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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곶이다리
▲ 전곶교. 살곶이다리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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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왕은 한강변 낙천정에 있고 대비는 양주 풍양정에 있으니 바빠진 것은 임금 세종이었다. 풍양정에 나아가 병석에 누워있는 어머니를 뵙고 낙천정에 나아가 아버지에게 문안드리는 것이 임금의 일과였다. 세종이 대소신료를 거느리고 낙천정을 찾아 태종을 배알했다.

“살곶이 돌다리는 대신들의 의논을 따라 역사를 시작한 지 이미 여러 날이 되었다. 쉽게 되지 않으리라 생각은 하였으나 이제 곧 장마철이 다가오니 공사를 중단하도록 하라.”

“다리의 기초 공사가 반쯤 되었으니 이미 된 곳은 근일 중에 마치고 시작하지 아니한 곳은 가을 되기를 기다려 역사를 마치게 할까 하나이다.”

영의정 유정현이 아뢰었다.

“일하는 사람들이 비록 농사꾼은 아니라 하더라도 삼복고열(三伏苦熱)에 사람에게 일을 시키는 것은 마땅치 않다. 예전에는 백성을 부리는데도 때를 가리었다. 하물며 장맛비 오기 전에 반드시 역사를 마칠 수도 없는 것이니 마땅히 역사를 정지하고 가을되기를 기다리게 하라.”

태종의 명에 따라 공사에 동원된 군사들을 돌려보냈다. 살곶이 다리는 폭 6m, 길이 78m에 불과한 아주 작은 다리다. 오늘날의 기술과 장비를 동원하면 며칠 내에 끝낼 수 있는 공사였지만 당시에는 국력을 총동원 한 토목공사였다. 이렇게 시공과 중단을 거듭하던 살곶이 다리는 60여년이 흐른 후 성종14년(1483)에 완공되었다.

귀신을 피해 도망가는 것이 상책이다

풍양정에서 요양 중이던 대비의 병세가 악화되었다. 심신이 쇠약해진 대비가 고열에 시달렸다. 어의(御醫)의 진맥은 학질이었다. 병원균 검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당시의 한의(漢醫) 진맥이 올바른 진단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대궐에 긴장감이 흘렀다. 학질은 치료약이 없고 치사율이 높았기 때문이다.

임상이 발달한 서양의학에서도 1630년경부터 키나 피(皮)가 사용되었고 1820년부터 키니네가 특요약으로 사용되었으니 한방에 의존하던 당시의 의료진과 궁중에 비상이 걸릴 만도 하다. 수심이 가득한 왕실에서는 대비를 낙천정으로 옮겼다. 대비를 괴롭히는 귀신의 음해로부터 피방이다.

환관 김용기를 개경사에 미리 보낸 세종이 환관 김천을 이천에 보내 양녕대군을 불러 오도록 했다. 밤을 세워 달려온 양녕과 효령 그리고 세종이 시위하는 군사들도 물리치고 낙천정에 있는 대비를 모시고 개경사로 떠났다. 대비가 낙천정을 떠난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환관 2인, 시녀 5인, 내노 14인만 데리고 떠난 간소한 행차였다.

대비를 견여(肩輿)로 모신 일행이 발길을 재촉했다. 실록에는 술사둔갑법(術士遁甲法)을 부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만큼 마음이 급했다는 방증이다. 누가 어떠한 도술을 부렸는지 알 길이 없으나 상당한 수준의 도사(道師)가 동행했나 보다. 당시 도교는 척불숭유 정책의 파편을 맞고 깊은 산중으로 잠적했으나 높은 경지의 도사들이 있었다.

야심한 밤. 삼경(三更)에 개경사에 도착했다. 대비를 정갈한 곳에 누이고 세종이 친히 약사여래에 불공을 드렸다. 주지스님으로 하여금 밤을 새워 기도를 드리도록 했지만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개경사는 태조 이성계가 잠들어 있는 건원릉 능참사찰이다. 낙천정이 있는 광진구 자양동에서 개경사가 있는 동구릉까지는 짧지않은 거리다. 때는 6월 초순, 칠흑같이 깊은 밤. 길도 변변치 않은 강변을 따라 광나루를 지나고 아차산 기슭 산길로 동구릉까지 횃불과 초롱불로 길을 밝히고 환자를 모시고 임금이 행차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예조판서 허조가 좌랑(佐郞) 임종선을 풍양궁에 보내어 태종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경복궁 뒤 한양 주산 정상에 있는 백악산 표지석. 최근 개방된 이후 새로 세웠다.
▲ 백악산. 경복궁 뒤 한양 주산 정상에 있는 백악산 표지석. 최근 개방된 이후 새로 세웠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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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대비와 주상의 간 곳을 몰랐더니 오늘에야 알고 보니 주상이 대비의 학질을 근심하여 환관 두 사람만 데리고 단마(單馬)로 대비를 모시고 나갔구나. 몸소 필부(匹夫) 노릇을 하며 대비의 병 떼기를 꾀하니 그 효성을 아름답게 여긴다.”

대비의 병세에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한 태종이 공비(恭妃)로 하여금 백악산과 목멱산, 송악산, 감악산, 그리고 양주성황(楊州城隍)의 신에 기도하게 했다.

개경사에서 지극정성으로 불공을 드렸지만 대비의 병세에 차도가 없었다. 세종과 양녕·효령이 대비를 모시고 도가류(道家流)의 중 해순으로 하여금 둔갑술을 행하게 하여 풍양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오부(吳溥)의 집이었다.

마음이 급해서일까? 둔갑술이 통하지 않아서일까? 칠흑 같은 야심한 밤에 길을 잃어 다른 집에 도착했다. 집이 좁고 누추했다. 목적지를 바꿔  풍양 남촌 최전의 집으로 찾아들어가 기도를 올렸으나 별무효과였다. 다급해진 세종이 한성부와 개성유후사에 교지를 내렸다.

“대비의 학질이 낫지 않으니 능히 다스릴 자가 있으면 장차 두터운 상을 줄 것이다. 널리 찾아 구하거든 역마를 주어서 급히 보내라.”

한성부에서 정줄(鄭茁)과 중, 무속인 등 수십 인을 구해 풍양으로 보냈다. 비방이 있다는 3, 4인에게 처방을 구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대비의 병환이 점점 심해져 갔다. 세종이 주야로 대비를 모시고 잠시라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탕약과 음식을 친히 맛보지 않으면 드리지 않고 병환을 낫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있으면 어떠한 일이든지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이때 방술을 잘 한다는 자가 찾아왔다.

“방소(方所)를 피할진대 모름지기 시종을 간단하게 함이 좋습니다.”

세종은 시위하는 군사들을 다 보내어 한 사람도 가까이 하는 자가 없게 하였다. 대비의 병세가 점점 악화되었다. 귀신이 극성부리는 것으로 판단했다. 귀신으로부터 도망가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되었다. 세종이 밤에 대비를 모시고 몰래 풍양궁 남교(南郊) 2리쯤 되는 풀밭에 행차하여 자리를 잡았다. 양녕·효령 두 대군과 청평·평양 두 공주도 따랐다. 정줄과 도류승(道流僧) 을유가 방술을 행하였으나 병세는 점점 악화되었다.

환자를 끌고 다니는 지극정성 효심

세종이 대비를 모시고 갈마골(加乙麿谷) 박고의 집 북쪽 송정(松亭)으로 행차를 옮겼다. 태종이 와서 문병하고 조금 있다가 돌아갔다. 밤에 또 건원릉 길가로 옮겼다. 세종이 대비를 모시고 송계원(松溪院) 냇가에 행차를 옮기니 대비의 병환이 조금 나아졌다.

한숨을 돌리고 있는데 황해도 곡산 사람 홍흡이 학질 다스리는 비술(秘術)이 있다고 찾아왔다. 을유와 더불어 같이 행하게 하였다. 차도가 없었다. 세종이 대비를 모시고 선암(繕巖) 아래 냇가로 행차를 옮기고 무당으로 하여금 악차(幄次)에서 신에게 제사를 드리도록 했다.

세종이 대비를 모시고 새벽에 동소문으로 들어와 흥덕사를 찾았다. 양녕·효령 두 대군은 도보로 따라왔으나 시종자들은 임금이 간 곳을 잃어버렸다. 세종은 흥덕사에 당도했는데 동대문 밖 안암동에 장전(帳殿)을 설치하고 시위하던 군사들이 해가 저물어 성안으로 돌아왔다. 임금을 놓친 것이다. 이렇게 옮겨 다닌 결과 대비의 병환이 호전되었다고 판단한 세종은 이로부터 밤마다 행차를 옮겨 사람들이 임금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

민간신앙으로 귀신을 쫓기 위하여 음나무(엄나무) 등 가시가 있는 나뭇가지를 출입구 상인방(上引枋)에 걸어두거나 얹어 두었다.
▲ 귀신. 민간신앙으로 귀신을 쫓기 위하여 음나무(엄나무) 등 가시가 있는 나뭇가지를 출입구 상인방(上引枋)에 걸어두거나 얹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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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야행(夜行)은 계속되었다. 대비에게 달라붙어 괴롭히는 귀신을 떨쳐버리기 위해서는 귀신이 활동하는 시간 자시(子時)를 전후하여 움직였다. 대비를 모시고 흥덕사를 나선 세종이 총제 곽승우의 집으로, 사윤 이맹유의 집으로, 평양부원군 김승주의 집으로, 부윤 이맹균의 집으로 전전했다.

학질은 고열에 시달리는 환자에게 휴식과 절대 안정을 필요로 하는 질환이다. 이렇게 대비를 모시고 다녔으니 병환이 더 악화될 만하다. 허나, 의술이 발달하지 않은 당시에는 귀신을 피해 다니는 것이 상책이고 지극정성으로 간호하면 하늘도 감응하리라 믿었다. 이것이 효심의 전부였다.

태종이 환관 노희봉을 세종에게 보내 선지를 전했다.

“들으니 대비의 병환이 나아졌다니 다시 발하지는 않을 것 같다. 나라는 오래 비울 수 없으니 주상은 창덕궁에 돌아와 국사를 보면서 견여(肩輿)로 문안할 것이고 나도 또한 때로 가서 병을 볼 것이다. 명일에는 창덕궁 곁에 청정한 곳을 가려 옮겨 거처하시게 하라.”

명을 받은 세종이 대비를 모시고 창덕궁 서별실(西別室)로 들어왔다. 풍양궁에 있던 태종이광연루에 이어하고 세종으로 하여금 대비를 모시고 창덕궁의 별전에 들어가 거처하게 했다. 세종의 극진한 간호 속에 대비에게 전국술(醇酒)을 조금 드렸다. 순주를 마신 대비가 혼침(昏沈)에 빠져 들었다. 순주는 군물을 타지 않은 농도가 진한 술이다.

서울 내곡동 헌릉에 있는 원경왕후 능침이다.
▲ 헌릉 서울 내곡동 헌릉에 있는 원경왕후 능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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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비가 혼수상태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자 역마를 띄워 대자암의 지계승(持戒僧)을 불러 오도록 했다. 지계승이 21명의 승려를 데리고 부랴부랴 도착했다. 광연루에 구병관음정근(救病觀音精勤)을 설치하고 불공을 드렸으나 대비는 깨어나지 못했다. 태종이 예조판서 허조와 지신사 원숙을 불렀다.

“대비의 병환이 이미 위태하다. 대비가 지금 비록 생존하고 있으나 살아나기는 힘들 것 같다. 일기가 너무 더우니 관곽 등을 속히 챙겨 치상할 일을 준비하라.”

대비가 낮 오시에 별전에서 숨을 거두었다. 개성의 세력가 민제의 딸로 태어나 정비(靜妃)에 책봉된 민씨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세종이 흰 옷과 검은 사모와 흑각대로 갈아입고 거적자리(苫)에 나아가 머리 풀어 통곡했다.

친정이 몰락하는 아픔을 겪으며 태종의 부인으로서는 불행했지만 세종의 어머니로서는 행복했던 여인이 영면했다. 향년 56세다. 임금 아들을 이승에 남겨두고 타계한 원경왕후 민씨는 지아비가 잡아 둔 수릉에 먼저 안장되었다. 오늘날의 헌릉이다.


태그:#세종대왕, #원경왕후, #태종, #낙천정, #풍양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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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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