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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차를 몰아 새벽을 달려본다. 가을의 물결이 서서히 강원도에서 충청도로, 충청도에서 전라도, 경상도로 남하하듯이 나도 그 길을 따라 그 어디쯤 머물고 있는 가을을 찾아 떠난다.

 

한낮동안 여행객으로 홍역을 치렀을 고속도로는 한산하다 못해 적막감이 가득하다. 대전을 지나 대전-통영 간 고속도로에 오르면 오히려 적막감보다도 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는 듯하다. 간간이 스쳐지나가는 차량들이 오히려 반갑다.
 
새벽길을 달리다 보면 가장 무서운게 졸음이다. 언제 어디서 불시에 나타날지 모르는 위협적인 존재다.

 

새벽 3시가 넘어가자 어김없이 졸음이 밀려온다. 휴게소 간판이 가장 반가울 때기도 하다. 두 시간 정도 눈을 붙이고 다시 달리기 시작해 새벽 6시 남짓해 경남 함양의 상림입구에 도달했다.

 

이번 여행지는 경남 함양이다. 가을의 끝자락에 꼭 한 번 와보고 싶었던 함양 상림을 기어이 찾아왔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숲

 

 

함양상림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숲이다. 그 오래됨은 무려 1천년을 훌쩍 넘어선다. 통일신라 진성여왕 때 이곳 태수로 부임했던 고운 최치원 선생이 여름마다 위천이 범람하여 농경지와 가옥들이 피해를 입자 이를 줄이기 위해 조성한 것이 지금까지 남은 것이다.

 

조성 당시에는 둑을 쌓고 위천의 물줄기를 돌린 뒤 둑 위로 나무를 심었는데, 이 나무들이 퍼지고 퍼져서 숲이 되었다고 한다. 대관림으로 불리던 숲은 큰 홍수를 겪으면서 상림과 하림으로 나뉘어졌는데, 하림은 사라지고 상림만 남아 있다.
 
겉으로만 보이는 숲의 전경이 생각만큼 예사롭지 않다. 이제 막 아침을 맞으려는지 나무들은 마치 큰 기지개를 켜고 있는 듯하다. 동이 터오는 곳으로부터 빛을 한껏 받은 나무들은 갈색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붉은색에 가깝다. 숲 전체가 불길에 휩싸인 듯 붉어보이니 꽤나 정열적인 느낌이 든다. 

 

아침을 맞이하는 것은 나무와 그들이 만들어내는 숲만은 아닌 것 같다. 한 명 두 명씩 운동복 차림으로 나타나는 이곳 주민들도 그들의 아침에 동참을 한다. 문득 건강함이 절로 느껴진다. 숲이 만들어내는 맑은 기운을 마시며 달리기를 하는 광경을 보니 왠지 부럽다. 예전 성주에서 본 성밖숲을 가진 성주사람들에 대한 부러움에 견줄만 하다.
 
이어 나타나는 사람들은 바로 함양상림을 사진으로 담으려는 사람들이다. 여기저기 삼각대를 세워놓고 뷰파인더로 보이는 상림의 세상을 담느라 여념이 없다. 때론 그들의 앵글에 속해 있을 것 같은 느낌에 부담스러움이 느껴진다.

 

상림의 알록달록한 가을의 색감을 느끼며 걸어가고 있을 때 문득 큰 소리가 들렸다. 소리나는 곳으로 시선을 돌려보니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다. 카메라 앵글에 내가 들어왔으니 얼른 비키라는 듯 급한 손짓을 한다. 무척 불쾌했다. 마치 멋진 사진을 남기기 위해 당연히 제거해야 하는 피사체에 불과했던 것이다. 인적 드문 새벽인데 잠시 지날 수 있도록 그 작은 배려와 인내심도 없단 말인가!
 

 

불쾌함도 잠시뿐 다시 상림의 아름다움에 빠졌다. 걸어가는 넓은 길은 갈색빛 융단을 깔아놓은 듯하다. 갈색빛 융단에는 푹신푹신한 부드러움도 더했다. 셀 수 없이 수많은 나무들이 잎을 떨어뜨렸으니 걸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원래의 흙길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수북이 쌓인 낙엽 위를 걷는 걸음걸이조차도 부드러워진다.

 

 

함양상림 내에 연리목이 있다. 뿌리가 서로 다른 나무의 몸통이 하나로 합쳐진 것을 연리목이라고 하는데, 특이하게 느티나무와 개서어나무가 뿌리 윗부분부터 마치 포옹을 하듯이 서로 붙은 채 함께 자라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 나무 앞에서 부부나 연인이 손을 잡고 기도를 올리면 부부의 애정이 두터워지고, 남녀의 사랑이 깊어진다고 한다.  
 

 

함양상림 내에는 둘러볼 만한 유적도 꽤 있다. 정면 3칸의 아담한 누각은 함화루다. 원래 함양읍성의 남문이었는데 지리산을 바라본다 하여 망악루라 불리던 것을 이곳 상림으로 옮기면서 함화루라 고쳤다.

 

다소 뭉툭하게 생긴 거북이 한 마리가 지고 있는 비석은 문창후 최선생신도비, 즉 최치원 선생의 업적을 기려 세운 신도비다. 백성들의 고난을 덜어주기 위해 숲을 만든 지 천년이 훨씬 넘었지만, 그 공적을 기려 세운 지는 백년도 채 안 됐다.  이은리 석불은 부근에 망가사라는 절터가 있었는데 홍수로 폐찰되면서 떠내려 온 것으로 여겨지는데 1950년 이은리 냇가에서 출토되어 이곳으로 옮겨졌다. 두 손은 떨어져 나갔고, 배 아랫부분은 훼손이 심하다.
 

 

상림은 한없이 걷고 싶은 길이다. 걷다가도 만끽하고 싶으면, 벤치에 앉아 마냥 쉬고 싶기도 하다. 나무 하나하나가 모여 이룬 숲이기에 하나하나의 생명체가 아닌 숲이라는 대자연으로 다가와 있다.

 

2만여 그루가 빼곡히 들어찬 나무들의 집합체지만, 한치의 흐트러짐이나 어지러움이 없다. 그들은 이미 나무가 아닌 숲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기에 봄이 되면 연두빛 잎을 틔우고, 여름이면 푸릇푸릇 신록으로 뒤덮이며, 가을이면 너나 할 것 없이 갈색 융단을 만든다. 그러고 보니 상림 속을 휘적휘적 걷고 있는 나는 대자연 속의 한낱 미물일 뿐인 것 같다.

 

대쪽같은 심성 때문에 두 번 죽은 김종직

 

함양군청 맞은 편에는 역시 고운 최치원 선생과 인연이 있는 누각을 하나 만날 수 있다. 학사루는 고운 최치원 선생이 이곳 태수를 지낼 때 학사루에 올라 자주 시를 짓고 읊었다 전해지는 곳이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조선 숙종 때 중건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정면 5칸으로 꽤 큰 축에 끼는 학사루는 무오사화와 관련이 깊은 곳이다.
 
점필재 김종직은 영남지방의 사림파로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등의 제자들과 함께 훈구파와 대립하게 되는데, 함양군수로 부임한 김종직이 학사루에 걸린 당대의 권력가인 유자광의 시가 걸린 현판을 보고 능멸한 뒤 떼어내어 불태워버렸다.

 

이에 유자광은 김종직에게 원한을 갖게 되었고, 성종이 승하한 후 성종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실록에 실린 김종직의 조의제문(단종 폐위사건을 항우에게 죽임을 당한 초나라 의제에 비유하여 세조를 비방하고 단종을 위로했다하여 문제삼은 글)을 문제삼아 사림파를 제거하게 된다.

 

이를 4대 사화 가운데 하나인 무오사화라 하는데 김종직은 죽은 이를 무덤에서 꺼내 다시 목을 베게 하는 부관참시를 당하게 되고, 김일손, 정여창 등이 죽거나 유배를 가게 되었다. 대쪽같은 심성 때문에 죽은 뒤 또 죽임을 당하는 수모를 겪게 된 것이다. 

 

함양군청 옆 함양초등학교 교정에는 오래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수령이 약 500년 정도로 점필재 김종직 선생이 손수 심은 느티나무라고 전해진다.  이 느티나무에는 김종직 선생의 아픈 사연이 전해진다. 함양 군수로 재임하던 당시 40이 넘어 아들을 보게 되는데 5살 때 홍역으로 그만 잃고 만다.

 

이듬해 임기를 마치고 함양을 떠나게 되는데 이때 이 아들을 그리며 느티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늦게 본 아들이었으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았을텐데, 어린나이에 부모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떠났으니 얼마나 안타까웠을 것인가! 아들을 잃은 슬픔이 그대로 전해지는 시가 점필재집에 남아 있다.
 
내 사랑 뿌리치고 어찌 그리도 빨리 가느냐/다섯 해 생애가 번갯불 같구나/어머님은 손자를 부르고 아내는 자식을 부르니/지금 이 순간 천지가 끝없이 아득하구나.

덧붙이는 글 | 함양 무박여행 추천코스
1코스
함양상림-학사루-지안재/오도재-실상사-백장암-서암정사-벽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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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상림-학사루-정여창고택-남계서원-농월정관광지(소실)-군자정,동호정-거연정


태그:#함양상림, #학사루, #최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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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자연과 역사를 느낄 수 있는 글과 사진을 남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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