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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태종 2년에 제작된 지도로서 현존하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세계지도이다. 국내에는 인촌 기념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일본 류꼬꾸대학 소장본이 있다. 제주도와 대마도가 한반도를 받쳐주고 있다.
▲ 세계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태종 2년에 제작된 지도로서 현존하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세계지도이다. 국내에는 인촌 기념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일본 류꼬꾸대학 소장본이 있다. 제주도와 대마도가 한반도를 받쳐주고 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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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은 대마도를 점령하고 있는 삼군도체찰사 이종무 장군에게 훈련관 최기를 보냈다.

“예로부터 군사를 일으켜 도적을 치는 것은 죄를 묻는 데 있고 많이 죽이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 경은 나의 생각을 몸 받아 적(賊)이 투항하여 나에게 오는데 힘쓰도록 하라. 또한 왜놈의 마음이 간사하니 방비가 허술하면 일을 그르칠까 염려 된다. 7월에는 폭풍이 많으니 경은 그 점을 잘 생각하여 오래도록 머물지 말라.”

태종은 군대를 출동한 것만으로도 소기의 목적을 이루었다고 생각했다. 일본에는 간담이 서늘하게 해주었고 명나라에는 군대를 출동할 수 있다는 힘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했다. 정벌군을 조직할 당시부터 대마도를 점령 유지할 생각은 없었다. 또한 대마도에서 무찌를 대상은 적(敵)이 아닌 도적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 대마도 도주(島主)는 도도웅와. 아버지 종정무(宗貞茂)의 뒤를 이어 어린 나이에 도주가 되었으나 부쩍 커버린 왜구(倭寇)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오히려 세력화된 왜구의 우두머리 소다가 도주를 위협할 정도였다. 소다는 오자끼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노략질로 부를 쌓아 도주를 넘보고 있었다.

소기의 목적을 이루었으니 철수하라

조선 수군이 출동하기 전, 오자끼가 왜구들의 소굴이라는 정보가 접수되었다. 당연 대마도 정벌군의 공격 목표였다. 조선군이 최초로 전투를 벌인 곳이 오자끼다. 오자끼는 소다의 영역이다. 접전하여 전과를 올린 129척의 배와 114명의 왜구들은 소다의 졸개들이 대부분이었다.

도주(島主)를 넘보던 소다는 조선군의 기습 공격을 받고 궤멸되어 산 속으로 숨어들었다. 대마도 정벌군이 분쇄하고자 했던 적은 일본 정예군이 아니라 소다 휘하의 왜구들이었다 해도 큰 무리는 아니다. 이제 소다의 왜구들이 분쇄되었으니 철수하겠다는 것이다.

태종의 명을 받은 야전 사령관 이종무 장군은 좌군과 우군에게 두지포에 포진하라 명령하고 자신은 주력함대(舟師)를 이끌고 거제도로 철수했다. 대마도에 하륙한 지 13일만이다. 정벌군 지휘부를 일단 빼낸 태종은 병조판서 조말생으로 하여금 대마도 도주 도도웅와(都都熊瓦)에게 항복 권고문을 보내도록 했다. 소다는 궤멸되었으나 명분 쌓기다.

“선지(宣旨)하노라. 대마도는 경상도의 계림에 속했으니 본디 우리나라 땅이란 것이 문적에 실려 있어 분명히 상고할 수가 있다. 다만 그 땅이 심히 작고 바다 가운데 있어 우리 백성들이 살지 않는지라 너희들이 왜국에서 쫓겨나 모여 살며 굴혈(掘穴)을 삼은 것이다.

도도웅와의 아비 종정무(宗貞茂)가 정성을 다한 것을 어여삐 생각하여 이(利)를 꾀하는 상선(商船)의 교통도 허락하였으며 경상도의 미곡을 대마도로 운수한 것이 해마다 수만 석이 넘었다. 보내준 식량으로 굶주림을 면하고 도적질하는 것을 부끄럽게 깨달아 천지 사이에 삶을 같이할까 생각하였으나 너희들이 배반했다.

우리의 위풍(威風)에 항복한 자는 죽이지 아니하고 여러 고을에 나누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어 생활 하게 할 것이다. 만일 혼슈에 돌아가지도 않고 우리에게 항복도 아니 하고 섬에 머물러 있으면 쳐들어가 칠 것이다.” - <세종실록>

너희들의 항복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

귀화한 왜인 등현(藤賢)이 항복 권고문을 가지고 대마도로 떠났다. 대마도는 옛부터 우리 땅이었으니 본국으로 돌아가든지 항복하라는 것이다. 위기를 느낀 대마도 도주 도도웅와가 도이단도로(都伊端都老)에게 신서(信書)를 보내어 항복하기를 빌고 인신(印信)을 내려 줄 것을 청원했다.

수강궁에서 긴급 전시 어전회의가 열렸다.

“대마도는 지금 비록 궁박한 정도가 심해서 항복하기를 빌기는 하나 속마음은 실상 거짓일 것이오. 만약에 온 섬이 통틀어서 항복해 온다면 괜찮겠으나 그렇지 않는다면 어찌 믿을 수 있겠소.”

“비록 온 섬이 통틀어서 항복해 온다 하더라도 그것을 처치하는 것 역시 어렵습니다.”

우의정 이원이 난색을 표명했다. 대마도민 전체가 투항해온다면 그들을 먹여 살릴 일이 걱정이라는 것이다.

“수만에 지나지 않는데 그 정도를 처치하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소.”

태종은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생각이었다. 전체가 항복해오지 않으면 쓸어버리겠다는 위협이다. 태종은 대마도 전체의 투항을 설유(說諭) 하도록 했다.

“너희 섬사람들은 시초에는 도적질하는 것을 일삼아 우리 땅을 침범하여 노략질을 하다가 그 후 종정무(宗貞茂)가 사람을 보내 항복하겠다고 빌기에 우리는 차마 그를 끊어버릴 수 없어 그가 하고자 하는 대로 따랐다. 허나 또다시 도적질을 하여 사단을 일으켰기에 병선을 보내 그 처자들을 잡아 오게 명했더니 너희들은 명령에 항거하여 감히 응전해 왔다.

병선을 5, 6백 척 내어 너희들을 다시 공격하면 스스로 굶주림과 곤란을 초래하여 그 자리에서 죽게 됨을 면치 못할 것이다. 지금 네가 와서 수호하기를 빈다마는 앞서도 수호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으나 그같이 흔단(釁端)을 일으키니 어찌 믿을 수 있겠느냐? 반드시 도주가 친히 와서 투항한다면 그 때에는 너희들이 항복하는 것을 허락해 줄 것이다. 60일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영 투항해 오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겠다.”

최후통첩이다. 선지를 받들고 대마도로 떠나는 도이단도로(都伊端都老)가 곤혹스러운 입장을 표명했다.

“틀림없이 선지에 보인 뜻을 가지고 돌아가서 도도웅와에게 말하겠습니다. 그러하오나 도내(對馬島內)의 사람들 모두가 도적이 아니온데 지금 내리신 선지는 다 도적질을 했다고 하였으니 마음 속이 정말 아프고 답답합니다.”

항복을 받아들일 테니 착하게 살아라

당시 대마도 백성들은 두 가지 부류였다. 척박한 땅을 일구어 농사를 짓고 바다에 나가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과 도적이 되어 해적과 노략질을 일삼는 사람들이었다. 졸개들을 이끌고 노략질을 일삼던 소다는 산 속으로 도주하고 도적질을 하지 않은 도도웅와는 억울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날벼락을 맞은 도도웅와는 조선에 감사해야 할 입장이었다. 자신의 지위를 위협했던 소다를 조선군이 와해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대마도를 다녀온 도이단도로(都伊端都老)가 수강궁에 무릎을 꿇고 도도웅와(都都熊瓦)의 항복을 전했다. 조선 국왕이 자신을 대마도 도주로 상대해준 것만도 고마울 따름이었다. 태종은 항복을 가납하고 교유했다.

“사자(使者)가 서신을 전해 너의 항복의 뜻을 알았노라. 본도인(本島人)을 돌려보내는 것과 인신(印信)을 내려달라는 것이 가상하다. 너희들이 작은 섬에 모여들어 굴혈을 만들고 마구 도적질을 하여 자주 죽음을 당하는 바 이는 하늘이 내려 준 재성(才性)이 달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작은 섬은 대개 다 돌산이므로 토성이 교박(磽薄)해서 농사에 적합하지 않고 바다 가운데 박혀 있어 물고기와 미역의 교역에 힘쓰나 사세가 그것들을 대기에 어렵고 바다 나물과 풀뿌리를 먹고 사니 굶주림을 면하지 못해 양심을 잃어 이 지경에 이르렀을 뿐이니 나는 이것을 심히 불쌍하게 여기노라.

이제 너희들의 소원에 따라 비옥한 땅에 배치해 주고 하나하나에 농사짓는 차비를 차려 주어 농경의 이득을 얻게 하여 굶주림을 면하게 하여 주리라. 마음을 돌려 순종하고 농상(農桑)을 영위하기를 원한다면 먼저 섬의 행정을 관리할 자를 나에게 보내와 내 지휘를 받도록 할지니라.”

도이단도로(都伊端都老)를 대마도로 돌려보낸 태종은 정벌군의 전면 철수를 명했다. 두지포에 진을 치고 있던 좌군과 우군이 철군했다. 이후 대마도는 조선의 정치질서 속에 편입되어 조선 국왕이 관직을 내려주는 통치권속에 예속되었다.

대마도가 한국 땅이라면 한국 땅은 누구의 땅일까?

우리는 여기에서 조선군이 대마도에 주둔하지 않고 왜 철군했는지 아쉽다. 허나, 그것은 현재의 생각일 뿐 당시에는 조선군이 대마도에 꼭 주둔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대마도는 조선 땅이었기 때문이다.

대마도 정벌군 사령관 이종무 장군이 두모포에서 출정할 때 2장의 지도를 휴대하고 떠났다. ‘조선팔도도’와 박돈지가 일본에서 들여 온 일본 지도였다. 이회가 그린 ‘조선팔도도(朝鮮八道圖)’에는 대마도가 조선 땅으로 그려져 있고 박돈지가 들여온 일본 지도에는 대마도가 그려져 있지 않았다. 이 두 개의 지도에 중국과 아랍지역을 합쳐서 만든 것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다. 현존 동양 최고(最古)의 세계지도로 알려진 혼일강리역대국지도는 태종 2년에 제작되었다.

훗날 도요또미 히데요시가 왜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략할 때 휴대한 일본지도에도 대마도는 없었다. 당시 조선과 왜국의 영토인식은 대마도는 조선 땅이라는 것이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당연한 것이었다.

우리는 현 시점에서 간과해서는 아니 될 일이 있다. 역사는 역사 그 자체로 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역사를 현재화 하면 혼란이 온다.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할 때 ‘대마도는 우리 땅이다’는 주장도 있었다. 이유 있는 항변임에는 틀림없다. 지자체 마산시에서는 대마도의 날까지 지정했다. 하지만 너무 감정적이었다.

대마도는 조선 수군이 분명 점령했다. 대마도 도주가 인신(印信)을 청했고 조선 국왕은 인신을 내려 주었다. 조선 국왕이 인신을 내렸다고 대마도가 우리 땅이라 하면 우리가 대대로 중국의 고명(誥命)을 받은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종무가 정벌했다고 대마도가 우리 땅이라 하면 중국에 수없이 침략당한 우리나라는 중국에 수없이 편입되었단 말인가? 대마도 타령을 하다가 한국사 전체를 통째로 중국사에 편입시키는 우를 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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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