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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내내 지구 곳곳에서 선거가 진행된다. 그중에서 한국 대선과 가장 가깝게 맞물린 선거가 11월 24일 실시된 호주 총선이었다. 당초 박빙의 승부가 될 것으로 예상됐던 호주 총선은 노동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선거의 속성상 거기에는 많은 이유들이 작용했다. 그러나 <채널9>의 정치평론가 로리 오크는 "호주 총선 사흘 전에 돌출한 가짜 유인물 배포라는 사건 하나가 승부의 분수령으로 작용한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한국 같으면 작은 해프닝쯤으로 치부됐을지도 모를 가짜 유인물 사건으로 호주 총선이 요동쳤다는 분석이다.

 

한국에선 '이명박 강연 동영상'이라는 대형 사건이 터졌는데도 일부 언론사와 유권자들이 "도덕성 그까이꺼"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는 것 같다. 게다가 이 사건으로 오히려 논란이 되는 후보의 지지층이 결속할 수도 있다는 보도를 접했다.

 

선거 사흘 전에 마치 핵폭탄처럼 터져버린 자유-국민 연립당(아래 연립당)의 가짜 유인물 배포 사건의 전말을 소개하면서 한국과 호주의 선거풍토를 비교해본다.

 

가짜 유인물로 자멸한 보수정당

 

11월 21일 밤, 호주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해괴한 선거사건이 발생했다. 시드니 서부지역인 린지 선거구에 출마한 연립당 후보의 선거운동원들이 어둠을 틈타 가짜 유인물을 배포하다가 노동당 선거운동원과 경찰에 의해 적발된 것. 그중에는 해당 지역구에 출마한 카렌 치조프 후보의 남편도 있었다.

 

'호주이슬람연합'이라는 실재하지도 않는 유령단체가 만든 것으로 되어있는 가짜 유인물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있었다. "호주이슬람협회는 발리 테러범들이 사형당하는 것을 반대하고 린지 지역구 안에 무슬림 사원을 짓는 것을 찬성한 노동당을 지지한다."

 

호주인 80여 명을 희생시킨 발리 테러사건을 이용하여 반(反)무슬림 정서를 자극한 흑색 선전물이었다. 또한 노동당 소속 데이비드 브래드베리 후보가 아랍계 이민자 출신이라는 이유로 저질러진 상대후보 음해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보고받은 존 하워드 총리는 해당자들을 즉각 출당조치 하면서 거듭 사과의 뜻을 밝혔지만 사태를 되돌릴 수는 없었다. 한편 남편의 불법행위를 몰랐다고 주장한 카렌 치조프 의원도 당선이 유력했던 지역구에서 이 사건 하나 때문에 완패했다.

 

 

진실 드러낸 내부고발자의 용기

 

연립당은 도덕성 측면에서 치명타를 얻어맞고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이 사건을 알고 고민하던 연립당 당원이 양심의 가책을 느껴 노동당과 경찰에 제보한 사실이 밝혀지자 망연자실하고 말았다.

 

사전에 제보를 받은 노동당원과 경찰은 주택가를 돌면서 유인물을 우체통에 집어넣고 있던 현장을 덮쳐서 생생한 현장사진을 찍었고, 그들이 연립당 당원이라는 진술을 받아냈다. 호주의 모든 언론이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한 것은 당연지사.

 

한편 연립당으로서는 불행의 연속이었다. 바로 그 다음날이 존 하워드 총리가 호주기자클럽(National Press Club)에서 총선 마무리 기자회견을 하는 날이었던 것. 하워드 총리는 2시간 내내 그 사건을 해명하고 사과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그날 질문에 나선 20여명의 기자들의 끈질긴 질문공세도 큰 화제가 됐다.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기자 전원이 다른 사안은 건성으로 물으면서 가짜 유인물 사건에 대해서 꼬치꼬치 따져 물었던 것. 실체적 진실을 밝혀내고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정당을 응징하기 위한 기자정신과 시민정신의 발로였다.

 

 

지역구에서도 낙선한 하워드 총리 

 

정치인의 도덕성에 대한 유권자들의 심판도 엄정했다. 당초 예상과 달리 24석이라는 큰 차이로 노동당이 압승을 거둔 것. 선거 전, 1~3석 차이로 승패가 갈릴 것으로 예상했던 여론조사기관들의 전망이 무색해질 정도의 압승이었다. 더욱이 존 하워드 총리는 자신의 지역구에서조차 낙선하는 치욕을 당했다.

 

이런 결과를 놓고 연립당 안에서는 여러 가지 패인분석을 내놓았다. 그러나 연립당의 정책통인 닉 민친 의원은 "가뜩이나 어려운 선거였는데, 가짜 유인물 사건이 터지면서 연립당은 패배를 기정사실로 받아드릴 수밖에 없었다"고 토로했다.

 

<데일리텔레그래프>는 '이건 웃을 일이 아니다(It's no laughing matter)'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서, 린지 지역구의 현역의원이었던 제키 켈리가 "그냥 재미삼아 해본 정치 패러디였다"고 말한 것을 강하게 질타했다.

 

재키 켈리 의원은 스스로 정계를 은퇴했지만, 그의 후임자 카렌 치조프의 정치생명도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게 호주언론의 분석이다. 이렇듯 호주 정치인에게 요구되는 덕목 중에서 도덕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 무엇보다 크다.

 

도덕성에 흠집이 생기면 정치생명은 끝나는 것. 심한 경우 자살을 기도하는 의원도 있다. 다음은 호주정치계의 차세대 리더로 주목받다가 도덕성에 흠결이 생겨서 자살을 기도했던 두 의원의 얘기다.

 

[정치인 자살 기도 1] 여행경비 24만원 유용한 죄

 

1997년 닉 쉐리 의원은 41세의 젊은 나이로 상원에서 야당 부대표를 맡을 정도로 장래가 촉망되는 호주정가의 차세대 주자였다. 그가 타스마니아주의 상원의원으로 당선된 후 그의 이름 앞에는 늘 '떠오르는 별'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녔다.

 

그런데 그해 10월 2일, 닉 쉐리 의원은 '마지막 보도자료'라고 제목을 붙인 긴 유서를 써서 평소 가깝게 지냈던 호주통신(AAP) 의사당 지국장 앞으로 발송한 후, 손목의 동맥을 끊어 자살을 기도했다가 절명직전에 구출됐다.

 

"지금 내 이름은 진흙투성이다. 나의 모든 것이 파괴되어버린 지금 죽음밖에는 선택할 것이 없다. 나는 죽음을 통해 나의 어리석음을 국민들에게 사과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자살을 기도한 이유는 단 한 가지다. 의정활동비를 정산하면서 320호주달러(약 24만 원 정도)의 여행경비를 잘못 계상하여 집권당 재무상으로부터 조롱에 가까운 공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호주정치풍토에서 이런 사안이 발생하면 해당의원은 정치적으로 치명타를 입게 된다.

 

[정치인 자살 기도 2] "오늘 밤에 함께 잘 수 있느냐?"

 

존 브로그덴 의원은 17살에 자유당 청년회장에 당선되고 27살에 의회에 진출했다. 또한 그는 2002년, 33살에 뉴사우스웨일스(NSW)주 자유당 당수로 피선되는 등 호주정치계의 최연소 기록을 몽땅 갈아치운 유망주였다.

 

집권의 꿈에 부풀어있던 존 브로그덴은 2005년 8월 5일 힐튼호텔에서 열린 파티에 참석했다. 차기 총리가 확실시되는 그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렸고 그는 득의만면한 표정으로 미래의 청사진을 펼쳐 보이기에 바빴다.

 

술이 거나해진 브로그덴은 친근감의 표시라면서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선데이텔레그래프> 저스틴 페라리 기자의 엉덩이를 만졌다. 게다가 처음 만난 <선헤럴드>의 안젤라 커밍 기자에게 "오늘 밤에 함께 잘 수 있느냐?(Are you available tonight?)"라고 물었다. 이는 호주의 싱글 남자가 술집에서 여성을 유혹할 때 흔히 사용하는 표현이다.

 

술이 깬 다음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렸지만 여기자들에게 사과할만한 용기가 브로그덴에겐 없었다. 안젤라 커밍 기자는 그날 밤의 일을 <선헤럴드>에 상세하게 보도했다. 승승장구하던 한 정치인의 몰락은 그렇게 마무리되는 듯 보였다.

 

신문보도가 나간 날 밤, 당수직 사퇴를 발표한 그는 자신의 지역구 사무실에서 자살을 기도했다. 의식불명의 상태에 빠졌다가 야간순찰대에 발견돼 극적으로 회생했으나 정치인으로서 생명은 이미 끝난 상태였다.

 

호주에도 보도된 한국 국회의사당 폭력사태

 

마침내 한국 대선 하루 전이다. 비록 투표권도 없는 해외동포이지만 한국의 대선과 총선은 호주에서 실시되는 선거 못지않게 주요 관심사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몇 배 더 관심이 간다.

 

기자만 그런 게 아니다. 요즘 호주동포들이 모이는 곳에 가면 십중팔구 한국 대선 얘기로 열기가 넘친다. 지난 11월 30일, 시드니 한인회관에서 열린 '이명박 후보 호주 후원회 밤' 행사장도 좌석이 부족할 정도로 북적거렸다.

 

물론 호주언론에서는 한국 대선뉴스를 거의 보도하지 않는다. 그런데 지난 일요일(16일)엔 사정이 좀 달랐다. 별다른 외신이 없는 상황에서 '이명박 특검법'을 둘러싸고 한국 국회의사당에서 폭력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abc-TV는 이 사태를 약 2분 정도 외신으로 보도했고 <채널7>에서는 약 3분 동안 가십성으로 보도했다. 처음엔 아주 놀라는 표정이었지만 나중엔 심하게 빈정거리는 분위기였다.

 

"정치인의 도덕성은 쉽게 포장되지 않는 본질이다"

 

한편, 그날 호주국영 abc-TV는 한국뉴스를 보도한 직후 '달라이 라마 호주방문' 특집을 방영했다. 지난 6월 중순 시드니에서 열린 대중강연회 녹화방송이었는데, 그날의 주제는 '행복과 행복의 근원(Happiness and it's causes)'이었다.

 

abc-TV 프로그램 진행자는 강연회를 시작하면서 "1996년 이후 호주의 불교인구가 두 배로 늘었다, 물질의 시대에 행복이란 과연 무엇이며 행복의 근원은 무엇이냐?"고 달라이 라마에게 물었다.

 

그는 "행복은 단지 느낌일 뿐이다, 그래서 가난하지만 행복한 사람이 있고 부자로 떵떵거리며 살면서도 불행한 사람도 있다, 그런데 많은 현대인들은 고결한 가난뱅이보다 부도덕한 부자가 되기를 갈망한다"고 답변했다.

 

그는 이어서 "물질을 숭배하다보면 부도덕의 함정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호주에서 불교신자가 늘어나는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행복은 돈으로 사는 게 아니고 순결한 마음으로 느끼는 고결한 것"이라는 말로 답변을 마무리했다.

 

문득 세속적인 경제논리에 매몰된 것처럼 보이는 한국 대선정국이 떠올랐다. 또한 존 브로그덴의 동료의원이 남긴 다음과 같은 말도 함께 떠올랐다. "이미지와 본질은 다르다. 정치인의 도덕성은 쉽게 포장되지 않는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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