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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선병원 부속교회의 정면부 하얀 회벽에 당시에는 매우 희귀한 예술품이던 아슐레호로 성서의 내용을 모자이크해 장식한 파사드가 이채롭다.

 

북부 버스터미널 근처는 아르마스 시장과 세비야 현대미술관 등이 있어 볼거리가 많습니다. 거기서 대로를 따라 조금 더 내려오면 스페인의 2대 투우장 중 하나인 마에스트란사 투우장(Plaza de toros de la Maestranza)과 박물관, 세비야의 오페라 하우스인 떼아또르 데 라 마에스트란사(Teatro de la Maestranza)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꼭 가보고 싶던 곳은 따로 있었습니다.

 

세비야 자선병원 입구 17세기에 건립돼 지금까지도 빈자와 노인을 위한 요양소로 쓰이는 소박한 자선병원의 모습.
 

자선병원(Hospital de la Caridad)!

 

지은 사람의 뜻을 기려 오늘날까지도 빈자나 부랑자, 노인들을 위한 자선병원으로 쓰이고 있는 곳입니다. 그 중에서도 제가 꼭 가고자 하는 곳은 병원 안의 병설교회입니다.

 

교회는 소박한 외양을 지니고 있지만 건물 정면만큼은 성서의 장면들을 묘사한 아술레호(Azulejo: 흰 도자기 타일에 코발트 블루 안료로 그림을 그린 채색타일)로 멋을 내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입구부터 예사롭지 않은 작은 교회,

그 안에는 어마어마한 대작들이 소장돼 있다

 

사실 이 아술레호는 17세기 스페인 회화의 대가 무리요(Bartolome Esteban Murillo, 1618-1682)가 직접 디자인해 세비야 서쪽 트리아나 지구에서 구워낸 타일입니다. 장식에서부터도 유추할 수 있듯이, 관광객 대부분은 그냥 지나쳐 버리는 병원 교회 안에는 17세기 스페인 바로크 걸작들이 소장돼 있습니다.

 

이 작은 자선병원이 걸작들을 소장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기록에 따르면 병원을 지은 세비야의 귀족 돈 미겔 마냐라(Don Miguel Manara)는, 이 교회가 ‘삶의 찰나적 측면’과 ‘신의 섭리’를 명상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냐라는 그 자신이 직접 세비야 화가들에게 죽음에 관한 연작을 의뢰했습니다. 공교롭게도 마냐라가 그림을 의뢰하던 당시 세비야는 스페인에서 제일가는 회화의 중심지였습니다.

 

훌륭한 후원자와 시대적인 운이 맞아 떨어져, 교회는 풍부한 문화유산을 소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덕택에 오늘날 교회에 들어서면 17세기 스페인 회화사의 중심지였던 세비야의 영광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습니다.

 

커다란 이베리아 반도에서 겨우 남부 도시 하나에 불과한 세비야가 스페인 회화의 중심지로 발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식민지 사업 덕분입니다. 미국과의 무역으로 엄청난 부를 벌어들인 세비야는 16세기 말 이베리아 반도 내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로 급성장했습니다. 1550~160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세비야는 짧은 황금 시기를 구가하게 됩니다.

 

교회 회랑석에 걸려있는 무리요의 그림 무리요의 'San Juan of God transporting a patient'

 

세비야 화파가 스페인 회화사를 장식했던 17세기

 

당시 세비야 예술가들의 면면을 읊어 보자면 그라나다 대성당을 총지휘했던 알론소 카노를 제일 먼저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세비야 회화아카데미에서 그림과 조각 등을 배워 그라나다로 갔고, 그가 가르친 제자 페드로 데 메나(Pedro de Mena, 1628-1688)는 이후 말라가 대성당 건립에 참여해 극적이고 사실적인 종교조각들을 남겼습니다. 저는 안달루시아를 여행한 내내 세비야에서 뻗어나간 세비야 화파들의 그림을 보고 있었던 셈입니다.

 

알론소 카노의 세비야 회화아카데미 동문 중에는 지금도 스페인 회화사에 이름이 회자되는 쟁쟁한 거장들이 있습니다. 바로 수르바란과 벨라스케스입니다. 뿐만 아니라 수르바란으로 하여금 위기의식마저 느끼게 했던 ‘그 유명한’ 무리요 역시 이 시기 세비야에서 활동한 화가입니다. 무리요와 더불어 사실적 그림으로 이름 높은 발데스 레알(Juan de Nisa Valdes Leal, 1622-1690)도 있습니다.

 

무리요와 발데스레알, 두 사람이 바로 자선병원에 위대한 작품을 남겨놓은 예술가들입니다.

 

발데스 레알은 1661-1670년 바로크적인 강렬한 감정과 움직임을 극한까지 표현한 작품들을 자선병원에 연작으로 남겨놓았습니다. 특히 유명한 두 점의 대작은 교회의 인상을 결정하는 입구 양 위에 걸려 있어, 관람객들은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그 충격적인 그림과 마주하게 됩니다.

 

발데스레알의 <인 익투 오쿨리> 라틴어로 '눈을 한번 깜빡이다'라는 의미를 지닌 이 그림은 보는 이로 하여금 압도적인 공포감을 심어주는 동시에 존재의 찰나에 대해 명상케 한다.

검은 바탕에 실물에 필적하는 크기의 해골이 그려진 그림이 바로 발데스 레알의 그림 중 한 점인 <인 익투 오쿨리 In Ictu oculi>입니다. 해골은 우아한 손동작으로 이 라틴어가 쓰인 두루마리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눈을 한번 깜빡이다’라는 뜻을 갖고 있는 이 말은 즉, ‘삶이란 마치 눈을 한번 깜빡이는 것처럼 찰나일 뿐’이므로 ‘죽음을 명상하라’라는 뜻입니다.

 

관을 메고 있는 해골의 발 아래에는 인간이 살아가며 추구하는 무수한 상징들이 흩어져 있습니다. 두 개의 황금왕관, 티아라, 황금실, 종교적ㆍ과학적 가르침이 담긴 책들, 무기, 갑옷…. 이 모든 것을 딛고 선 해골은 죽음의 영광을 나타내는 동시에 세속적 즐거움의 덧없음을 보여줍니다. 거장답게 발데스 레알은 이 그림의 명암을 대담하게 조절했고 미려한 붓 터치로 우울한 사상에 극적인 효과를 가미했습니다.

 

죽음을 명상하고 덕을 실천하라

발데스 레알의 바니타스 사상을 담은 그림들

 

그 그림을 등지고 돌아서면 교회출입구 바로 위에 걸려 있는 <세상 영광의 끝 Finis Gloriae Mundi>을 보게 됩니다. 원래 의도대로라면 교회 안을 한번 둘러보고 바깥으로 나가려는 찰나 마주치게 되는 그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도 우리는 ‘주제의식을 극적인 장면으로 표현해내는’ 발데스 레알의 탁월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필견의 그 작품, <세상 영광의 끝> 교회를 돌아나가는 순간, 출구 문 위에서 마주치게 되는 대작 <피네스 글로리아 문디(세상 영광의 끝)>.


죽기 전에 기억해야 할 네 가지를 주제로 삼은 <세상 영광의 끝>의 배경은 시체들이 썩어가는 납골당입니다. 그림 중앙에는 열어젖힌 두 개의 관이 보입니다. 각각 주교 복장을 한 구더기 들끓는 해골과, 칼라트라바 기사단 복장을 한 시체가 들어 있는데, 아마도 저 칼라트라바 기사는 마냐라 자신을 표현한 것일 겁니다.(※ 칼라트라바 기사단 Order of Calatrava: 스페인의 가장 오래된 군사종교 기사단으로, 이베리아 반도 내 크리스트교 전쟁에 공헌함.)

 

세상의 온갖 명예를 누리는 성직자나 기사도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셈입니다. 그런데 시체가 썩어가는 이 납골당에, 돌연 심판의 그 순간이 극적으로 다가옵니다. 발데스 레알은 심판의 순간을 그림 상단부에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팔이 천칭을 든 채로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이 천칭 왼쪽에는 ‘Ni mas(더 이상 행하지 말라)’, 오른쪽에는 ‘Ni Menos(더욱 행하라)’라는 단어가 쓰여 있습니다.

 

그만두어야 할 행위들을 표현한 왼쪽 저울 위에는 공작 깃털부채(자만), 개(화), 박쥐가 앉은 심장(질투), 염소(탐욕), 돼지(탐식), 원숭이(색욕) 등 7대 죄악을 상징하는 온갖 것들이 모여 있습니다.

 

반대편 저울에는 예수의 애너그램(철자 바꾸기)이 보이는 왕관과 가톨릭 일과기도서, 사슬, 한 덩어리의 빵 등이 보입니다. 뜻하는 바는 명확하겠지요. 교회의 후원자였던 마냐라는 발데스 레알을 통해 우리들에게, 덕과 죄의 양에 따라 파멸과 구원이 엇갈린다는 마지막 경고를 보내고 있는 셈입니다.

 

자선병원 교회 내에는 그림뿐 아니라 17세기 세비야에서 채색 목조 조각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알 수 있는 조각들도 가득합니다.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 성흔이 얼마나 사실적으로 묘사됐는지 보고 있는 사람이 고통스러울 지경입니다.

 

채색 목조 조각을 통해 생각해보는

스페인의 종교박해 역사

 

사실적 묘사로 보는 이를 자극하는 예수수난상 그로테스크하리만큼 사실적인 채색목조조각이 세비야에서 발전했던 배경에는 이곳이 레콘퀴스타의 격전지였다는 사실이 숨어 있는 것만 같다.

스페인에서 유독 그로테스크하리만큼 정열적으로 종교회화의 표현력이 풍부하게 발전하게 된 데에는 모종의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17세기 세비야는 레콘퀴스타(가톨릭의 국토회복전쟁)가 치열하게 벌어졌고 전체 스페인 대륙 역시 종교전쟁과 마녀사냥이 극심했던 만큼, 중세 시대 고문의 발전과 함께 종교회화의 표현력도 풍부해졌고, 거기에는 정치적인 필요성도 어느 정도 있었으리라고 가정해볼 수 있겠지요.

 

너무 사실적이어서 공격적으로까지 느껴지는 조각들에 비해 무리요가 그린 종교화는 한결 부드럽게 마음을 어루만져 줍니다. 자선병원 교회 회랑석에 걸려 있는 <San Juan of God transporting a patient>라는 작품이 바로 무리요의 그림입니다.

 

무리요의 아름답고 섬세한 그림들 본당 회중석과 사제석에 걸려 있는 아름다운 그림들은 잠시나마 발데스레알의 대작에 놀란 가슴을 부드럽게 치유해준다.

교회 사제석 앞에 있는 또 다른 무리요의 그림, <사랑과 물고기의 기적 The miracle of the loaves and the fishes>은 그의 신심을 보여줍니다. 당시 스페인에는 재해가 심해 굶주린 사람들이 속출하던 때였는데, 무리요는 종교단체가 이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줘야 한다는 책임감과 시대상을 그림을 통해 표출했습니다. 이런 동정심과 사랑이, 좀 더 기독교의 본질에 어울린다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습니다.

 

애석하게도, 자선병원 교회 안에서 강력하게 호소하는 ‘덕과 사랑의 실천’은 기독교인을 넘어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발전하지 않았습니다. 교회 정면부를 장식한 아름다운 타일이 트리아나 지구에서 만들어졌다는 점을 기억하십니까? 세비야 트리아나 지구는 전통적으로 집시들의 거주지였습니다. 비제의 <카르멘>에서조차도, 카르멘이 돈 호세를 유혹할 때 ‘트리아나 지구의 집시 거주지로 함께 가자’는 언급이 나올 정도로 유명합니다.

 

이곳에서 타일이 만들어졌다는 기록은, 당시 지배세력이었던 기독교인들이 비기독교인인 집시들을 인력노동으로 착취했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만듭니다. 더구나 그들이 만든 아슐레호 타일은 원래 무어인의 기술에서 배워온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이슬람인, 유대인, 집시 등의 비기독교 세력이 공존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강력하고 독점적인 권력을 누렸던 스페인의 기독교인들은 정작 그들의 교회 내에서는 한없이 가엾고 약한 피해자로 자신을 묘사했습니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그 결과는 비기독교에 대한 잔혹한 진압으로 이어졌습니다. 교회 밖에서는 골목마다 집시 아이들의 시체가 산처럼 쌓였고, 광장에서는 마녀가 불태워졌으며, 유대인과 아랍인들은 재산을 몰수당한 채 결국 고향을 등졌지요.

 

이베리아 반도의 보석이었던 세비야는 그렇게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여행기는 2007년 2월 13일부터 일주일간 스페인을 여행한 뒤 작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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