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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사정전에 있는 조선 군주의 보좌. 일본 정부에서는 이 보좌의 주인을 ‘황제 폐하’라고 불렀다.
 경복궁 사정전에 있는 조선 군주의 보좌. 일본 정부에서는 이 보좌의 주인을 ‘황제 폐하’라고 불렀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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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의 역사 드라마에서는 ‘황제’ 혹은 ‘폐하’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중국 군주가 아닌 한국 군주를 가리켜 그런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이에 대해 일부 사람들은 “지나치다” 혹은 “역사 왜곡이다” 등등의 부정적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공식 사료를 살펴보면, 과거에 이웃나라에서 한국 군주를 황제나 폐하라고 부른 사례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뜻밖에도’ 그런 사례가 자주 발견되는 시기는 바로 조선 전기다.

중국에 대한 사대가 가장 극심했던 시기로 알려진 조선 전기에 조선 군주들이 국제적으로 황제나 폐하라고 불린 사례가 많다는 것은 우리의 상식을 깨는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몇 가지의 사례를 통해 그것이 사실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 군주들, 국제적으로 '황제' '폐하'로 불렸다

아래의 사례들을 이해하는 데에 필요한 사전 지식이 있다. 그것은 메이지 유신(1868년) 이전에는 소위 ‘천황’이 아닌 쇼군(막부의 수장)이 일본의 실력자였을 뿐만 아니라 대외적인 국가대표기관이었다는 점이다. 쉽게 말하면, 쇼군은 ‘최고사령관 겸 총리’로서 일본을 대외적으로 대표하는 기관이었다. 

그래서 한국이나 중국에서는 쇼군을 ‘일본국왕’이라고 불렀다. 다만, 16세기 후반에는 쇼군이 아닌 ‘관백’의 지위에 오른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국왕’이라고 부른 예외가 있다. 그러므로 과거 동아시아 국제관계에서 소위 ‘천황’은 ‘실재하지 않는 존재’나 마찬가지였다. 일본의 대외관계는 쇼군을 공식적 대표기관으로 하여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쇼군이 조선 군주를 폐하라고 부른 사례가 발견된다. 그리고 쇼군은 물론 일본의 지방 정권들 역시 조선 군주를 황제라고 부른 사례가 발견되고 있다. 그중 두 가지 사례만 제시하기로 한다.

첫째, <세조실록> 세조 9년(1464) 7월 14일자 기사에 따르면, 일본 막부의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조선에 보낸 서한에서 세조를 ‘폐하’라고 불렀다. 서한을 갖고 온 사람은 쇼군의 사신이었으며, 이 사신은 세조에게 전달할 조공물품도 갖고 왔다. 기사의 내용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폐하께서 일찍이 서한을 보내시는 편에 첨지중추원사 송처검과 대호군 이종실을 보빙 사자로 보내셨는데……”(陛下曾傳一書于來, 便承以僉知中樞院事宋處儉、大護(車)[軍〕李宗實爲報聘使者).

둘째, <성종실록> 성종 1년(1470) 9월 19일자 기사에 따르면, 일본 인백단삼주태수(因伯丹三州太守)인 원교풍(源敎豐)은 조선 예조를 거쳐 성종에게 제출한 서계에서 ‘황제’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성종 1년이면, 드라마 <왕과 나>의 시대적 배경과 겹치는 시기다. 참고로, 일본인 인명의 한자 발음은 사람마다 각각 다르기 때문에, 원교풍의 당시 발음을 확인할 수 없어서 한자 발음 그대로 적었음을 밝힌다.

그가 조공물품과 함께 제출한 서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이에 따르면, 조선 군주와 일본 쇼군이 모두 다 황(皇)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이리하여 아국황(我國皇) 아시카가 요시마사가 신(臣) 교풍에게 명령했습니다. ‘저 정사가람(불교 건축물, 인용자 주)은 조선국황(朝鮮國皇)의 지원이 없으면 낙성할 수 없다.……’”(于玆我國皇源義政忝命臣敎豐: “彼精藍, 非朝觧國皇支廈之力, 不可落成.)

조선군주 일본으로부터 존칭 들었다

위의 두 기사를 살펴보면, 대(對)중국 사대외교가 가장 극심했던 것으로 알려진 조선 전기에 조선의 군주들이 일본측으로부터 황제니 폐하니 하는 존칭을 듣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 여기서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조선을 황제국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이 시기에 일본이 조선을 세계의 중심이라고 인식했다는 말이 되는가?’라고 말이다.

물론 그렇지는 않다. 위의 <성종실록> 성종 1년 기사에 따르면, 일본은 조선이 중국의 번속국(조공국)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있었다. 일본은 조선이 중국에게 사대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서도 조선을 황제국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리고 일본측이 조선 군주에게 황제니 폐하니 하는 표현을 사용하고 조선 역시 명나라를 의식하지 않고 이런 사실을 공식 역사서인 실록에 수록할 수 있었다는 것은, 황제니 폐하니 하는 표현들이 중국이나 동아시아 패권국만의 전유물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만약 조선이 명나라를 두려워했다면, 일본이 조선을 황제국이라고 부른 사실을 실록에 남길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조선이 명나라를 의식하지 않았다는 것은, 조선도 황제국 소리를 들을 만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소리를 듣는 것이 그리 대단치 않은 일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본다면, 과거 동아시아에서는 어느 정도의 국력을 보유한 나라라면 능히 황제국 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며, 그것이 결코 중국이나 최강국만의 독점대상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성종실록> 10년(1479) 기사 등에서 성종이 일본을 황제국이라고 부른 점을 본다면, 일정 수준의 국력을 보유한 나라에게는 별 거리낌 없이 황제국이라는 칭호를 붙여주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다. “일본이 조선 군주를 황제라고 불렀다고 해도, 조선 군주의 공식 직함이 황제는 아니지 않았느냐?”라고 말이다. 그러나 군주의 국내적 호칭과 국외적 호칭이 전혀 별개의 영역에 속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문제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군주의 국내적 호칭은 국가 내부적으로 정해지는 것이지만, 그 호칭이 국제적으로도 통용되는가 하는 문제는 전혀 별개의 사인이다. 내부적으로 자국 군주를 황제라고 부른다 해도, 그 나라의 국력이 약한 경우에는 국제적으로 황제국 대우를 받을 수 없는 것이다. 한편, 내부적으로 황제라는 직함을 공식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해도, 그만한 국력이 뒷받침되면 국제적으로 황제국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조선이 자체적으로 황제라는 직함을 두고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조선 군주를 황제라고 부를 만큼 조선의 역량이 어느 정도 갖추어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일본이 세계의 표준화폐인 은의 주요 생산국 다시 말해 ‘돈을 찍어내는 나라’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일본이 조선을 황제국이라고 부른 사실이 갖는 함축적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이 아니면 황제국이 될 수 없다는 잘못된 인식 고쳐야

위와 같은 점들을 본다면, 최근 한국의 역사 드라마에서 한국 군주를 황제 혹은 폐하라고 부르는 것이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최근의 분위기를 계기로, ‘중국이 아니면 황제국이 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고쳐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덧붙일 것은, 조선왕조실록에 황제라는 표현이 분명히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의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에는 이것이 ‘왕’으로 번역되어 있다는 점이다.

물론 조선 군주의 대내적 호칭이 황제가 아니었다는 점에 근거하여 황제를 일부러 왕으로 바꾸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국내적 차원의 황제와 국제적 차원의 황제는 서로 다른 것이었다. 자기 스스로 황제라 칭하지 않더라도, 외국에서 황제라고 불러주면 그 나라는 국제적으로 황제국 대우를 받았던 것이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국내질서와 국제질서의 질적 차이를 엄밀히 인식하여 잘못된 번역을 수정해야 할 것이다. 실록에 황제라는 표현이 엄연히 등장하는데도, 그것을 일부러 왕으로 바꿀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자신의 역사를 스스로 폄하하는 태도는 중국이 남의 나라 역사를 왜곡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위험한 행동일 것이다.


태그:#식민사관, #황제국, #조선왕조실록, #역사왜곡,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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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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