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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년 8월 3일 부산대 중앙도서관 앞에서 15개 고등학교 350여명의 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부고협' 출범식이 진행됐다. 이날 출범식은 경찰의 강제 해산에 맞선 대학생들과 교사들의 적극적인 보호아래 치러졌다.
▲ 부산지역 고등학생 협의회 출범식 89년 8월 3일 부산대 중앙도서관 앞에서 15개 고등학교 350여명의 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부고협' 출범식이 진행됐다. 이날 출범식은 경찰의 강제 해산에 맞선 대학생들과 교사들의 적극적인 보호아래 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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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서울에 서울지역고등학생연합(서고련)이 있었다면, 89년 부산에는 '부산지역고등학생협의회(부고협)'가 존재했다. 87년 민주화 바람을 타고 이어지던 고등학생운동(이하 고운)은 서울을 중심으로 이어지다가 전교조 결성으로 다수의 교사들이 해직되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된다. 지역별 고등학생 조직들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하는데, 부고협은 부산지역 고등학생운동의 중심이었다.

87년 '서고련'이 정치적 목적으로 만들어졌다면, 89년 '부고협'의 결성은 전교조 교사들의 해직과 교육민주화가 주된 원인이었다. 마산 창원지역의 '마창지역고등학생협의회(마창고협)', 광주의 '광주지역고등학생협의회(광고협)' 등도 같은 바탕이었다.

87년 조직적으로 나타난 고등학생운동이 88년 그 기반을 다져나가더니 89년에 이르러 전교조 결성과 함께 들불처럼 번져나갔던 것이다.

고등학생운동을 연구한 양돌규(성공회대 사회학과)씨는 그의 논문에서 89년을 '1985년부터 전개된 고등학생운동의 종합국면'으로 분석한다. "교육운동 성격과 조직운동 성격, 학내 민주화 요구 등으로 대표되는 고등학생운동의 성격이 89년 한해 모두 겹쳐지면서 나타났다"는 것이다.

또한 "이 때 등장한 각 지역 학생협의체는 이 세 가지 운동이 중첩되는 가운데 그 중심에 서 있던 조직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89년은 고등학생운동의 종합국면

황순주씨는 부고협 의장으로 당시 부산지역의 고등학생 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학생탄압에 항의해 당시 평민당사에서 단식 농성을 벌였을 만큼 부산지역 고등학생운동의 중심으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고등학생운동(이하 고운)이 역사에 잘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그 흐름 속에 필연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부분이었습니다. 전교조가 출발했지만 고운은 학내 자주화나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있어왔고 그 흐름 속에서 성장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89년 고운에 대한 그의 평가다.

"비록 어려움이 많았지만 사회를 지탱하는 건강한 흐름을 만들어냈다"는 데서 그는 20년 전 고운의 의의를 찾는다. 또 "그 활동을 바탕으로 지금의 내가 서있다"고  말했다. 

89년 부산지역 고등학생 협의회 의장을 지낸 황순주씨는 경기문화재단 전문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 황순주 전 부고협 의장. 89년 부산지역 고등학생 협의회 의장을 지낸 황순주씨는 경기문화재단 전문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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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지역의 고운이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은 88년 즈음. 흥사단과 YMCA 등을 통한 교사 학생들의 분과활동이 활발히 전개됐고, 도서원이란 공간을 통해 교사 학생들 간 만남이 이뤄지게 된다. 서울에서 나눔터나 자주학교가 열렸던 시기 부산에서는 푸른학교가 열리며 학생들 간의 교류가 이어지게 된 것이다. 공간이 비합법으로 열리기 시작한 때였다.

당시 부산지역 고운의 흐름은 두 가지였다. 외곽에서 조직화 되는 모습으로 학생그룹이 형성되는 것이 하나였고, 학생회 직선제를 이뤄내며 학교 내에서의 조직화를 이뤄내는 것이 또 하나였다. 주체적인 활동을 통해 학생회 직선제를 이뤄낸 학교가 구덕고·학산여고·용인고를 포함해 20여 개교에 달했다.

'지속가능한 운동을 위한 목표를 잡자'라는 기조 아래 반합법적 조직과 비합법적 조직들이 섞여있는 상태였다.

당시 황순주씨는 용인고 학생회장에 출마했다. 고1 때부터 민족극패 활동과 연합 풍물패 활동을 기반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의식이 열리던 시기, 직선제로 치러진 최초의 선거에서 그는 당당히 학생회장에 당선된다.

87년 6월 항쟁의 흐름이 교육 분야, 특히 고등학생들 환경에 영향을 끼친 것이 자주적 학생회 건설로 대표된 학생회장 직선제였다. 이는 대통령 선거가 직선제로 바뀐 사회구조가 영향을 준 것으로 그 자체가 학생 대중을 이끄는 힘을 발휘하면서, 부산지역 고운의 중심이 되는 토대를 제공한다.

그리고, 전교조 교사들에 대한 해직이 시작될 무렵 직선제가 이뤄진 각 학교 학생회장들  간의 모임을 확장해 결성된 것이 '부산지역고등학생협의회(부고협)'였다. 부고협은 부산지역 고등학생 운동을 조직적으로 이끌며 민주교육 요구를 가로막는 교육현실에 거세게 저항했다. 하지만 정권의 탄압 또한 만만치 않게 전개됐다. 황순주씨를 포함해 많은 학생들이 제적 무기정학 등의 징계를 당한 것이다.

이에 항의하기 위해 황순주씨는 광고협 이형진씨, 남서울상고 김설준, 마창고협 전경국과 함께 평민당사에 올라와 단식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다시 학교로 돌아가지는 못하고 만다. 치열하게 전개된 89년 고등학생 운동의 중심에서 그 역시 많은 상처를 안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광고협 이형준(가운데)과 부고협 황순주(우측)는 89년 11월 22일 당시 평민당사에서 '구속학우 석방 및 학생 부당징계 철회'를 주장하며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농성장을 찾아와 학생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이수호 당시 전교조 사무처장
▲ 단식농성중인 고등학생 광고협 이형준(가운데)과 부고협 황순주(우측)는 89년 11월 22일 당시 평민당사에서 '구속학우 석방 및 학생 부당징계 철회'를 주장하며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농성장을 찾아와 학생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이수호 당시 전교조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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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고시를 통해 동아대에 진학한 황순주씨는 그러나 학생운동에는 잘 섞이지 못했다. 이는 그 뿐만이 아닌 다른 대부분의 고운 출신들도 마찬가지였다. 광고협에서 활동했던 강위원씨(전 한총련 의장)를 제외하고는 고운 출신으로 학생운동에서 드러나게 활동했던 인물은 많지 않았다.

이에 대해 고등학생운동을 벌이다 대학에 입학했던 한 당사자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당시 학생운동은 대학에 갓 입학한 우리를 지도해 낼 만한 지적 수준이 부족했다. 기껏해야 2학년 선배들이 접근해 오는데, 고등학생 때부터 활발히 학습해 온 우리만큼의 수준도 안됐다. 현실에 대해 인식도 부족하고 나보다도 학습을 못한 사람들이, 고등학생 때 많은 책을 읽으며 의식적 성장이 앞서간 고등학생운동 출신들을 지도하겠다고 나서는 데 쉽게 따라지겠는가? 그 때문에 학생운동이 조금 우습게 보인 경향도 있다."

황순주씨가 학생운동에 안착하지 못했지만 고등학생운동의 경험은 그 대신 자신의 방향을 일찍 잡게 만든 계기로 작용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문화운동에 전념하기로 방향을 정했습니다. 그래서 극단 활동도 했었지요. 그러다가 94년 부산을 떠나 임실로 갔고 거기서 필봉농학을 이수했습니다. 96년 전북대에 다시 입학해 한국음악을 전공하게 됐고, 이후 여기까지 온 것이지요."

지금 황순주씨가 하는 일은 전통문화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는 일이다. 그는 현재 경기문화재단의 전문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안착하지 못한 학생운동, 삶의 진로 설정한 고등학생운동

20여 년이 돼 가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황순주씨에게 고운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는 요즘 "다시 들판으로 나가야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것을 통해 "쭉정이들을 털어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고운을 꽤 건강하다고 표현한다. "고운의 경험을 정치세력화나 이익을 위해 활용하려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운 활동가들은 대학운동권들과는 다른 사회적 활동으로 나타날 것이다"라는 생각도 갖고 있다. 그만큼 고운은 '조금도 후회되지 않는, 지금의 그를 있게 한 바탕'으로 자리한다.

89년11월 22일 평민당사에서 시작된 단식농성은 23일 서울의 김설준과 26일에는 마산창원의 전경국 등 두명의 고등학생이 추가로 합류하며 4명으로 늘어났다.  좌측부터 김설준(남서울상고), 황순주(부고협), 전경국(마창고협), 이형준(광고협)
▲ 단식농성 중인 4명의 고등학생들 89년11월 22일 평민당사에서 시작된 단식농성은 23일 서울의 김설준과 26일에는 마산창원의 전경국 등 두명의 고등학생이 추가로 합류하며 4명으로 늘어났다. 좌측부터 김설준(남서울상고), 황순주(부고협), 전경국(마창고협), 이형준(광고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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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년 고등학생운동은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의 의미도 담고 있었다. '단식농성 지지 및 학생탄압 규탄대회'가 열렸고, 농성중이던 이들을 위해 많은 고등학생들이 찾아와 지지의사를 전하며 동조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농성자들과 토론중인 고등학생들.
▲ 격려방문 89년 고등학생운동은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의 의미도 담고 있었다. '단식농성 지지 및 학생탄압 규탄대회'가 열렸고, 농성중이던 이들을 위해 많은 고등학생들이 찾아와 지지의사를 전하며 동조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농성자들과 토론중인 고등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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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 89년 고운을 회상하며 그가 갖는 아쉬움은 이런 것이다.

"당시 고등학생운동의 흐름이 어떤 성과로 남을 것인가 고민했습니다. 돌출하는 욕구를 추스르지 못하고 조직화를 제대로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 부분입니다. 전교조는 합법화 됐으나 고운은 그냥 묻혀버렸잖아요. 엄밀히 따져보면 고운도 민주화운동의 일원인 것을……."

'고운을 하다보니 사회진출이 많이 늦고, 결혼도 늦게 하면서 피해의식을 갖는 친구들도 있다'는 황씨는 그 친구들에게 "돌아가더라도 더디 가자, 성급하게 생각하지 말자"고 이야기 했다면서 "지난 활동에 대해 반문도 하지만 그렇더라도 고운은 우리의 자산"이라고 덧붙였다.

"소시민일지라도 전문성을 갖고 생활인으로 건강하게 사는 자체가 행복"이라고 말하는 그의 모습에, 20년 전 고운에 대한 자부심이 선명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태그:#고등학생운동, #부고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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