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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과 여행은 차이가 있다. 여행은 가는 목적지가 분명하지만 방랑은 그야말로 발길이 닿는 데가 목적지가 된다. 사실 난 여행보다 방랑을 좋아한다. 발길이 가는 곳에 걸음을 멈추면 의외로 근사한 곳을 만난다.

매주 다니는 장산도 발길 닿는 데로 올라다녔다. 더 이상 새로운 풍경을 내 안에서 만날 수 없어서, 나는 느려터진 완행버스를 무작정 탔다. 그리고 승객들이 많이 내리는 기장군 내동에서 내렸다. 내동에 내리니 안적사 가는 표지판이 손짓했다. 안적사 가는 길은 아직도 흙길이었다. 장산의 깊은 골짜기에서 내려온 청아한 물소리며, 풀 섶의 서 있는 장승들이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반긴다. 이 호젓한 겨울 풍경에 나는 잠시 방랑자의 고독한 심사가 된다.

안적사
▲ 신라 문무왕 때 세운 안적사
ⓒ 송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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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적사는 천 년의 사찰이며 경남 기장군의 대표사찰이다. 안적사는 신라 30대 문무왕 원년 불기 1205년(서기 661년) 에 원효조사와 의상조사, 두 분이 수도의 길을 찾아 명산을 순방하며 다니다가, 동해가 환히 바라보이는 장산기슭을 지나갈 때 숲속에서 난데없는 꾀꼬리 떼들이 모여 날아와 두 스님의 앞을 가로막으며 어깨와 팔에 안겼다고 한다.

두 분은 이곳이 보통 상시로운 곳이 아니라는 것을 간파하고 원효조사가 가람을 세웠기에, 개산조(開山租)가 원효조사(元曉租師)이다.

겨울산사의 진맛
▲ 물속의 절 한채 겨울산사의 진맛
ⓒ 송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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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대사와 의상대사에 대한 일화는 전국 곳곳의 사찰의 유래만큼 많이 전해져 내려온다. '삼국유사'에 원효대사는 "이 세상에 얽매이지 않았고 거침이 없었다"고 쓰여 있지만, 모두에게 알려진 것처럼 원효대사에게는, 설총을 낳은 요석공주가 있었다. 그러나 의상대사에 대한, 고해를 건너 열반한 행적이 기이할 정도로 너무 깨끗하다.

아무튼 두 스님은 요즘말을 빌리면, 선의의 라이벌 관계이었다. 똑같은 시각에 공부를 시작하여 누구든지 먼저 오도(悟道)를 하게 되면 만나자고 맹세하고, 조금 떨어진 곳에 토굴을 지어 피나는 정진의 세월을 보낸 후, 성불에 먼저 입문하신 의상조사가 천녀(天女)가 나타나 천공을 매일 올리게 되었다.

한 계단씩 올라갈 때마다
▲ 적멸의 계단 한 계단씩 올라갈 때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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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산사의 입적
▲ 원통문 겨울산사의 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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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으로 '원효조사'를 청하여 천공(天供)을 같이 하려는데, 천녀가 나타나질 않아 원효조사는 기다리다 그냥 처소로 돌아가신 뒤에 천녀가 천공을 가지고 나타났다. 의상조사는 이에 심히 천녀를 나무라니 천녀는, '이곳 가람 주위에 화광(火光)이 가득 차 들어 올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때야 의상조사는 원효조사의 신통으로, 의상조사의 교만한 마음을 알고 금강삼매화(金剛三昧火)를 놓은 것을 알아챘다. 그러나 의상조사는 원효조사의 도력이 자기보다 훨씬 높다는 것을 알고 교만하지 않고, 원효조사를 사형(師兄)으로 정중히 모시며 이곳에 수선실(修禪室)을 넓혀 큰 가람을 신축하여, 금강삼매론경등일심법계(金剛三昧論經等一心法界)의 진리를 후학에게 설파 지도하며, 신라 백성에게 화엄사상을 역설하시어 구국정신을 고취시켜 삼국통일에 근간을 이루었다.

종소리처럼 퍼져있다.
▲ 안적사 둘레에는 원시의 바닷 냄새가 종소리처럼 퍼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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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
▲ 안적사 일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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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대에 두 분의 일화와 함께 안락사터의 산명(山名)은 앵림산(鶯林山)이 된다. 그리고 이곳에서 정진수도하여 안심입명(安心立命)의 경지를 요달하여 적멸상(寂滅相)을 통관하였다 하여, 사명(寺名)을 안적사(安寂寺)라 부르게 되었다.

지금도 전국에서 수선납자(修禪衲子)들이 구름 모이듯, 남방수선제일 도량(南方修禪第一道場)으로 불법의 바다를 넓히고 있다.

아름답다
▲ 안적사의 탱화는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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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을 찾다 보면 탱화 속에 십우도를 만난다. 그 십우도 속에 그려진 공(空)의 세계를 만난다. 그러나 불교의 이 무외한에게는 이 공의 화두가 매우 어렵다. 마찬가지로 원통문을 지나오면서도 '이게 무슨 뜻일까?' 고개를 가웃거리게 된다.

"원은 불법과 불성을 상징하고, 월인석보나, 월인천강지곡 등이 표상하는 달과 어우러져 한층 원의 의미를 심화시킨다. 원이란 형이상에서는 언어와 명상이 끊어진 자리이나, 형이하에서는 우주 만유가 이 원으로 표현된다. 이는 만법의 근원이며 실재이다. 이 천지안에 모든 교법이 천만가지로 말은 달리하나 그 실은 원 외에는 다시 한 법도 없다."

김열규 선생은 이처럼 설명한다. 그래도 어려워서, 원(圓)을 윤회의 순환성의 상징 정도로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따뜻한 나무의 절 한채
▲ 새둥지 따뜻한 나무의 절 한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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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불처럼 반겨줍니다.
▲ 정겨운 장승들이 목불처럼 반겨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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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어디에는
부서지는 괴로움도 있다 하니
너는 그러한 데를 따라가 보았느냐.
물에는 물소리가 가듯
네가 자라서 부끄러우며 울때
나는 네 부끄러움 속에 있고 싶었네.
아무리 세상에는 찾다찾다 없이도
너를 만난다고 눈 멀으며 쏘아다녔네.
늦봄에 날 것이야 다 돋아나고
무엇이 땅속에 남아 괴로와할까.
저 야마천에는 풀포기라도 돋아나 있는지
이 세상의 어디를 다 돌아다니다가
해지면 돌아오는 네 울음이요
울 밑에 풀 한포기 나 있는 것을 만나서
나는 다시 눈물이 나네.

- 고은 시 '눈물'

정겨운 흙길
▲ 안적사 가는 길 정겨운 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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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것에는 반드시 전설이 따른다고 한다. 원효조사와 의상조사의 창건설화가 깃든 안적사의 전설에 의해, 겨울산은 적멸 그 자체이다.

오늘따라 안적사는 더욱 고요하고 계곡물은 더 투명하고 밝다. 산과 계곡과 안적사는 나를 위해 그곳에 있는 것처럼…. 저녁연기 모락모락 올라오는 옛 마을에 닿은 발길은, 어디에서 만나지 못한 마음의 절 한 채를 만난다.

신비한 저녁 운무가 맴도는 앵림산, 그러나 내 마음의 귀는 아직 어두워 꾀꼬리 울음이 들리지 않는다. 평생 진리의 소리를 찾아 전국 산하를 누비며 호국의 횃불을 당긴 두 분의 고승의 원대한 염원처럼 저녁 산사의 종소리는 징하게도 크게 울린다.

저 종소리에 문득 가슴이 미어지는 까닭 또한 나는 알지 못한다. 억새들은 희끗희끗 바람에 풀씨를 부지런히 날리고, 산은 안적사를 품고 더욱 깊어만 간다.

지난날의 음악과 함께 이곳에 머물 것이다.
▲ 나는 어디로 헤매지 않고 지난날의 음악과 함께 이곳에 머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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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안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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