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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범 선언문 87년 12월 19일 '서울지역 고등학생 연합' 출범을 알리는 선언문
▲ 출범 선언문 87년 12월 19일 '서울지역 고등학생 연합' 출범을 알리는 선언문
ⓒ 성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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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2월 19일 오후의 명동성당.

노태우 당선에 항의하는 부정선거 규탄 농성이 명동성당에서 벌어지고 있던 때, 문화관 앞에서 300여명의 앳된 고등학생들이 모여 선언문을 낭독하고 있었다.

“진리를 탐구하고 정의를 추구할 대한민국의 아들․딸들은 독재의 왜곡된 교육과 의식 속에 길들여 있습니다.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의 역사를 역행하지 않으려는 젊은이의 혈기와 다짐은 오천년 유구한 역사가 군화발아래 짓밟히는 것을 원치 않으며…(중략)…진정코 죽으면 살리니 학우여. 끓는 가슴으로 일어나 이땅에 한줌 민주의 씨앗을 뿌리고 갑시다. 쓰러지지 않을 민주의 횃불을 환히 밝히고 갑시다. 학우여, 죽으면 살리라!"

선언문 낭독이 마무리 된 후 사회자의 선창에 따라 허공을 가르는 팔뚝질과 함께 힘찬 구호가 성당 주위로 울려 퍼졌다.

노태우를 당선시킨 기성세대 각성하라!!!
군부독재 타도하여 민주교육 쟁취하자!!!
백만학도 단결했다 군부독재 각오하라!!!


결연한 눈빛으로 명동성당에 모여 있던 학생들은 '서울지역고등학생연합(서고련)' 출범식에 참석한 서울지역 20여개 고등학교의 학생들. 4·19 이후 최초의 고등학생 조직으로 평가받는 ‘서울지역 고등학생 연합(이하 서고련)’이 출범하는 순간이었다.

4·19 이후 최초로 만들어진 고등학생 조직

중 고등학생들의 '학생자치'와 '학생인권보장'을 외치는 청소년 운동(당시 고등학생 운동)이 조직적인 모습으로 우리 사회에서 처음 드러난 것은 1987년 12월, 명동성당의 고등학생들이었다. 개인이나 소모임 위주의 활동이 '서울지역 고등학생 연합'이라는 하나의 틀로 등장한 것이다.

고등학생 운동을 연구한 성공회대 양돌규씨는 지난해 발표한 논문 <민주주의 이행기 고등학생 운동의 전개과정과 성격에 연구>에서 60~70년대 반공규율체제에 도전한 87년 6월항쟁 이후의 고등학생 운동이 현 청소년 운동의 바탕이 되었다고 규정한다.

그리고 서고련의 등장을 '교사운동에 대한 엄호 지지·투쟁'과 '학내 민주화 투쟁'의  태동기를 지나 대중성과 조직성을 갖춘 고등학생 운동의 발전기로 평가한다. 일반적인 교육운동이나 학내 민주화 투쟁과는 다른 정치적 요구를 갖춘 고등학생 운동조직의 출현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는 것이다.

당시 서고련은 서울지역 10여개 학교 이상에 재학 중인 학생들이었다. 용산고·신일고·동북고·성동고·동성고·계성여고·진선여고·서울북공고·면목고·서초고 등이 중심을 이뤘다. 그들의 등장은 4·19 이후 고등학생들이 사회운동에 본격적인 진출을 선언한 사건이었다.

87년 고등학생 운동이 본격적인 움직임을 보인 중요한 계기는 6월 항쟁이었다. 민주화의 열기는 당시 고등학생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다수의 고등학생들이 개별적 또는 친구들과 함께 6월 항쟁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정치의식이 높아졌다.

또한 의식 있는 교사들의 교육민주화 선언과 교육현장 안팎의 분위기도 학생들에게 영향이 갈 수밖에 없었다. 독서토론 등의 소모임 활동과정에서 자발적으로 의식이 트이는 학생들이 생겨난 것도 87년 고등학생 운동이 시작되게 된 바탕이었다.

87년 6월을 전후한 사회 분위기는 군사독재정권의 4·13호헌 선언으로 인해 어수선한 상태였다. 학교 현장 또한 민중교육지 사건 등으로 해직교사가 생겨나고, 교사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지면서 안팎으로 엇비슷했다.

6월 항쟁과 교육민주화 운동이 학생들에게 영향

6월 항쟁 당시 명동성당 6월항쟁은 고등학생들의 의식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다. 그들은 6월 항쟁의 거리시위에 적극 동참하며 민주주의에 대한 의식을 깨우쳐 간다.
▲ 6월 항쟁 당시 명동성당 6월항쟁은 고등학생들의 의식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다. 그들은 6월 항쟁의 거리시위에 적극 동참하며 민주주의에 대한 의식을 깨우쳐 간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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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5월 10일의 명동성당. 5·10 교육 민주화 선언 1주년을 맞아 기념식이 열린 명동성당 주변에는 장학사들과 경찰들의 눈초리가 매서웠다. 서초고 2학년 전운혁과 문일고 2학년 배영진이 성동고 3학년 남진우 등 다른 학교 학생들을 처음 만난 것은 이날 행사장에서였다.

전운혁은 4월에 학내에서 유인물을 뿌리다 징계를 당한 경험이 있었다. 남진우도 '민중교육'지 사건으로 해직된 선생님들과 관련된 유인물을 뿌리다 학교에서 제적된 상태였다. 고등학생들 간의 만남은 동질감을 갖게 만들며 연대감을 형성시켰고, 이날 만남은 이후 계속된 모임의 단초를 제공한다.

6월 항쟁은 자연스런 두 번째 만남이었다. 6월 항쟁에 참여하며 거리에서 마주쳤던 이들은 6월 28일 종로에서 다시 만났고, 이후부터 다른 학교 학생들과의 본격적인 접촉이 이뤄진다.

87년 서고련의 주축을 이룬 핵심 멤버들은 대부분 고등학교 2학년들로 서초고 전운혁, 동성고 이철구, 문일고 배영진, 신일고 김지훈·이창진, 성동고 정원철, 면목고 신덕섭, 동북고 전성원, 용산고 홍기표 등이었다.

7월초 신일고 문예반 반장이었던 이창진이 주도한 한강 고수부지에서 서울시내 고등학교 백일장을 통해 동북고 문예반 전성원이 논의에 합류하고, 6월 항쟁을 눈앞에서 경험한 계성여고 곽정과 천현주, 송곡여고 김하영 등도 7월부터 이 만남에 참여하게 된다.

이들은 10월에 문집 <맘판>을 만들어내기도 했고, 대학생들이 벌였던 의식화 편지 보내기를 응용해 중학교 졸업앨범을 통해 친구들에게 교육문제에 대한 편지를 보내며 조금씩 활동의 폭을 넓혀간다.

이들 외에 흥사단 고등학생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한 '서울지역 고등학생 협의회(준)'도 서고련을 구성한 큰 축이었다. 용산고 김치태 홍기표, 진선여고 김미경, 동성고 이철구 김홍래 청량고 송경수 등 서울지역 15개 고등학교 학생들로 구성된 이들은 탄탄한 학내 기반을 확보하고 있던 그룹이었다.

9월 흥사단이 주최한 문화 행사 후 참석했던 고등학생들이 중심이 돼 만들어진 '서울지역 고등학생 협의회(서고협)'는 학교 내 기반을 형성한 학생들이 주를 이루며 꽤 탄탄한 조직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당시 서울지역 고등학생 운동 그룹들 중에는 가장 규모가 컸던 이들은 활동영역을 넓혀가며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10~11월 고등학생 활동가들은 서로 간에 활발히 접촉했고, 신촌 주변의 문화단체 등에서의 만남을 통해 다른 학교 학생들과의 연락망을 구축해 나간다.

부정선거 우려 속 노태우 당선시 농성하자고 결의

명동농성이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은 12월 12일 동대에서의 만남을 통해서였다. 서초고 전운혁, 성동고 정원철, 신일고 이창진, 문일고 배영진, 동북고 이석연 노택균 등이 참석한 이 모임에서 대선 부정선거의 가능성과 이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고 노태우의 당선 시 민중운동권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그럴 경우 고등학생 입장에서도 이를 좌시할 수 없으니 집회를 열고 농성을 하자는 제안이 나온 것.

논의를 확장시켜 볼 필요성을 느낀 이들은, 서고협을 비롯해 다른 학교나 활동 단체 등에 연락을 취했고, 다음날인 13일 좀더 확장된 모습으로 다시 만난다. 백기완 선생의 대학로 유세에서 참석한 후 동국대로 이동해 본격적인 논의를 가진 것이다. 그리고 14일 흥사단에서 다시 만난 이들은 성대로 자리를 옮겨 세부논의를 이어가며 명동성당에서의 농성을 결의하게 된다.

 서고련의 명동성당 농성소식을 보도한 당시의 신문 기사내용(중앙일보 87년 12월 21일자)
 서고련의 명동성당 농성소식을 보도한 당시의 신문 기사내용(중앙일보 87년 12월 21일자)
ⓒ 성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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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동국대에서의 만남을 통해 농성의 주체를 '서울지역고등학생연합(준)'으로 하기로 하고 19일 출범을 결정한다. 이 때 농성에 전부가 들어갈 것이냐 일부가 들어갈 것이냐를 놓고 논의한 뒤 2선 지도부를 구축해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로 한다.

이 자리에서 지도부 문제에 대한 논의를 갖고 서초고 전운혁, 동성고 이철구, 동북고 이석연의 3인 지도체제를 결정하고, 만일의 경우 농성자 전원구속이 될 수도 있다는 판단에 따라 동북고 전성원에게 2선 지도부의 책임이 맡겨진다. 출범 선언문도 동성고 이철구가 잡은 초안에 따라 이때 만들어졌다.

당시 서고련 의장은 서초고 전운혁이 맡았던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이는 경찰이 조직도를 그리면서 전운혁을 의장으로 설정해 놓은 것이어서 그랬을 뿐, 실질적으로는 서고련을 구성하고 있는 세 개의 그룹이 공동으로 책임을 맡기로 했었다”고 당시 지도부로 활동했던 이철구씨는 밝혔다.

이들이 공식적으로 명동에 들어간 것은 방학을 하루 앞둔 18일 오후. 기말고사를 마치고 명동으로 모여든 이들은 펼침막과 유인물을 만들며, 농성을 준비한다. 명동성당에서의 농성 준비는 당시 서초고 전운혁이 성당을 오가며 준비작업을 어느 정도 해둔 상태였다. 이날은 구로구청에서 시위가 진압되며, 구로에 있던 사람들이 명동성당으로 모여든 날이었다.

서고련은 19일 출범식 후 농성기간 동안 3종류의 유인물을 냈고, 매일같이 오가는 고교생들과 함께 명동농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지만 언론은 이들을 별로 주목하지 않았다. 다만 중부서의 경찰들만이 이들을 주목할 뿐이었다.

중부서에 연행됐던 배영진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21일쯤 옷 갈아입으러 집에 들어가니 중부서 형사 3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바로 중부서로 연행돼 12시쯤까지 조사받고 훈방됐다. 경찰은 이미 농성자의 신원 및 학교 등을 다 파악하고 있는 상태였다. 나 외에 전운혁도 농성장을 찾아온 부모님을 따라 나갔다가 바로 연행돼 조사를 받은 상태였다."

대학생도 아닌 고등학생들의 농성에 경찰은 처리에 고심을 하다가 부모와 학교에 연락, 이들의 자진 해산을 유도하려 했다는 것이 당시 농성자들의 증언이다. 경찰의 와해 작업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다. 핵심인물들이 부모님이나 경찰에 연행되며 활동에 제약을 받은 것이다.

'학생들과 동떨어진 투쟁' 내부비판 제기돼

이들의 명동성당 농성은 24일 촛불시위를 끝으로 해산한다. 명동성당쪽의 요청으로 '부정선거 규탄시위 농성단' 또한 자진 해산을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100여명의 학생들과 명동입구까지 행진한 이들은 마지막 결의를 다진 후 성탄 전야 거리를 메운 사람들 틈으로 사라진다. 핵심 참가자들은 경찰의 눈을 피해 동대 후문 쪽에서 다시 만나 농성에 대한 평가 작업을 벌이지만, 제대로 된 결론이 난 것은 88년 1월말.

명동 농성 후 서고련은 평가 작업을 통해 서고련이란 이름으로 계속 활동하기는 어렵다는 평가를 내린다. "조직을 확장하자"와 "아직은 아니다"는 의견 속에 전고련으로 확장하자는 의견도 있었고, 부산 광주 쪽으로 내려가 학생들을 규합하자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서고련 투쟁이 학생들과 너무 동떨어진 투쟁"이었으며 "학생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내부 비판이 나오면서 조직적 운동에 대한 논의는 더 이상 진전되지는 못한다. 노선에 대한 이견이 '서고련'의 공식적인 해체를 규정하지는 않았지만, 이후 활동은 친목관계를 중심으로 이어지며 '서고련'은 명칭으로만 존재한다.

그러나, 명동성당 농성 후 이들은 고등학생 운동단체 내에서 '서고련' 그룹으로 통하며, 88년도 활발하게 진행된 고등학생 운동을 주도한다. '흥사단'과 'KSCM(한국고등학생기독운동총연맹)' 등 공개 단체가 있었지만 명동 농성을 통해 연대감으로 결속된 이들은 고등학생 운동의 중심으로 부상해 있었던 것이다.

자살학우추모제 및 교육정상화 결의대회 88년 서고련을 중심으로 흥사단과 KSCM 등 고등학생 조직이 함께 준비해 홍익대에서 개최한 '자살학우 추모제 및 교육 정상화를 위한 결의대회'는 서울지역 중고등학생 1000여명이 모인 80년대 최대 규모의 청소년 집회였다.
▲ 자살학우추모제 및 교육정상화 결의대회 88년 서고련을 중심으로 흥사단과 KSCM 등 고등학생 조직이 함께 준비해 홍익대에서 개최한 '자살학우 추모제 및 교육 정상화를 위한 결의대회'는 서울지역 중고등학생 1000여명이 모인 80년대 최대 규모의 청소년 집회였다.
ⓒ 성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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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년은 명동농성 이후 조직력이 강해진 이들이 제대로 된 고등학생 운동을 전개하던 시기였다.

88년 4월 17일 연대 노천극장에서 열린 고등학생 4·19 대동제도 이들이 준비한 작품이었고, 7월 17일 홍대에서 있은 자살학우 추모제 및 교육 정상화를 위한 고등학생 결의대회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7월 행사는 서고련 그룹이 전적으로 준비작업을 주도하다가 공개단체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며 적극적인 연대를 통해 치러낸 행사였다. 이는 당시 고등학생 운동 진영에서 서고련 그룹의 위상을 드러낸 부분이기도 했다.

이후 여름방학 기간 중 서울지역 사범대학 학생회 협의회가 주관한 청소년 나눔터나 겨울방학 때 진행됐던 자주학교에서도 이들은 당시 사범대 학생들과 함께 행사를 이끌어나가게 된다.

서고련, 정치적 고등학생 운동의 효시

87~88년 활발하게 진행된 '서고련' 활동은, 89년 전교조 결성으로 교사들이 대량 해직됐을 때 벌어진 시위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이들이 각 학교 내 구축해 놓았던 학내민주화조직의 역량이 커지던 상태였고, 이를 바탕으로 한 고교생들의 시위가 이어졌던 것이다.

89년 당시 전교조 교사들의 해직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던 신일고 석관고 청량고 자양고 계성여고 동성고 성동고 등은 서고련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학교들이었던 것이다.

이후 서고련 그룹은 '바른 학생회 쟁취를 위한 고등학생 연합' '동북부지역 모임' '하나모임' 등으로 분화하지만 이들의 뒤에 따라붙는 꼬리표는 늘 '서고련'이었고, 이후 고등학생 운동도 이들의 영향을 받은 후배들이 주도했다는 점에서 이들은 고등학생 운동의 개척자들로 평가받는다.

20년이 지난 지금, 이들에게 지금의 청소년 운동을 조직적으로 만들어낸 첫 세대라는 의미도 부여되지만 고등학생들로서 지나치게 정치적이었다는 비판도 뒤따른다. 하지만 4·19이후 개별적 단초적으로 진행되던 고등학생들의 운동을 구체적인 모습으로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이들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 작업이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고등학생 운동을 연구한 성공회대 사회학과 양돌규씨는 지난해 발표한 논문에서 '서고련'의 의미를 이렇게 정리했다.

"군부정권이 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집권하는 상황에 대해 무기력하게 손을 놓고 있었던 민주화 운동의 대응을 감안할 때 서고련의 명동성당 농성은 필요한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명동농성을 통해 고등학생들이 정치적으로 진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은 큰 의미를 지닌 것이다. 따라서 서고련의 명동 농성은 매우 상징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서고련에 대한 평가는 긍정과 부정이 극단적으로 엇갈리지만 고등학생들이 정치적 이슈를 내걸고 투쟁하는 것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을 실제로 보여준 사례로 볼 수 있다. 결국 고등학생 운동의 발전기 때 등장한 서고련은 정치적 고등학생 운동의 효시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서고련을 기억하는 당시 고등학생들의 20주년 기념 모임이 오는 12월 19일 명동성당에서 있을 예정이다. 연락처 : 홍기표 010-2966-6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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