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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아이 산후조리를 하고 새긴 다짐

첫 아이를 낳고 퇴원하는 날 향한 곳은 시부모님 댁이었다. 당시 친정어머니는 일을 다니고 계셔서 시어머님이 몸조리를 해주겠다 하셨다. 언제나 딸처럼 여겨주시는 시어머님의 도움을 감사히 받기로 했다. 그런데 당연히 함께 있어줄 줄 알았던 남편이 밤이 되니 집에 가서 잔다며 가버렸다. 예상치 못했던 일에 반응도 못했다. 첫 육아의 난감함과 힘겨움 속에 밤에라도 남편이 곁에 있어 줄 것이 위안이 되리라 믿었는데.

초짜인 엄마와 아기는 모유수유로 씨름하며 첫 이틀 밤을 꼬박 샜다.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등짝이며 어깨가 빠져나가는 것 같고, 잠도 못 자 지칠 대로 지쳤다. 시부모님이 수요예배 가신다고 마침 모두 집을 비우시고 혼자 텅 빈 집에 남았을 때, 순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는 아기와 나만 덩그러니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 같은 적막함에 휩싸였다. 그 때 이후로 우울증이 어떤 것인 줄 이해하게 되었다. 함께 아이를 낳고도 고스란히 혼자 그 짐을 다 떠맡기고 위로와 격려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남편이 원망스러워 펑펑 소리 내어 울었다.

그 이후 내 불만을 들은 남편은 그제야 시부모님 댁에서 함께 잠을 잤다. 그래도 산후조리는 온전히 어머니의 몫이었다. 남편은 바깥 일로 나가고, 새벽에 일어나시는 분이시라 아기를 목욕시킬 저녁 무렵이면 아버님은 이미 주무시고 계셨다. 따로 욕실이 없었기 때문에 아기가 춥지 않도록 안방에서 목욕을 시켰는데, 욕조 물을 버리기 위해 아버님을 깨우려다가도 어머님은 ‘에이, 그냥 내가 하고 말지’ 하면서 혼자서 욕조를 옮기곤 하셨다. 그럴 때마다 어머님 허리가 걱정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어머님이 고생하시는 것도 마음이 쓰였고, 아이를 함께 낳은 남편이 키우는 과정에 동고동락하지 못하는 걸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렇게 한 달 정도 있을 요량으로 머물렀던 어머님 댁을 3*7일로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마음에 한 가지 각오를 했다. 다음에 또 몸조리를 하면 남편과 해야겠다고.

‘이제야 집안 일이 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큰 아이 학교 보고서에 필요해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부랴부랴 불러모아 찍은 사진인데, 첫째 아이가 억지로  찍는 표정이 역력하고, 막내는 어리둥절 한 채로 사진이 찍혔다. 그래도 가족 사진 찍는다고 엄마 아빠는 신났다.
▲ 어렵게 찍은 가족 사진 큰 아이 학교 보고서에 필요해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부랴부랴 불러모아 찍은 사진인데, 첫째 아이가 억지로 찍는 표정이 역력하고, 막내는 어리둥절 한 채로 사진이 찍혔다. 그래도 가족 사진 찍는다고 엄마 아빠는 신났다.
ⓒ 최봉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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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를 임신했을 때는 출산과 육아를 남편과 함께 맞고 겪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러나 이 말을 남편에게 하기까진 몇 달이 걸렸다. 남편이 잘 받아들이도록 마음으로 빌었다. 처음 말을 꺼냈을 땐 무척 힘들어하던 남편도 몇 달이 지나고 나서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 임신 기간에 난 두 배로 더 준비해야 했다. 음식을 할 줄 몰랐던 남편에게 음식까지 요구하는 건 너무 무리겠다 싶어 첫째 아이 돌보는 것과 집안 청소와 빨래 정도로 국한시켰다.

음식을 준비하기 쉽게 하기 위해 미리 나물이며 전이며 미역이며 다 준비하고 씻고 다듬어서 먹을 분량만큼 나눠서 얼려놓았다. 그리고 간간이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님이 해다 주시는 음식으로 충당하기로 했다. 몸조리 하는 데 최대한 어렵지 않게 해준다며 남편이 집안 정리며, 부엌 정리며, 냉장고 정리를 너무 열심히 한 나머지 둘째는 2주 빨리 나왔다.

결혼하고 집안 살림을 하면서 집안 일이 끝이 없다는 걸 실감했다. 언제나 일을 다 마치고 나면 밤 11시였다. 그래서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좀 어질러져 있어도, 자꾸 쌓아 둔 설거지가 눈에 거슬려도 그냥 책상에 앉아서 내 시간을 가지려고 연습할 정도였다. 남편은 설거지도 잘 하고 빨래도 잘 했지만, 언제나 스스로 잘 도와주는 남편이라 자신하는 바람에 그게 더 싸움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우리는 낮은 수입에 만족하고 남편이 바깥일을 조정해서 둘째 아이 산후조리에 집중하기로 했다. 완전 모유수유는 처음이기 때문에 모유수유의 어려움을 제대로 겪었다. 아기가 젖을 물려고 하면 젖을 먹이려다가도 도리어 내가 피할 정도였다. 까지고 피가 나고 바늘로 강하게 찌르는 아픔을 도 닦듯이 견뎌야 했다.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선배들의 조언만을 붙든 채 이를 악물고 한쪽 방에서 그렇게 수일을 보내고 있는 동안, 남편은 큰 아이를 돌보며 청소하고 빨래하는 일을 했다. 그러고 나면 밤 11시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남편은 힘겨움을 토로했다가 나에게 반격사격을 당하고 말았다. “내가 늘 그랬거든?” 그렇게 둘째 아이 산후조리를 하고 나서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이제야 집안 일이 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결혼 4년째에 나온 말이다. 산후조리가 끝나자마자 남편은 바로 심하게 앓아누웠고 나는 다시 남편 병간호를 해야 했다.

아기와 함께 하는 축복을 누릴 권리, 남편에게도!

남편도 함께 출산과 육아를 겪은 터라, 우리 모두 셋째를 가질 계획은 없었다. 그런데 아기는 참 예뻤다. 남편은 여느 엄마처럼, 고생한 거 다 잊고 아기를 참 예뻐했다. 아기 보며 사랑스러웠던 일을 밖에서 돌아오는 사람에게 들려줄 때면 우리는 늘 바보처럼 마주보며 웃는다. 아이들의 사랑스런 모습에 대한 공감은 100% 완벽하게 우리를 하나 되게 하는 순간 중에 하나다. 아이 얘기를 하며 웃는 남편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아기에게 손가락을 갖다 대면 아기는 이렇게 꼭 쥔다. 갓난 아기와 손 잡는 방법이다. 이 사진을 볼 때마다, 약하고 소외받는 생명들을 귀힌 여기는 사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 막내 아이의 아기 때 손 아기에게 손가락을 갖다 대면 아기는 이렇게 꼭 쥔다. 갓난 아기와 손 잡는 방법이다. 이 사진을 볼 때마다, 약하고 소외받는 생명들을 귀힌 여기는 사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 최봉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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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아이를 위한 완벽한 산후조리에 도전한 남편

이제 셋째 몸조리를 하는 것은 당연히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이번엔 음식까지!”하는 나의 선언에 처음엔 인상을 팍 구겼다. 나는 또 몇 달을 마음으로 정성을 드렸고, 남편은 결국 받아들였다. 그리고 나는 음식 전수에 들어갔다. 최소한 국은 끓일 줄 알아야 된다. 국, 사실 별로 어렵지 않다고 안심을 시켰다. 그리고 미역국만 끓이면 되지 않는가! 미역국은 국 중에도 제일 끓이기 쉽다. 맛까진 안 바란다. 끼니 안 거르고 먹을 수 있으면 된다.

그리고 두 번째는 나물 볶는 거, 이것도 너무 쉽다. 나물도 미리 씻고 나눠서 냉동실에 얼려뒀다. 나물은 다듬는 게 어렵지 요리는 간단하니까. 나중에 녹여서 소금 넣고 들기름 넣고 볶기만 하면 된다. 남편은 어머니 음식 솜씨를 닮아서 맛을 정말 잘 냈다. 내가 “어떻게 이렇게 맛있게 해?” 하면 “사랑으로 하니까!”하고 남편이 대답한다. (이 대목에서 살짝 닭살이라도 용서하시라!)

남편은 한 달 산후조리 기간을 진작부터 주변에 알려 놓았다. 일도 조정하고. 남편이 육아에 너무 매이는 게 아니냐는 걱정(?)어린 시선을 던지는 것을 무겁게 견뎌야 하기도 했다. 아내는 자신의 인생에서 이 시간을 당연히 감수하고 갈 마음을 어떻게든 설정하게 되는데, 남편은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이미 아내가 자신의 인생에서 아이를 위해 이미 내어 놓고 있는 많은 시간 중 일부에 지나지 않는 시간을 조금 내어 놓는 결정을 하는 것에, 남편도 사회도 너무 힘겨워한다. 종종 그 조금을 내어 놓으면서도, 그보다 더 많은 걸 내어놓고 자신의 몸까지 내어놓는 아내 앞에서 더 힘든 내색을 할 때면, 아내들은 서글프다 못해 그냥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돼버리고 싶다.

함께 산후조리를 통과한 소중한 경험, 동지가 되다!

둘째와 셋째를 위해 남편이 전적으로 집중한 총 두 달간의 몸조리 기간은 긴 인생에서 정말 한 줌도 안 되는 시간이었다. 두 팔 걷고 온 몸을 내어 던진 그 시간에 흘린 서로의 땀을 기억하는 것은 이후 함께 살아갈 인생을 떠받쳐 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버팀목이 되었다. 게다가 고통은 전혀 남아 있지 않고, 함께 힘겨운 시기를 통과했다는 동지 의식으로 충만할 뿐이다.

동네에 함께 사는 친구 두 집도 얼마 전에 남편들이 몸조리를 맡았다. 물론 당당히 육아 휴직을 냈다. 함께 하는 품앗이에 첫째 아이를 데리러 오는 그 남편들을 보면, 전장에서 잠시 빠져나온 기색이다. 막 싸움을 하고 나온 자의 가라앉지 않은 기운이 그대로 남아 있는. 그러나 어둡고 거친 기색이 아니라, 마치 사우나를 하고 나온 기색이다. 장거리 경주를 달리고 난 후의 흠뻑 젖은 땀 냄새에 묻어나는 상쾌함 같은 것 말이다.

이천 냉동창고 폭파로 안타까이 떠나가신 분들의 명복을 빌며

출산과 산후조리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또 나누고 싶은 이야기다. 그래도 공적인 장에 글을 쓴다는 것은 망설여졌다. 산후조리에 관련된 기사를 공모한다는 광고에 눈이 번쩍 뜨였지만 진작에 쓰는 걸 포기했다. 다시 몇 년 전 일을 풀어낼 것도 엄두가 안 나서.

그런데 또 병이 도졌다. 결국은 쓰고 말 것 같았다. <오마이뉴스> 메인에 걸린 기사를 보고서는 말이다. 그러다 다시 한 차례 제동이 걸렸다. 거기에 달린 댓글 때문이다. 이천 냉동창고 폭파 사고로 인해 40명의 노동자들이 숯덩이가 된 현실에 울분을 견딜 수가 없는데 웬 난 데 없는 산후조리 이야기냐고. 나는 다시 풀이 꺾였다. ‘그래 맞아!’ 하고.

그런데 쓰고 말았다. 그렇게 비장한 마음으로 남편과의 산후조리에 돌입했던 것은, 단순히 내 가정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남성이 세상에서 가장 여린 생명을 함께 돌보는 경험을 하는 것이 이후 사회에 미칠 영향은 정말 다를 수 있다고 믿고 소망했다.

각종 위험 물질을 취급하면서도 어떻게 노동청의 관리 감독도 전혀 받지 않고 안전을 총괄하는 책임자도 없이 공사를 강행할 수 있는가! 어떻게 일하는 사람들의 안위와 행복은 아랑곳없이 내 주머니 채우기에 급급할 수 있는가!

남편이 아내의 산후조리를 하며 가장 취약한 상태의 산모와 아기를 세심히 돌보는 경험을 하고, 엄마와 아빠의 협력을 지켜보며 아이가 자라나는 것은, 사회의 기본 토대가 되어야 할 성품과 관계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문화적 기반이 될 것이다.

요즘은 주위에서 남편이 산후조리도 하고 요리도 잘 하는 그런 모습들을 종종 본다. 그런 변화들이 이후 우리 사회가 약하고 소외받는 존재를 더욱 존중하고 그들의 행복과 윤택한 삶을 가꾸고 지켜줄 줄 아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귀한 씨앗임을 믿는다.

안타깝게 떠나가신 마흔 분의 노동자들께 삼가 명복을 빌며, 가족들에게도 평안을 빈다.

덧붙이는 글 | <산후조리 제대로 하셨습니까?> 응모글



태그:#사는이야기, #산후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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