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책이름 : 부심이의 엄마 생각
- 글 : 백기완
- 펴낸곳 : 노나메기(2005.7.1.)
- 책값 : 12000원

 


 (1) 술과 밥과 떡


 2001년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때 서울 신촌에 있는 술집 ㅇ에 처음 찾아갔습니다. 한 주에 한 번쯤 어김없이 만나던 고향 술동무들이 있었고, 누구도 이성친구를 사귀지 못하거나 사귀었어도 금세 깨지는 가운데 서로서로 고달프고 힘겹고 버거운 자기 삶을 풀어내면서 힘을 얻고 또다른 하루를 보내던 때였습니다.

 

 인천에서 만날 때는 인하대 뒷문 쪽에 있는 술집을 한 군데씩 찾아가면서 살았고, 모두들 인천을 떠나 서울에서 홀살이방을 얻어 살던 때에는 신촌 둘레 술집을 하나하나 찾아들면서 살았습니다.

 

 이때 신촌에서 만난 ㅇ은 신촌에 깃든 다른 술집들하고 사뭇 달랐습니다. 삐끼도 없는 곳이었지만(우리들은 삐끼가 잡는 곳에는 가지 않았습니다), 누님 두 분이 꾸려나가는 술집은 퍽 새삼스러웠습니다.


.. “그러니까 하제(내일)가 그믐이가?” “그렇지.” “근데, 그믐을 앞두고 모두 떡을 한다던데, 왜 우리 집에서만 떡을 안 하지?” “응, 떡을 하는 집도 있지만 엄마처럼 남의 때때옷을 하는 집도 있거든. 또 엄마가 떡을 해 주는 것을 기다리기만 하는 애들이 있는가 하면, 부심이 너처럼 이렇게 밤늦도록까지 제 제기를 제 손으로 만들고, 또 팽이도 제 손으로 깎고, 그러는 애들도 있거든.” ..  (46∼47쪽)


 흐르는 노래는 시끄럽지 않더군요. 조용하기도 하고 구수하기도 하며 마음을 쓰다듬어 주는 노래들만 흐릅니다. 요즈음 노래도 나오지만 예전 노래도 함께 나옵니다. 어떤 유행을 타는 노래가 아니라, 술집 ㅇ을 꾸리는 두 분 누님부터 좋아하는 노래인 가운데,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마음을 달래며 술 한잔으로 고단함을 풀고 돌아갔으면 하는 느낌이 많이 배어 있었습니다.

 

 술집 ㅇ 한켠에는 피아노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장식으로 놓은 것인 줄 알았는데, 술집 ㅇ 누님이 피아노를 잘 칩니다. 또, 술손님 가운데 기분이 좋아 다른 손님들한테 ‘날 음악’을 선사하고 싶다면 언제든 칠 수 있는 피아노입니다.


.. “부심아, 떡을 못 하는 집이 우리 집뿐인 줄 알어? 많어. 이런 때 우리 집 굴뚝에서 내가 아니 나가 봐. 마을 사람들이 우리 집에 때꺼리(쌀)가 떨어졌다고 걱정을 하는 거야.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군불이라도 때는 거야.” “뭐야, 군불을 땔 바엔 보리밥이라도 좀 하라우야. 이거 배가 고파 죽겠구나 이거.” 이때 엄마의 말씀이었다. “부심아, 참어야 해. 모두가 어려운 이때 제 배지만 부르고 제 등만 따습고자 하면 어떻게 되는 줄 알가서? 키가 안 커. 키가 안 크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밤나닥 어린 꼬마로 있는 거야, 어린 꼬마.” ..  (53∼54쪽)


 술집 ㅇ 한쪽 벽에는 책꽂이가 여럿 있습니다. 불빛이 밝지 않아 책을 읽기에는 쉽지 않은데, 게다가 술집에 어인 책이?

 

 한 번 두 번 찾아가고 세 번 네 번 찾아가던 어느 날, 술값을 셈하면서 넌지시 여쭈었습니다. 누님들은 “우리들이 읽는 책인데, 손님들이 읽고 싶다는 책이 있으면 빌려주기도 해요. 종규 씨도 보고 싶은 책이 있으면 빌려가셔도 돼요.”

 

 저는 책을 빌려가지 않았습니다. 거의 모두 저한테 있던 책이거나 읽은 책이기도 했지만, 늘 책을 껴안고 살아가는 처지였기에, 가끔가끔 그 책꽂이에 몇 가지 책을 보태 드렸습니다. 제가 읽던 책이나 제가 만든 책을.


.. “부심아.” “응.” “너, 짼지밥이 먹기가 싫어서 엄마 곁을 떠났었지?” “응.” “짼지밥이 먹기 싫으면 왜 일을 해도해도 짼지밥밖에 못 먹게 되는지 그것을 알아보려고 해야지, 그것을 알아보려고 들진 않고 이팝만 찾아 떠날 것이면, 이것 봐, 이렇게 발바닥만 부어터지는 거야, 알겠어?” “엄마, 그게 무슨 소리야?” “사내라면 언젠가는 엄마를 떠나야 해. 하지만 이팝이나 찾아 떠나는 건 떠나는 게 아니래두.” ..  (69쪽)


 술집 ㅇ은 손님을 안 받는 날이 곧잘 있었습니다. 가게를 통째로 빌려주기도 하거든요. 그런 날은 문간에 흰종이 한 장을 붙여놓습니다. 때로는 자리가 조금 남아, 다른 모임 사람들이 북적이는 틈바구니에 끼기도 합니다. 이럴 때면 낯선 사람이 왜 저기 있느냐 따질 성도 싶지만, 도란도란 모임을 치르는 사람들이 낯선 우리들한테 안주를 선물해 주기도 하고, 같이 기타를 퉁기거나 노래를 부르며 놀기도 합니다.

 

 술집 ㅇ 누님은 손맛도 훌륭합니다. 때때로 새로운 안주감을 만들어서 “이번에 새로운 안주를 만들어 보았는데, 한번 맛을 보고 평가해 줘요.” 하면서 덤을 주시기도 했습니다.


.. 어쨌든지 기현이 형은 떠나가고 조용히 자리에 누운 부심이 엄마는 깊게깊게 한숨을 거퍼 쉬셨다. 하지만 왜 그런지 그렇게도 쿨럭거리시던 밭은기침을 아니하셔 부심이가 물었다. “엄마, 안 아파?” “아프긴, 나쁜 놈들하고 싸우는 사람은 아픔이라는 걸 모르는 거야.” ..  (90쪽)


 이러구러 세 해 네 해 다섯 해 …… 여덟 해째 단골이 됩니다. 서울 신촌 나들이를 할 때면 두 군데 단골집, ㅅ과 ㅇ을 찾아갑니다. 두 곳은 술을 마시는 데에서도 반가운 한편으로, 술이 아닌 사람을 만나는 데에서도 반갑습니다.

 

어쩌면 술보다 사람 때문에 굳이 그 집으로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술 한잔이야 어디에서든 못 마시겠습니까. 가게에서도 파는 술이요, 길거리에 널린 곳이 온통 술집인 대한민국인걸요. 그러나 신촌 한켠에 조용하게 자리잡고 있는 ㅅ과 ㅇ은 오래도록 사람 발길을 끌고 옷섶을 잡아당깁니다.

 

 서로서로 한 살을 더 먹어가고 한 해를 더 알음알음하는 가운데, 마음과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눈빛과 눈빛으로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요사이 서로서로 어떤 일을 부대끼거나 부딪히면서 살아왔는가를 가만히 헤아립니다.


.. “오늘이 무슨 날인 줄 모르가서. 오늘이 바로 네가 가장 사랑하는 동생 순이의 난날 아닌가.” “난날이라니?” “부심이 네 동생이 이 벗나래(세상)에 처음 나온 말이란 말이다.” “그러면 생일이라고 하는 게 아니가?” “그건 어려운 말 한문이고.” ..  (110쪽)


 그제, 술집 ㅇ 누님이 쌀을 사십 킬로 보내주었습니다. 당신 어머님(또는 할머님)이 시골에서 농사짓고 계신데, 당신한테 부쳐 온 쌀이 있다면서, 저한테도 나누어 주고 싶으시다면서 보내주었습니다. 처음에는 “주소 좀 알려줘요. 뭔가 주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요. 들고 갈 수 없을 듯해서요.” 하셨는데. 그래서 무엇을 보내주고 싶으셨기에 그럴까 했는데.

 

 술집 ㅇ 누님네 집에서 거둔 쌀을 손으로 휘 저어 봅니다. 날쌀을 오독 깨물어 봅니다. 이 쌀이 자란 곳 물과 바람과 흙을 느낍니다.

 

 갑작스레 생긴 이 큰 선물을 어찌할까, 옆지기하고 생각하고 이야기를 한 끝에 반쯤은 떡을 맞추기로 합니다. 마침 옆지기네 아버님 난날이 며칠 뒤입니다. 옆지기네 아버님이 가래떡을 좋아하고 즐겨 드신다고 합니다. 우리도 가래떡을 좋아합니다. 쌀밥을 잘 넘기지 못하지만 죽이나 가래떡으로는 먹을 수 있는 옆지기이기도 하여, 쌀 이십 킬로를 가방에 담고 봉투에 담아서 동네 떡집으로 갑니다.


.. “엄마, 나도 헤엄 좀 가르쳐 줄래?” 그러자꾸나, 그러면서 가르쳐 주시는데 이러했다. “첫째, 사람은 말이야, 불속에 휩싸이면 그 불을 끄든가, 아니면 얼떵 빠져나와야 한다. 하지만 물에 빠지면 사람은 물이 되어야 한다. 옷가지도 목숨도 모두 내 것이 아니다. 나는 그저 물이다 하고 모두를 놓아 버리면 물속에서도 저절로 뜨게 되거든. 그게 바로 헤엄이야.” ..  (133∼134쪽)


 동네 떡집은 신포동 안쪽에 자리한 ㅅ. 떡집 역사가 마흔 해가 넘었다고 하는데, 떡집 아저씨네 아버지 때부터 해 온 곳일까요. 어릴 적을 되새겨 보니, 그때 신포시장 이켠에 떡집이 있던 일이 어렴풋이 떠오릅니다.

 

 떡집 아저씨는 인천 문화와 역사를 찾고 살리고 알리고 나누는 일을 오래오래 해 오고 있습니다. 큼직한 쌀 봉투를 방앗간에 내려놓습니다. “종규 씨, 떡값 얼마 받으면 좋을까?” 하면서 웃습니다. 농담 좋아하는 아저씨라서, “글쎄요, 100원쯤?” 하며 마주 웃습니다. 아저씨는, “좋아, 이 사람(옆지기) 뱃속에 있는 ‘쥬니어’를 위해서, 이번에는 선물로 해 드리지.” 하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이런. 선물이라니. 그러나 어쩝니까. 한참 선배인 아저씨가 이렇게 해 주신다는데.

 

 이튿날 낮, 자전거에 수레를 붙여서 떡집을 찾아갑니다. 수레에는 떡집 아저씨한테 고맙다는 뜻으로 드릴 두유 한 상자를 담았습니다. 떡을 받으면서 두유 한 상자를 건넵니다. “어떻게 알았어? 내가 두유 좋아하는지를.” 옆지기가, “제가 두유를 좋아해서 그걸로 드리는 거예요.”

 


 (2) 마음그릇


 쌀을 받고 떡을 받고, 이 안에 담긴 마음까지 받습니다. 떡보따리를 자전거 수레에 담아 집으로 돌아오면서, 또 떡보따리를 안고 옆지기네 부모님 댁으로 찾아가면서 생각합니다. 나한테 고마움을 베풀어 주는 분들은 내가 그분들한테 고맙게 해 준 무엇인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해 주는가 하고. 그러면 나는 무엇으로 그분들한테 고맙거나 반갑게 다가갔을까 하고.

 

 곰곰이 헤아려 보면, 딱히 나 한 사람한테 베풀어 주는 마음이며 쌀이며 떡은 아닐 수 있다고 느낍니다. 어느 한 사람을 콕 집어서 나누어 주는 마음이 아니라, 당신들을 둘러싼 사람들 누구한테나, 당신들이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이 터전 곳곳에 있는 모든 자연한테 나누며 함께하는 마음이지 싶습니다.


.. “나, 일등했다니까, 건사하지 않아.” 그랬을 적이다. 엄마는 마지못해 입을 여시는 것 같았다. “부심아,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일등 이등이란 없는 거야. 이렇게 나뭇짐을 힘겹게 지고 마루턱을 오르게 되면 말이야, 무슨 생각이 나는 줄 알아. 여기서 주저앉으면 나는 죽는다, 그러니 참고 버티며 끝까지 오르자는 생각밖에 없어. 일등 이등이 없다니까.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야. 학교란 한켠으로는 모르던 것을 배우기도 하고 또 한켠으로는 애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할대(원칙)를 익히고 배우는 데지, 일등 이등을 따지는 데가 아니야.” ..  (147쪽)


 제 주제로는 누님들이며 아저씨한테 어떤 선물을 베풀기는 어렵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제가 죽는 날까지도 물질로 된 어떤 선물을 베풀 수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만 한 가지, 제가 뿌리내리며 살아가려고 하는 고향 동네에서 조촐하게 도서관 살림을 이어나갈 수 있다면, 언제까지나 지켜나갈 수 있다면 조그마한 선물이 될까요. 지금까지 네 번 펴냈고 앞으로 다섯 번째로 펴낼 잡지를 끊이지 않고 100호 200호까지 낼 수 있다면 알뜰하게 선물이 될까요. 부지런히 쓰는 글들, 이를테면 우리 말 이야기이든 헌책방 이야기이든 책 이야기이든 골목길 이야기이든 자전거 이야기이든, 좀더 다스리고 추스르고 갈고닦고 껴안으면서 엮어낼 수 있으면, 모자라나마 선물 하나 될 수 있을까요.


.. “부심아, 독 속도 춥지? 그래서 너도 모르게 자꾸 움츠러들지? 하지만 질라라비가 됐다 치고 나래를 펴 봐. 그리고 훨훨 날아 봐. 그리하면 춥긴 왜 추워. 가슴이 떡 펴질 것이고…. 꼼짝할 수가 없는 이 독 안에서도 부심이 네 꿈 있잖아, 그걸 그려 보란 말이야. 네 할아버지가 그렇게도 아끼던 병풍 그림도 다시 살리고.” “그래도 엄마, 난 이참 돼지기름데이 그것 한 조박은 먹어야 살 것 같은데.” “바로 그거야, 그런 걸 그려 보라니까, 먹고 싶어도 먹을 수가 없는 안타까움, 그런 걸 그리는 게 그림이라니까.” ..  (186쪽)


 당신들이 나누어 준 쌀과 떡으로 제 밥그릇을 채웁니다. 당신들이 베풀어 준 마음으로 제 마음그릇을 보탭니다. 당신들이 무엇 하나 나누어 준다고 할 때에는, 당신들이 세상 으뜸가는 부자여서가 아니기 때문일 테지요. 돈이 철철 넘쳐나서가 아닐 테고요. 함께하니까 좋아서 아니겠습니까. 같이 가지니까 좋아서 아니겠어요.

 

 좋은 책 돌려가며 읽어서 좋고, 좋은 밥 몇 숟가락 나누어 먹어서 좋으며, 좋은 생각 내 머리속에 꽁꽁 싸매어 놓지 않고 펼쳐 놓아서 좋습니다. 좋은 이야기 혼자만 주절주절 떠들지 않고 도란도란 듣고 나누니 좋습니다.


.. 엄마, 남쪽 군대가 북쪽으로 갔을 때 총부리를 들이대며 “왜, 이 집에서만 태극기를 안 다느냐, 이거 빨갱이네 집 아니가. 쏘아 버리겠다, 어서 달라”고 했을 때 엄마는, “이봐요, 젊은이들. 나는 지금 서울에 사는 우리 아들딸과 남편을 기다리지, 총을 든 군인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다면서요 …… 이때 “이눔의 할마이, 죽여 버리겠다”고 하자 엄마, 엄마께서는 도리어 눈알을 부라리시며 “네 이놈들, 나를 네놈들이 사냥해 잡은 멧돼지쯤으로 여기는 거냐. 한 어머니한테 총부리를 들이대는 전쟁, 한 어머니를 죽이자는 전쟁은 왜놈들의 전쟁, 왜놈들의 소갈머리에서나 그러는 거다 이놈들아, 어디 한 술 쏘아 보거라” 그러셨다면서요 ..  (301쪽)


 문득 어머니가 생각이 납니다. 안부전화를 합니다. 가끔이나마 해야지 생각하면서도 늘 지나치고 있었기에, 지금 곧바로 합니다. “무슨 일이야?” “그냥 해 봤어요.”

 

 두 아이 살아온 모습을 어머니는 어떻게 돌아보며 느끼고 있을까요. 제가 느끼는 제 걸음을 어머니는 어떻게 느껴 오고 있을까요. 한낱 철부지로, 그냥 막둥이로, 얼핏 심통쟁이로, 아직 어리보기로 느끼지는 않을까요.


.. “야, 아바이. 서울이라는 데는 말 한마디 갖고 서로 때리고 쥐어박고 그러는 데가?” “아니지, 그렇진 않지.” “그럼, 왜 그랬어.” “야, 임마 부심아. 시골 애가 남대문이 보고 싶어 소리를 지를 것이면 빙그레 웃으면서 너 남대문이 보고 싶어서 그래? 정 보고 싶으면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 내려가지고선 천천히 걸어가며 실컷 봐, 눈깔이 빠지도록 실컷 보란 말이야, 그래야지. 다짜고짜로 촌놈이라고 군밤을 메기고 깔보고 그것도 사람이가. 그딴 건 그냥 깨트려야 살 수가 있는 데가 바로 서울이라는 데야 임마.” ..  (214쪽)


 우리 어머니가 좋아하는 밥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보는데, 하나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밥이며 반찬은 어렵잖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즐기던 밥과 반찬이 있었나 싶습니다.

 


 (3) <부심이의 엄마 생각>이라는 책


 백기완 님이 펴낸 <부심이의 엄마 생각>을 다 읽어냅니다. 찬찬히 읽어내는 동안 눈물 여러 방울 똑똑 떨어뜨렸습니다. 한 번 헤어진 뒤로 다시 만날 길 없이 마음으로만 그리는 어머님 이야기를, 어쩜 그렇게도 또렷하게 되새기고 있으실까요. 생각해 보면, 한 해 못 보고 두 해 못 보고 열 해 못 보고 스무 해 못 보는 동안, 어릴 적 부심이(백기완 님) 당신한테 어머님이 들려준 이야기가 차근차근 살아났는지 모릅니다.

 

 그때는 아무 뜻도 모르고 들었던 말이, 서른 해 못 뵙고 마흔 해 못 뵙는 동안, 이제서야 ‘참, 그렇지, 그렇고말고’ 하면서 가슴을 치게 되고 땅을 치게 되고 무릎을 치게 되었지 싶습니다.

 

 어느덧 부심이 당신이 못 뵈온 어머님은 햇수로 쉰 해를 넘고 예순 해를 넘겼으니, 아직까지 살아 있으리라 믿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부심이 당신은 어머님이 살아 계시리라 믿고 있습니다. 몸뚱이는 비록 조각조각 부서지고 흩어져서 당신 어머님이 태어나고 당신도 태어난 그 흙으로 알알이 돌아갔을지라도, 부심이 당신 마음에 깊이 아로새겨진 말씀 들로 살아 계시니까요.


.. 그래서 폭격으로 다 타버린 잿더미 위에서 학교도 못 가고 발발 떨고 있는 꼬마 예닐곱을 모았습니다. 그러고는 떨어진 채알(천막)을 쳐 ‘달동네 배움의 집’ 그렇게 써 붙였습니다. 그런데 이 때문에 갑자기 경찰이 들이닥쳐 저를 마치 엄청난 부셔(적)나 되는 것처럼 매달아 놓고 치는 겁니다. “너 이 새끼, 하꼬방 그러면 몰라도 달동네라니, 그게 무슨 수작이가. 너 빨갱이지?” “아닙니다. 하꼬방이란 왜말 아닙니까? 하지만 달동네란 바로 이 땅 자연의 아름다운 모습 그거입니다. 다 깨진 집터들이지만 그 위에 허연 눈이 덮이고 밟은 달이 뜨니 그게 그렇게 멋져 달동네 그랬습니다.” “뭐야, 너, 이 새끼. 일본말 싫어하는 것을 보면 빨갱이가 틀림없어. 네 뒤가 누구야. 누가 시킨 거야, 대라.”고 치고 또 치는데 피만 쏟아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끄럽게도 고추장에다 비벼먹었던 깡보리밥을 왕창 게워낸 것입니다. 그러자 금세 맨바닥에 벌겋게 얼어붙는 그 보리밥을 제 혓바닥으로 핥아내라고 치고 또 치고 ..  (314쪽)


 책을 다 읽고 난 뒤, 인터넷으로 백기완 님 이 책 <부심이의 엄마 생각>을 소개하거나 비평한 글을 찾아봅니다. 신문기사 몇 가지 드문드문 보입니다. 모두들 비슷비슷한 목소리입니다. ‘한자말 하나 안 쓴 깨끗한 문학’이라고.

 

 글쎄, 그런가?

 

 신문기자들 눈길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인지 모르나, <부심이의 엄마 생각>을 쓴 백기완 님 마음은, ‘한자말을 안 쓰려고 하면서 쓴 문학’에 가 닿고 있을까요.


.. 우리 형제들이 서로 부셔(원수)가 아닌데도 조막손이 형님을 그렇게도 좋아하시던 기현이 형님은 남쪽에서 싸우다 죽어 남쪽의 애국자가 되고, 또 기현이 형을 그렇게도 사랑하던 조막손이 형님은 북쪽에서 싸우다가 미군 폭격으로 죽어 북쪽의 애국자가 되었습니다 ..  (317∼318쪽)


 부심이 당신 어머님을 그리는 마음은, 부심이와 부심이 어머님이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는 이음고리를 보여준다고 느낍니다. 흙에 발딛고 살아가는 마음을 보여주고, 흙을 움켜쥐며 부대끼는 삶을 보여준다고 느낍니다. 흙을 만지고 흙으로 빚어내는 우리 마을을 보여주고, 흙으로 한 올 두 올 쌓아올리는 우리 얼과 넋을 보여준다고 느낍니다.

 

 애국자도 매국노도 없는 우리 세상으로 살아가자는 마음을 보여준다고 느낍니다. 미운 이도 고운 이도 따로 없는 우리 세상으로 가꾸어 가자는 마음을 보여준다고 느낍니다. 돈과 권력과 이름값이 아닌 사랑과 믿음과 나눔으로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일구어 가자는 마음을 보여준다고 느낍니다.

덧붙이는 글 | 인터넷방 <함께살기 http://hbooks.cyworld.com> 나들이를 하면 책 + 헌책방 + 우리 말 이야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부심이의 엄마생각

백기완 지음, 노나메기(2005)


태그:#백기완, #부심이의 엄마 생각, #책읽기, #책읽기가 즐겁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