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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주 전인 11월 24일, 호주국민은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선택했다.

 

33년만의 기록인 4.2%라는 낮은 실업률을 자랑하면서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약속한 보수정당을 제쳐두고, 환경 및 교육 우선 정책을 공약한 진보정당의 손을 들어준 것. 그것도 호주역사상 보기 드문 압승을 안겨주었다.

 

그렇다면 10여일 전 출범한 캐빈 러드 총리의 노동당 정부와 함께 2008년을 향하고 있는 호주 국민들은 지금 행복할까? 다음 몇 가지 상징적인 변화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0년쯤 젊어진 정치지도자들의 나이

 

11년 6개월 동안, 무려 4기 연속집권이라는 신화를 이어왔던 존 하워드 전 총리는 68세의 노인이다. 이명박 후보(66)보다 2살 많고 이회창 후보(72)보다 4살 적다. 노령에 접어든 존 하워드의 나이는 이번 총선의 주요 쟁점 중 하나였다.

 

반면에 노동당의 '4전5기 신화'를 이루어낸 캐빈 러드 신임 총리는 50세를 갓 넘긴 비교적 젊은 정치인이다. 정동영 후보(54)보다 4살이 적은 나이. 정치경력도 9년으로 짧은 편이다.

 

한편 러드 총리가 취임하는 날 자유-국민 연립당 의원총회 투표를 통해 당수로 선출된 브란덴 넬슨 제1야당 당수의 나이도 48세다. 더욱이 줄리아 길라드 부총리와 그녀와 맞설 줄리 비숍 연립당의 부당수도 40대 여성이다.

 

존 하워드의 퇴장으로 호주 정치리더들의 연령대가 20살쯤 젊어진 것. 오죽하면 하워드와 같은 당 소속의 정치인이 "총선패배 원인 중의 하나가 그의 나이였다, 나조차 그 늙은이를 보는 게 지겨울 정도였으니 젊은 유권자들의 70% 이상이 노동당을 지지한 것도 자연스런 결과"라고 말했을까?

 

그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하워드는 총리 취임 10주년이었던 2006년에 명예롭게 은퇴했어야 했다, 현역 총리가 자신의 지역구(시드니 베네롱 지역구)에서조차 낙선하는 치욕을 당할 이유가 없었다"면서 "지금 국제사회의 리더들 대부분이 40~50대이거나 기껏해야 60대 초반"이라고 말했다.

 

취임 첫날, 10년 동안 미룬 교토의정서 서명

 

존 하워드는 서방국가 리더들 중에서도 유난스럽게 신자유주의를 신봉한 극우성향의 정치인이었다. 특히 그는 경제를 살린다는 명목으로 친미정책(일부 언론은 친부시정책이라고 부름)을 고집스럽게 밀어붙였다.

 

이를 두고 캐빈 러드는 총선 기간 동안 "하워드 총리는 입만 열면 '경제우선정책'과 '국가이익우선주의'를 들먹이면서 친미정책을 주장했다, 그 결과 호주는 국제테러그룹의 공격목표가 됐고 환경후진국으로 전락했다"고 공격했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 국가위신을 추락시켰다고 공격한 건데, 특히 그가 지나칠 정도로 친미정책을 고집스럽게 추진한 것을 비판했다. 존 하워드가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함께 이라크 전쟁을 주도하고 교토의정서에 서명하지 않은 것도 친미정책의 결과물로 분석한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캐빈 러드 총리는 12월 3일, 새로운 정부를 출범시키는 공식절차인 연방총독 앞에서의 취임선서가 끝나자마자 교토의정서에 서명했고, 그 증서를 들고 UN환경회의가 열리는 인도네시아 발리로 가서 반기문 UN사무총장에게 직접 전달했다. 부시 대통령에게 동참할 것을 은유적 표현으로 권유하면서.

 

 

노동계층이 대우 받는 세상으로

 

호주 총선 선거운동 기간 중에 캐빈 러드를 적극 지지한 호주노동조합(ACTU)의 샤론 버로우 의장은 "하워드 총리가 툭하면 지난 10년 동안 대부분의 OECD국가들이 고전한 것과는 달리 호주 경제가 잘 나가는 것을 자랑했지만 노동자의 삶은 더욱 힘들어졌다"면서 "대략 20%의 부자들만 더 부자가 되는 경제성장은 원하지 않는다"고 공격했다.

 

캐빈 러드도 선거운동 기간 내내 "노동계층이 대우받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오죽하면 한 방송사에서 캐빈 러드가 하루에 몇 번이나 노동계층(Working class people)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지 그 숫자를 세어보았을까.

 

특히 존 하워드 정부가 고집스럽게 밀어붙였던 노사관계법(Work Choices)의 폐지를 철썩 같이 약속했다. 이 법은 일방적으로 사용자에게만 유리한 법으로 노동자들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이번 총선 결과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한편 노사부 장관을 겸직하게 된 줄리아 길라드 부총리는 최근 "(노동자 임금 삭감으로 이어진) '워크 초이시즈'(Work Choices) 법규로 인해 노동자들이 그동안 박탈당한 각종 수당의 규모를 산출해서 공개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를 위해 해당 법률조항을 검토 중인 길라드 부총리는 "노동자의 권리를 침해한 하워드 정부의 잘못에 대해서 국민은 알 권리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12년 가까운 세월 동안 하워드 정부로부터 '찬밥신세'를 면치 못했던 노동자들을 러드 정부가 앞으로 어떻게 대접할지 가늠해볼 수 있는 상징적인 장례식이 그의 취임 사흘째인 12월 5일에 시드니에서 열렸다. 석면피해자 버니 밴톤의 장례식을 국장(國葬)으로 예우하면서 러드 총리가 직접 참석하여 추모한 것. 하워드 정부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여야 모두 여성 정치인 대약진

 

2007년 호주총선은 연방정부와 지방정부(6개주 및 2개 특별행정구)를 노동당이 100% 장악하고 현역 총리의 지역구 낙선 등 숫한 진기록을 양산했다. 또한 호주 최조의 여성 부총리가 탄생하여 국민들이 아주 기뻐하고 있다.

 

줄리아 길라드 부총리는 변호사 출신으로 강성좌파 정치인이어서 선거운동 기간 내내 연립당으로부터 "공산당원 출신"이라는 공격을 받았다.

 

또한 그녀는 정치활동을 위해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선언하여 헤프너 상원의원으로부터 "아이를 낳은 경험이 없는 여성은 총리자격이 없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길라드 부총리가 세운 신기록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캐빈 러드 총리가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리고 있는 UN세계기후변화대책회의 참석차 출국하자, 여성으로는 최초로 총리대행(Acting Prime Minister)을 맡은 것.

 

그런데 여성 총리대행의 첫 코멘트는 "호주 여학생들이 내 모습을 보면서 새로운 비전을 갖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였다.

 

한편 시드니 베네롱 지역구에서 존 하워드 전 총리를 물리친 abc-TV 방송앵커 출신의 맥신 맥큐 초선의원이 정무장관에 기용되는 등 호주 정치역사상 가장 많은 숫자의 여성 장관이 임명됐다. 제1야당인 연립당의 부당수로 줄리 비숍이 선출된 것도 호주정계의 여성 선풍에 한몫했다.

 

여론조사 눈감고 하나?

 

당초 '박빙의 승부'로 점쳐졌던 선거에서 노동당은 스스로 놀랄 만큼 압승을 거두었다. 대부분의 여론조사기관이 1~3석의 차이로 승부가 날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20여 석의 큰 차이가 발생한 것.

 

선거 하루 전인 23일 아침에 발표된 '갤럭시 폴'의 여론조사 결과는 52% 대 48%로 노동당의 근소한 우세였다. 이를 두고 한 네티즌은 "여론조사를 눈감고 하나?"라는 핀잔을 <데일리텔레그래프>에 남겼다.

 

한편 호주는 모든 후보에게 지지순위를 기표하여, 어느 한 후보가 '50%+1표'를 얻을 때까지 개표를 계속하는 우선순위투표제도(preferential voting system)를 채택하고 있다. 사표방지를 위한 제도인데, 1위 표를 가장 적게 얻은 후보를 계속 탈락시키면서 그 후보가 얻는 표를 다음 지지순위(preference)를 얻은 후보에게 넘겨주는 방식이다.

 

또한 투표를 하지 않으면 벌금을 물리는 강제투표제도를 채택하기 때문에 투표율이 95% 정도를 넘나든다. 특히 투표에 무관심한 젊은이들이 투표에 참가하도록 만드는 이런 방식의 선거제도가 2007 호주총선에서 선거혁명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골프 코스 거니는 존 하워드

 

기자는 호주총선 선거운동 기간에 존 하워드 총리와 캐빈 러드 당수를 몇 차례 취재하고 인터뷰할 기회를 얻었다. 그런데 그때마다 두 사람은 배가 고픈 모습이었다. 연설과 인터뷰 중간에 손으로 음식을 집어먹는 모습을 여러 번 목격할 정도로.

 

그러나 두 사람의 성품은 크게 달랐다. 노스 시드니 지역구를 방문한 캐빈 러드는 "총선 당일에는 지역구인 퀸즐랜드에 머물 텐데 지금 승리를 예상한 포즈를 취해 달라"는 기자의 요구에 기분 좋게 웃으면서도 "아직 이르다"면서 손사래를 쳤다.

 

반면에 이스트우드 럭비클럽에서 만났던 존 하워드는 자신의 주장을 강한 톤으로 설명하다가도 자신에게 불리한 질문을 던지면 눈을 감거나 입을 꽉 다물어버렸다. 항상 웃음을 잃지 않으면서 자세하게 답변해주는 캐빈 러드와 아주 다른 모습이었다.

 

12월 10일, 두 사람의 극명하게 다른 모습이 언론에 보도됐다. 러드 총리가 UN세계기후변화대책회의 참석차 발리로 떠나는 모습과 시드니의 한 골프코스에서 골프를 즐기는 은퇴 정치인 존 하워드의 모습이 나란히 보도된 것.

 

50세의 젊은 총리가 호주공군 1호기를 타고 국제외교무대에 데뷔하기 위해서 떠나는 모습은 호주의 밝은 미래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또한 친구들과 함께 골프카트를 밀면서 골프코스를 거니는 존 하워드의 모습도 불행해 보이지 않았다. 지역구에서 그를 이긴 맥신 맥큐 의원도 "그는 너무 오랫동안 정치에 갇혀서 고생했다"면 하워드를 위로했다.

 

호주는 지금 행복해 보입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새로운 정치지도자가 나타나면 '허니문 기간'이 한동안 이어진다. 승자는 패자를 끌어안고 패자는 승자의 새 출발을 별다른 비판 없이 지켜본다. 지금 호주 정계의 분위기가 딱 그러하다.

 

보건부 장관을 역임한 토니 애보트 연립당 의원은 "젊고 의욕이 넘치는 캐빈 러드 총리가 업무수행을 잘할 것으로 믿는다"면서 "12년 가까이 여당만 해온 연립당이 야당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스스로 점검하면서 미래를 구상할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편 캐빈 러드 총리는 선거공약사항을 최우선으로 지키기 위해 노동당 소속의 모든 의원들과 지구당 책임자들에게 "지역구 안의 모든 노숙자 실태를 파악해서 보고할 것"과 "모든 고등학교의 컴퓨터 보유실태를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이어서 "새 정부는 25일(크리스마스)과 26일(Boxing day)만 쉬고 크리스마스 휴가 없이 새로운 업무를 수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는 취임 첫날 교토의정서에 서명하고, 둘째 날 학교를 방문했으며 셋째 날 노동자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등 상징적인 일정을 보내고 있다.

 

대선을 불과 닷새 앞둔 시점에서 대한민국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면서, 부디 대한민국도 호주처럼 투표를 잘 해서 함께 행복해지기를 기원해본다. "4.2%의 낮은 실업률 그까이꺼" 하면서, 경제 우선이 아닌 사람 우선으로 투표한 호주의 여유로운 현실이 부럽다는 생각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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