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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을 자극했던 동인천 역 출구의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
▲ 유혹 호기심을 자극했던 동인천 역 출구의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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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천역 4번 출구 수도국산달동네 박물관. 그것은 내가 지난 1년 동안 출퇴근길에 동인천역을 오고가며 가졌던 의문 중 하나였다. 수도국산이 과연 산의 이름일까? 만약 그것이 산이라면 그 명칭은 어디서부터 유래되었으며 달동네 박물관에는 무엇이 전시되어 있을까? 지난 토요일, 결국 난 그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인천 동구에 위치한 수도국산달동네 박물관을 찾았다.

근대 박물관과 한국의 박물관

지금과 같은 모습의 박물관이 등장한 것은 근대 이후이다. 아주 오래 전부터 왕이나 귀족, 성직자 등 특정 계층의 수집품을 모아두는 곳은 존재했지만,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예술품, 문화재 등이 전시되기 시작한 것은 신흥 부르주아 계층이 권력을 획득하고 근대국가가 박물관의 주체로 등장하고 나서이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근대국민국가는 박물관의 주체를 자처한 것일까? 그것은 박물관이 근대국가 형성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국민을 구성해내는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박물관에는 국가가 공인하는 역사가 실물로 전시되어 사람들에게 특정한 역사관을 설득하며, 국가가 인정하는 예술품들이 모여 그것을 공유하는 이들에게 하나의 일체감을 선사한다.

19세기 제국주의 국가는 식민지의 문화재를 약탈해 본국에 전시함으로써, 그것을 보는 자국의 사회구성원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고자 했다. 그것은 제국의 국민만이 지닐 수 있는 우월의식의 원천이 되어 제국 국민의 정체성을 형성했으며, 제국을 경영해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예컨대 영국의 대영박물관이나 프랑스의 루브르박물관은 결국 이와 같은 제국의 꿈이 반영되어 있는 곳이다.

반면 신생독립국가는 제국주의와는 상반된 이유로 박물관을 필요로 했다. 식민지의 경험을 가지고 있던 국가는 과거 제국주의에 맞설 수 있는 충성스러운 국민이 필요했던 만큼, 박물관이 자랑스러운 동시에 울분에 찬 국민들을 만들어주길 바랐다.

따라서 국가는 과거의 찬란한 문화재들을 전시함으로써 그 국민들만의 영광스러운 전설을 만들었으며, 최근의 오욕으로 점철된 역사 또한 전시하였다. 자랑스러운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그들은 항상 역사의 피해자로서 도덕적 우위를 지니며, 국민 정체성은 이를 통해 형성되기 때문이다. 수많은 침략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살아남아 찬란한 문화를 지켜낸 자랑스러운 우리 민족. 이는 결국 국가가 추구하는 부국강병의 주요 근거가 된다.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전쟁기념관
▲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전쟁기념관
ⓒ 서울시 용산구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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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박물관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근대박물관, 신생독립국가가 관장하는 박물관의 대표적인 예이다. 일제시기를 거쳐 수립된 국가는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민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했고 이는 박물관에 그대로 투영되었다. 거의 모든 박물관이 단일민족이란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과거 구석기에서부터 지금까지 민족의 총명함과 그 저력을 보여주는 데에 중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다.

또한 국가는 박물관을 통해 한나라의 침입에서부터 북한의 남침까지 피해자의 역사를 끊임없이 강조한다. 물론 최근에는 고구려의 침략전쟁을 영토 확장으로서 한창 주목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어쨌든 베트남전 참전 등의 기억은 걸러진 채 우리는 항상 피해자로서 자신을 인식한다. 전쟁만을 다룬 박물관으로서 세계에서도 그 유래를 보기 힘들다는 용산 전쟁기념관은 결국 이를 바탕으로 부국강병을 부르짖는 국가의 포효인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박물관의 기존 기능은 최근에 와서 변하고 있는 중이다. 박물관이 국민국가라는 거대담론에서 벗어나 다양한 일상들을 전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단일민족 신화가 기정사실로 굳어지고, 세수확보를 위한 각 지자체의 의지도 작동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사회가 더욱 민주화되면서 사람들의 다양한 욕구가 표출되었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 박물관, 성 박물관, 도자기 박물관 등 이채로워진 박물관의 모습들은 결국 사회의 다양한 욕구의 발현인 것이다. 

사회의 변화에 따른 박물관의 변신. 과연 그 속에서 인천의 수도국산달동네 박물관은 무엇을 담고 있을까? 박물관은 기존의 기능을 넘어섰을까?

수도국산과 달동네의 유래

인천 동구에 위치한 그곳
▲ 수도국산달동네 박물관 전경 인천 동구에 위치한 그곳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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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국산달동네 박물관은 아파트촌 한가운데 자그마한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었다. 주변에 난잡하게 들어선 아파트들을 보아 이곳이 재개발을 끝낸 기존의 달동네임을, 그리고 바로 이 언덕이 수도국산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왜 하필 이 자그마한 언덕은 수도국산이라 불렸을까?

궁금증은 박물관을 들어서자마자 풀렸다. 아마도 나와 같은 의문을 가진 사람이 많았던 듯 박물관은 입구 바로 옆에다가 범상치 않은 수도국산의 유래를 기록하고 있었다.

설명인즉슨 이 언덕의 본래 이름은 소나무가 많다 하여 송림산 혹은 만수산이었는데, 근대 개항 이후 일제 통감부의 압력 아래 한국 정부가 인천과 서울 노량진을 잇는 상수도 공사를 하고 이곳에다 수돗물을 담아두는 배수지를 설치하여 수도국산이란 명칭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어쩐지 그 이름에서부터 근대의 냄새가 나더라니.

기존의 지명들이 근대화로 인해 사라진다는 것은 분명 슬픈 일이다. 물론 영원한 것은 없는 법이고 그 변화가 워낙 컸기에 명칭마저 변한 것일 테지만, 오랫동안 사람들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던 명칭들이 우리가 의도치 않았던 근대화의 충격으로 인해 삽시간에 변한다는 것은 그리 반길 일이 아니다. 결국 그것은 역사의 단절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당장 100년 전의 말과 생각들조차 이해할 수 없는 우리. 어쩌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혼란은 이식되어진 근대화의 귀결인지도 모른다. 근대의 주체는 세우지 못한 채 물질적 번영만 추구한 결과, 사회는 현재 그 나아갈 방향을 잃고 모든 걸 경제적 가치로 환원시키는데 급급하기 때문이다. 철학의 부재. 그것은 결국 천년을 넘게 이어온 역사에 대한 고민의 단절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박물관은 수도국산의 유래와 함께 이곳 달동네에 대한 설명 또한 첨부하고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일본군이 1904년 현재 인천 전동 근처에 주둔하면서 그곳 주민들을 강제 철거시킨 뒤, 송현동 언덕에 주거하게 하였는데 그것이 수도국산달동네의 시작이라고 한다. 달동네라고 하면 보통 산업화 시기만을 떠올리지만 이미 그 원형은 일제강점기 근대화의 시작과 함께 시작된 것이다.

갈 곳 없는 사람들이 한 번 모여든 이상 수도국산은 이후 주거지를 찾지 못한 많은 이들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일본인·중국인 상인들에게 상권을 잃은 조선인들이 모여들었으며 한국전쟁 때는 고향 잃은 피난민들이, 60~70년대 산업화 시기에는 전라, 충청지역 사람들이 도시의 일자리를 찾아 이곳에 자리잡았다.

과거 소나무가 무성했던 조그마한 언덕은 꼭대기까지 집들이 들어차게 되었으며, 마침내 181,500㎡(5만5천여 평)규모의 수도국산 비탈에 3천여 가구가 함께 살아가게 됨으로써 인천의 전형적인 달동네가 조성되었다. 비록 많은 이들이 달동네를 단순히 도시 저소득층이 살아가는 곳으로 폄하하지만 그곳의 역사는 곧 우리의 역사요, 우리가 일궈낸 근대화의 이면인 것이다. 

같은 시간 속 다른 시대의 공간, 달동네

60~70년대를 떠올리게 하는 그곳
▲ 달동네 골목 풍경 60~70년대를 떠올리게 하는 그곳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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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들을 전시하는 다른 곳과는 달리 수도국산달동네 박물관은 과거 공간의 재현이 그 대부분을 이루고 있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온 듯, 수도국산 달동네 공간을 그대로 그려낸 그 섬세함은 여느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단순한 전시를 뛰어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달동네만의 모습이 아니었다. 도시 저소득층의 보금자리 달동네가 사회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한 채 기존의 삶을 연명해가는 도시의 단면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결국 이 사회가 청산하지 못한 과거이기 때문이다. 달동네란 같은 시간 속에서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공간으로서 아직도 진행 중인 이야기인 것이다. 90년대, 아니 지금 2000년대까지도 공존하는 60~70년대의 삶의 방식.

따라서 박물관에서 마주친 수도국산달동네는 사람들에게 과거인 동시에 현재이다. 60~70년대를 살아낸 사람들에게 그곳은 아름다운 추억이 서려 있는 과거이지만, 아직까지도 힘든 일상을 영위하고 있는 이들에게 그곳은 박제화 된 현재이다.  

간첩과 혼식에 관한
▲ 그 때 그 시절 포스터 간첩과 혼식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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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절의 불량식품들
▲ 정겨운 물품들 지난 시절의 불량식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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뻥튀기 아저씨가 연신 ‘뻥이야’를 지르고 간첩과 혼식에 관한 포스터가 도배되어 있는 골목길, 정겨운 상표들이 진열되어 있는 구멍가게와 물을 파는 아줌마,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여 함께 봤을만한 TV와 공동화장실, 장독대에 널려 있는 빨래와 생선들. 내가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어머니와 아버지의 감회를 통해서, 때로는 TV를 통해서 접할 수 있었던, 하지만 아직도 어딘가 있을 그 시대가 거기 있었다.

박물관 곳곳에서는 연신 탄성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머니, 아버지와 비슷한 지긋한 연배의 분들이 오셨다 하면 눈앞에 펼쳐져 있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여지없이 감탄하기 때문이었다. 박물관에 전시된 시대상이 자신의 기억과 똑같다며 연신 중얼대는 사람들. 그들에게 박물관은 추억의 장소이자 교육의 장소였으며 동시에 자신의 과거를 윤색시키는 공간이었다.

상세하게 묘사해 놓은 집안 구조
▲ 고향 옛 집 상세하게 묘사해 놓은 집안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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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어렸을 때만 해도 흔한 풍경이었다고 한다.
▲ 널린 빨래와 생선들 아버지가 어렸을 때만 해도 흔한 풍경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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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인 과거의 재구성. 결국 수도국산달동네 박물관은 그 외형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다른 박물관과 같은 기능을 하고 있었다. 국가가 박물관을 통해 얻고 싶은 것이 국민들의 일치된 역사라고 한다면, 수도국산달동네 박물관은 우리의 60~70년대를 재구성해냄으로서 사람들의 기억을 정형화하기 때문이다. 과거에 대한 연민을 바탕으로 다양한 각 개인들의 삶과 상관없이 60~70년대에 대한 공식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또 다른 소외로 이어진다. 박물관은 지나간 역사로서 달동네를 전시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달동네는 이 사회 내 엄연히 존재하며 심화되는 사회의 양극화는 이를 오히려 부채질하기 때문이다. 혹자는 전시된 공간을 보며 감회에 젖으면 끝이지만, 적지 않은 이들에게 이는 아직 극복해야 할 힘겨운 일상이다.

추억의 매매

재현된 공간을 지나자 달동네에 살던 개인들의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타이틀은 달동네 사람들의 일상이었지만 일반 사람들의 그것과 무어가 크게 다르겠는가. 어렸을 때 보았던 만화책이나 잡지, 음반 등 지나간 시대의 추억이 서려 있는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을 뿐이었다.

전시 공간의 끝에는 매점이 있었고 그곳에서는 장난감부터 불량식품까지 지나간 시대의 일상꺼리를 팔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평범한 매매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추억을 사고 있었고 이 정신 없는 시대를 살아갈 수 있는 안식처를 구하고 있었다. 인간이 망각의 동물인 이상, 과거는 항상 아름답게 채색되기 때문이다. 결국 복고라 함은 현재의 불안함의 표현인 것이다.

지나간 시절에 대한 애틋함을 묻어 파는 곳
▲ 추억의 매매 지나간 시절에 대한 애틋함을 묻어 파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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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국산달동네 박물관을 나오는 길,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게 된다. 박물관은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 하고 있는가. 일반 국립박물관이 우리에게 역사가 아닌 국사를 제시하고 있다면, 수도국산달동네 박물관은 우리들의 지난 과거를 아름답게 채색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아름다운 추억을 떠올리는 행위는 개인의 정신건강을 위해서 가끔 필요한 일이지만, 많은 사회구성원들이 반성과 성찰 없이 마냥 과거만을 바라보는 것은 사회적 퇴보이다. 그것은 불합리한 현 상황을 개선하는데 필요한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이며, 지나간 역사에 대한 합리화만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아직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불합리로 가득 차 있다. 달동네를 박물관의 소재로 잡을 만큼 우리의 삶은 윤택해지지 않았으며 아직까지도 많은 달동네가 존재한다. 혹자들의 바람대로 지금처럼 무작위로 재개발을 한다고 달동네가 사라지지 않을 것이 자명하다면, 우리가 박물관에서 보고 느껴야 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이다.


태그:#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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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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