이 수업은 한 달 만에 끝났다. 다시 우리말로 수업한 것이다.

영어몰입교육은 말도 안 되는 생각이다. 만약 영어몰입교육을 한다면 엄청나게 큰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첫째로 공교육에서 지도하는 영어 수준이 높아지기 때문에 거기에 맞추기 위해서 엄청나게 많은 사교육비가 들 것이다. 둘째로 학교 선생님의 실력이 따라주지 않기 때문에 영어 교사를 수입할 수밖에 없다. 셋째로 학생들 사이에 엄청난 격차가 벌어질 것이다. 영어수업을 잘 흡수하는 아이는 효과가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아이들에겐 치명적이다.

지하철 3호선 도곡역에서 대치역으로 향하는 남부순환로와 주변 건물 풍경. 건물의 상당수는 학원으로 들어차 있다.
▲ "대치동 거리 풍경" 지하철 3호선 도곡역에서 대치역으로 향하는 남부순환로와 주변 건물 풍경. 건물의 상당수는 학원으로 들어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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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선생님보다 영어를 더 잘한다"

최효리 (예명·대치동 ㄱ중학교 3학년)

우리 학교에는 영어교육을 어렸을 때부터 받거나 아예 외국에서 어학연수를 한 아이가 많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학생은 영어 시간에 다른 과목 숙제를 하거나 책상이 침대인 것처럼 가방을 베고 잠을 잔다.

수업시간이 아니라는 듯이 친구들끼리 큰소리로 잡담한다. 이럴 때마다 선생님들께서 지적하지만 아이들은 오히려 선생님께 성을 낸다. ‘우리가 선생님보다 더 나은 영어 실력을 가지고 있다’면서 선생님을 깔보듯이 말이다.

영어 선생님들이 영어로 수업한다고 하자. 이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배우는 것이 영어이기 때문에 영어로 수업을 하면 효과가 클 것이다. 하지만 다른 과목들을 생각해 보자.

초등학교 때나 중학교까지는 어느 정도 수업이 가능할 수 있다. 하지만  고등학생들의 경우 어려운 과목들을 영어로 공부하게 되어 학습분량이 두 배가 되고, 신체적·정신적으로 힘들어진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역사를 굳이 영어로 배울 필요가 있을까?

나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내놓은 영어몰입교육에 대하여 강력히 반대한다. 지금 학교에서는 영어를 잘하는 학생들 때문에 선생님들이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아무리 수업을 열심히 해도 아이들이 무시하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선생님이라도 수업하기 싫을 것이다. 그런데 모든 과목을 영어로 진행된다면 다른 과목 선생님들은 학생을 가르치기 위해 영어를 또다시 공부해야 한다. 기껏 영어를 공부해서 가르쳐도 잘못하다간 아이들의 놀림거리가 될 수도 있다.

만약 선생님들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하자. 그렇게 되면 학생들은 국사 시간에도 억지로 만들어낸 영어 용어들을 공부해야 한다. 시간낭비를 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영어가 중요하지만 이렇게까지 무리한 정책으로 학생과 선생님들을 힘들게 해야 할까. 우리나라 정책은 정말 대책이 없다.

대치동 인근의 도곡동도 사교육 핵심지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사진은 대치동에서 바라본 도곡동의 아파트촌.
▲ "도곡동도 사교육 핵심지역" 대치동 인근의 도곡동도 사교육 핵심지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사진은 대치동에서 바라본 도곡동의 아파트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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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쓴 영어편지가 문법적으로 틀리네요"
김예신 (예명·대치동 ㄱ중학교 3학년)

내가 미국 가기 전에 다녔던 중학교에는 연세 많은 남자 선생님이 영어를 담당하셨다. 그 선생님은 단어를 외워오라고 강요하셨다. 그때, 아이들은 이것을 거의 외우지 않았다. 한번은 그 선생님께서 쓰신 영어 편지에 영문법이 틀리게 적힌 경우도 있었다. 서울이 아닌 다른 곳이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아이들의 협조도 없을 뿐더러 선생님의 영어 실력 또한 영어로만 수업을 할 수준이 되지 못했다.

지금 내가 다니는 대치동의 중학교에는 외국에서 살다 온 아이들이 많다. 아예 유학 가는 아이도 많다. 우리 담임 선생님께서는 영어를 담당하신다. 우리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지문을 해석하거나 어려운 것을 설명할 때를 제외하고는 영어로 수업하려고 노력하신다. 어학연수를 잠시나마 다녀오셔서인지 발음은 좋으시다. 하지만, 그런 선생님들은 많지 않다. 중학교 2학년 때 영어 선생님은 발음도 엉망이었고, 영어로 수업을 할 만큼이 실력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학생들이 더 발음이 좋아보였다.

현재 상황에서 영어몰입교육은 무리다. 영어 시간만 영어로 수업하는 것도 힘든 판에 과학, 수학 등을 어떻게 영어로 하겠는가? 우선, 그렇게 학생들을 가르칠 만한 선생님들이 없다. 모든 영어 선생님이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대부분이 지금 우리와 같은 방식 즉, 주입식으로 공부해서 문법은 잘 할 줄 몰라도 대화, 듣기 면에서는 부족할 것이다. 둘째로, 제대로 영어 수업을 할 수 있는 선생님들이 있더라도 아이들의 실력차가 있기 때문에 문제가 많다. 이런 교육을 해도 못 따라올 아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이들은 또 사교육에 의존할 것이다. 학생의 입장에서건 교사 의 입장에서건 이 방안은 성립하기 힘들다.


"일본 사람들은 영어 못하는데 왜 경제대국이 됐나요"
이태백(예명·대치동 ㄱ중학교 3학년)

대치동에서 바라본 타워팰리스. 이명박 차기 정권의 영어교육강화방안이 오히려 상류층에게 더 유리한 정책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이 같은 지적을 잠재울 수 있는 차기 정권의 대책은 과연 무엇일까.
▲ "타워팰리스! 타워팰리스!" 대치동에서 바라본 타워팰리스. 이명박 차기 정권의 영어교육강화방안이 오히려 상류층에게 더 유리한 정책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이 같은 지적을 잠재울 수 있는 차기 정권의 대책은 과연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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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 당선자가 2010년부터 영어몰입교육, 즉 고등학교의 모든 과목을 영어로 수업하겠다고 한다. 공교육을 강화한답시고 현실성 없는 정책을 실행하겠다는 것인데 이것은 한 마디로 공교육을 살리는 게 아니라 사교육에 더 치중하게 하겠다는 거나 다름없다.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게 꼭 좋은 건 아니다. 일본은 국민들이 영어를 잘 못하는데도 세계 2위 경제대국이다. 반면 아시아의 일부 국가들은 영어를 공용어로 쓰는데도 불구하고 가난하다. 여기서 영어 실력이 좋아야 잘 사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에선 원어민 영어 선생님을 초빙해 수업했다. 처음엔 전혀 못 알아듣던 친구들이 나중에는 자유자재로 그 선생님과 대화했다. 알고보니 이들은 비싼 돈 내고 영어 학원에 다닌 것이었다. 그렇다. 이 친구들은 영어를 잘 해야 돈을 많이 번다는 말에 너무도 쉽게 속아 넘어간 셈이다.

나도 그 당시 어머니 손에 이끌려 모 학원에서 원어민과 함께 수업했다. 그런데도 내 영어성적은 높아야 60점을 넘지 못했다. 어머니는 “네가 제대로 하지 않으니까 성적이 이따위지!”라며 야단쳤다. 나는 정말 열심히 했다. 학원의 원어민 강사와 자유자재로 대화를 나누는 경지까지 올랐다. 그 당시의 나로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영어를 잘 해야 부자가 된다는 말은 잘못된 주장이다. 내 사업이 성공해서 외국 회사와 거래한다고 치자. 그런데 나는 영어를 전혀 못한다(물론, 꼭 영어권의 회사와 거래하는 것도 아니겠지만.) 그럴 땐 통역사를 부르면 된다. 통역사가 다 알아서 해결하니 아무런 걱정이 없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외국과 거래할 때는 그 나라 말을 잘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 회사는 이러이러한 사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게 중요하다”고 하셨다.

지금도 그 말이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아버지의 말이 백 번 맞는 말이다. 아버지처럼 회사의 상품을 알리듯 우리 문화를 세계에 알려야 한다. 그런데 몇몇 ‘바보 같은 사람들’은 영어몰입교육방안을 내세우고 있다. 우리나라 현실을 보면 한심하다는 생각 밖에 안 든다.

선생님에게 질문하자 "왜 학원 숙제를 학교서 하냐" 꾸중
양선희 (예명·대치동 ㄱ중학교 3학년)

나는 강남 대치동의 중학생이다. 대치동하면 학원이 많고 학구열이 높은 곳으로 통할 만큼 여기 학생들의 영어실력은 뛰어나다. 30% 정도는 이미 조기유학을 갔다왔다고 한다. 아무래도 이런 학생들을 상대로 수업하는 선생님의 입장에서는 부담이 많을 것이다 사실 학교 영어 선생님의 진짜 영어실력은 그리 높지 않다.

한 번은 우리반 친구가 영어숙제를 하다가 모르는 것을 학교 영어 선생님한테 물어봤다. 그 선생님의 반응은 어이없고도 허탈했다. 문제를 대충 훑어보시더니 학원숙제를 왜 학교에서 하냐며 오히려 학생을 꾸중했다. 아마 그 영어 문제를 풀려고 보니 너무 어려운 탓에 핑계거리를 만든 것으로 보였다. 그 후로 그 영어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줄곧 무시받았다.

반면 우리 친척 중 나와 동갑인 지방 학생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서울 상황과 너무 다르다. 그 지역의 학생들은 영어 선생님이 수업하려고 들어오시면 모두 약속했다는 듯이 한숨부터 내뱉는다고 한다. 영어시간은 그들에게 너무 어려운 수업인 것이다. 아무래도 그곳 지방 학생들은 서울보다 사교육을 덜 받을테니 영어 실력이 부족할 것이다. 그 학생들에게 영어선생님의 말은 마치 물 속에서 들리는 바깥 소리처럼 멍멍하게 느껴질 것이다.

현재 영어교육의 문제는 내가 위에서 든 것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듯이 심각하다. 이를 위해 정부는 하루빨리 지방의 아이들, 즉 영어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학생들의 영어능력을 키워주어야 한다. 또한 선생님들도 뛰어난 영어 실력을 겸비함과 동시에 아이들을 잘 가르칠 줄 아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해결책은 방과후학교를 늘리자는 것이다. 전국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똑같이 방과후학교에서 영어 공부를 하게 하면, 중학교 생활을 좀 더 편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조기에 영어실력을 잡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영어 선생님이 꼭 영어로 수업하지 않더라도 열심히 연구하여 실력있는 학생들에게 당황하지 않도록 준비해야 한다. 그래야 학생들도 학교 선생님에게 의지할 수 있고 학부모들도 사교육비 부담을 덜 수 있다.


태그:#영어몰입교육, #영어회화, #교육, #외국어, #대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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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출신 글쓰기 전문가. 스포츠조선에서 체육부 기자 역임. 월간조선, 주간조선, 경향신문 등에 글을 씀. 경희대, 경인교대, 한성대, 서울시립대, 인덕대 등서 강의. 연세대 석사 졸업 때 우수논문상 받은 '신문 글의 구성과 단락전개 연구'가 서울대 국어교재 ‘대학국어’에 모범예문 게재. ‘미국처럼 쓰고 일본처럼 읽어라’ ‘논술신공’ 등 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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