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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블루스>의 오세은
 <더 블루스>의 오세은
ⓒ 오마이뉴스 안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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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은. 한 대중음악평론가는 그를 '숨겨진 한국대중음악의 전설'이라고 했다. 그러나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얼마 전까지 나는 그 '전설'을 몰랐다. 한 후배기자가 그가 새 음반을 냈다고 알려줬을 때 "오세은이 누군데?"라고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후배는 설명 대신 한 노래를 흥얼거렸다.

"지금은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다음에 또 만나요…."

'빠빠빠'로 시작하는 그 노래를 모를 수는 없었다. 70년대 말부터 거의 모든 유흥업소에서 문을 닫기 직전 '엔딩송'으로 울려 퍼졌던 노래. 세월의 흐름 따라 다방이 카페로, 고고장이 나이트클럽으로 간판을 바꿔 달고, 거기에 노래방이 더해졌지만 마지막은 변함없이 '빠빠빠'가 장식했다.

70년대 그룹 딕 훼밀리의 히트곡 '또 만나요'. '국민엔딩송'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노래의 작곡ㆍ작사가가 바로 오세은이라고 했다. 후배는 그에 관한 몇 가지 정보를 더 들려줬다.

오세은은 60년대 미8군 무대 등에서 밴드 활동을 했고, 70년대 중반 대학가에서 인기를 끌었던 금지곡 '고아'를 불렀으며, 이후 설악산에 들어가 국악 공부를 시작하고, 한영애ㆍ남궁옥분 등 후배가수들에게 자신의 노래를 주었으며, 80년대 초 국악과 가요의 접목을 시도한 음반을 발표하고, 몇 년 전 가족과 함께 불교음악 음반까지 냈다고 했다. 그리고 이제 환갑을 앞둔 나이에 직접 기타를 잡고 <더 블루스(The Blues)>란 독집 음반을 냈다는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 70년대에 금지곡을 부르고 설악산으로 떠났다는 대목이 귀에 확 들어왔다. 대체 어떤 인물일까, 궁금했다. 인터뷰 약속을 잡고 인터넷을 검색했다. '40년 음악인생'이지만 그에 관한 기사는 4페이지를 채 넘지 못했다. 다만 적은 수의 기사들에서 자주 눈에 띄는 '은둔' '칩거' '신비' '기인'이란 단어들이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듯했다.

블루스는 내 인생

광화문 한 카페에서 만난 오세은(59)은 어깨까지 내려오는 장발에 검은색 진 바지, 그리고 흰 운동화 차림이었다.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인다고 하자 "아이, 이젠 썩은 거죠. 나이 들면 슬픈 일 중에 하나죠. 할 수 없는 일이고,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고"라며 쑥스럽게 웃었다.

"머리는 30, 40년 묶고 다녔으니까. 예전엔 군발이 때문에 깎고 많이 못 길렀는데, 전두환이 그것 두 가지는 잘한 거 같아. 통행금지 없앤 거 하고 머리 안 자른 거 하고, 하하하."

인터뷰 내내 그의 얘기를 따라잡기가 쉽지 않았다. 그의 인생이 그러했듯이 그의 얘기도 자유로웠다. 질문을 벗어나 그의 얘기는 현재에서 60-70년대로, 다시 현재로,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71년 솔로 첫 음반을 낼 때나 지금이나 음악 하는 자세나 마음은 똑 같다"는 그에게 우선 최근 발매한 <더 블루스> 음반에 관해 물었다.

- 음반 타이틀이 <더 블루스>인데?
"처음엔 '블루스와 기타'로 하려고 했는데, 어차피 내 이름이 타이틀이니까. 제 인생을 모두 그 단어(블루스)에다가 함축시킨 거죠. 음악적으로도 전체 리듬이나 색채를 블루스로 하고…. 솔직히 저는 랩 음악도 하고 싶고, 테크노도 하고 싶은데, 지금으로선 이것 하나만도 무사히 끝낸 걸 다행이라 여기죠."

그는 그동안 로큰롤, 포크, 재즈, 레게, 펑키, 하드록 등 음악의 장르를 구분하지 않고 "계속 섞어가면서" 음악활동을 해왔다. 그러나 그 뿌리는 블루스였다. 이번 앨범에는 20대 때 처음 만들었던 블루스 노래 '나 혼자 외로워'부터 최근 만든 7곡까지 오롯이 블루스 스타일로만 11곡을 담았다.

<더 블루스>의 오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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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블루스에 뿌리를 두되 '지금까지'에선 홍키통크 록을 들려주고, '강'은 래그타임(Ragtime)으로, '서울'은 로큰롤 리듬으로 푸는 등 다양한 색감의 '블루스'를 선사한다. 아리랑을 변주한 '아리랑 블루스', 그리고 전혀 다른 느낌으로 '또 만나요'의 블루스 원곡도 만날 수 있다.

이번 음반의 모든 곡은 '언플러그드(unplugged)'로 연주됐다. 기타는 그가 직접 잡았다. 특이하게 전자기타나 통기타 대신 클래식 기타를 사용했다. 그는 클래식 기타를 '나이롱 기타'라고 불렀는데, "블루스 음악에 나이롱 기타 연주는 아마 국내에선 처음 시도하는 것일 것"이라고 했다. 왜? 대답은 다소 싱거웠다.

"나이롱 기타는 그룹을 하면서도 계속 쳐 왔어요. 저로선 나이 드니까 제일 편안하고, 나이가 들면 헤비메탈 록을 할 수 없걸랑요. 앰프 기타 들고 오래 못 있거든요. 꽤 무겁잖아요? 어깨 주저앉잖아요(웃음). 그래서 계속 나이롱 기타를 쳐왔고. 또 세상에 저밖에 못하는 사운드니까. 사람들이 괜찮구나 하고 들어주면 좋은 거고…."

[노래듣기①] '아리랑 블루스'

[노래듣기②] '또 만나요'


음반 작업에 함께한 세션들의 면면이 화려하다. 각 파트별로 내로라하는 김광석(어쿼스틱 기타), 김광민(피아노), 전성식(더블베이스) 등이 참여했다. 또 '신촌블루스'의 가수 이정선이 하모니카를 불었고, 김영준 서울신포니에타 음악감독이 바이올린을 켰다. 음반 재킷 사진은 사진작가 김중만의 작품이다. 그는 "선배라 무리한 부탁을 한번씩 하죠"라며, 그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화려한 세션이 함께 뽑아낸 선율은 오히려 소박하다. 장인이 빚어낸 질그릇처럼 그의 음반에서도 예스러우면서도 서툰 고졸미(古拙美)가 느껴진다. 자신의 인생과 생활을 꾸밈없이, 삶을 관조하는 듯한 목소리로 노래한다.

"기교도 많이 안 쓰고 가장 편안하게, 그래야 대중도 편안하게 들을 수 있을 거 같아요. 보통 녹음할 때 그림을 그리고 들어가잖아요. 그러나 이번엔 블루스란 코드만 가지고 노래도 만들면서 한 거거든요."

"가사를 쓰려고 해도 못 쓰겠더라구요"

오세은은 1948년, 청계천 일대의 상권을 쥐고 있던 부잣집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스스로 "부르주아 집안"이라고 했다. 부족한 게 없었다. "제가 막내아들이고 어렸으니까 천방지축이라도 귀여우니까 다 들어주고 그렇게 자랐죠."

초등학교 시절부터 기타를 잡았다. 3년 터울의 형이 클래식 기타를 치는 걸 "곁에서 같이 뒹굴면서" 배웠다. 중ㆍ고등학교를 거치면서 "팝송을 마구잡이로 주어 듣고 따라 불렀다". 비틀즈와 엘비스 프레슬리, 그리고 로큰롤 리듬이 10대의 그를 사로잡았다.

1966년 성균관대 법학과에 들어갔다. 그의 대학 시기는 한일협정 반대시위의 여파가 여전히 캠퍼스를 감싸고돌고, 베트남 파병이 이뤄지고, 부정선거(67년)가 자행되고, 통일혁명당사건(68년)이 조작되고, 삼선개헌(69년)이 강행 처리되는 어수선한 시절이었다.

"제가 법대 들어가서 제일 먼저 배운 게 뭐겠어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딱 해놨는데…."

그러나 그는 학생운동과는 거리를 두었다. 현실을 잊고 그저 기타를 치고, 음악이 하고 싶었다. 1학년 가을, 초등학교 때 친구가 그를 찾아와 함께 밴드를 하자고 권유했다.

"한 1주일 정도 연습했나? 당시 유행하던 곡 한 20곡을 가사 짧은 걸로 골라 막 연습하고 무대에 섰죠. 그리고는 학교는 강의시간만 나가고, 항상 이태원에서 살았죠. 이태원, 미8군 무대… 서울 시내 호텔에 친구들과 놀러 다니며 술 마시고. 보컬 하면서 여자 친구들 만나고, 미8군 들어가서 미군들이랑 친구하며 만날 놀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죠."

그는 당시 아이돌스, 훌라워스, 영바이블스, 라이더스, 메가톤스 등의 밴드에서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불렀다. 짧은 기간 많은 밴드를 전전했던 이유에 대해 "지금도 그렇지만 밴드는 만날 깨지고 뭉치는 게 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히피문화에 빠져 들었다.

"월남전이 터지고, 히피문화가 들어오고, 자유, 그런 사상에 꽤 심취를 했죠(웃음)."

오세은의 데뷔시절 기사. '포크로 전향해 데뷔했다'는 사진설명이 달려 있다.
 오세은의 데뷔시절 기사. '포크로 전향해 데뷔했다'는 사진설명이 달려 있다.
ⓒ 최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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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로 넘어오며 대학가에는 통기타 열풍이 불었다. 그도 통기타를 치며 포크 대열에 합류했다. 홍대 미대 출신의 포크 여가수 이연실과 함께 조인트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1972년에는 대학 시절 작곡한 노래들을 모아 첫 독집음반 <오세은 스테레오 선곡집>을 냈다. 음반은 록 사운드가 아닌 포크 계열의 노래들로 채워졌다.

- 록에서 포크로 '전향'한 셈이었나요?
"그렇죠. 다양하다고 말할 수도 있는데, 한마디로 말하면 줏대 없이 이리저리 한 거죠…."

그리고는 잠시 뜸을 들인 뒤 덧붙였다. "사실 음악은 다 똑같은 거예요."

그러나 음악적 갈증을 느꼈다. 1973년, 2집 <오세은의 노래모음>을 내면서는 포크를 버리고 블루스 록을 시도했다. 사운드에선 갈증을 어느 정도 풀었지만, 노랫말에선 갈증이 더 심해졌다. 포크의 '자유'든, 록의 '저항'이든 가사에 담을 수 없었다.

"단어 하나를 써놓으면 무조건 생각을 해야 되니까. 이게 걸리는 단어냐 아니냐. 그래야 발표를 할 수 있었으니까. 3집쯤 되니까 요령이 생겼는데… 그게 버릇이 되다 보니까, 창작에 한계가 있다 보니까 가사를 쓰려고 해도 못 쓰겠더라구요."

'고아' 금지곡 판정... 설악산으로

1974년, 이번엔 포크와 록을 섞어 3집 <고아>를 발표했다. 가사도 요령껏 썼다. 다만 한 방송국 PD의 권유로 "별생각 없이 취입한" '고아'가 문제였다. '고아'는 프랑스 가수 끌로드 제롬의 샹송(L'orphelin)을 번안한 노래였다.

"제가 만든 게 아니라 잊어버렸는데, 학생들 사이에서 꽤 많이 알려졌었나 봐요. 방송도 많이 타고, '월간 팝스' 같은 데선 1위도 차지했죠."

1974년은 '긴급조치 1호'와 함께 시작됐다. 시인 김지하는 "1974년 1월을 죽음이라고 부르자"고 외쳤다. 어둠의 시대, '고아'는 결국 금지곡 판정을 받았다. '지나친 비정' '불신감 조장'이 그 이유였다. 그뿐만 아니라 한대수ㆍ김의철ㆍ양병집 등 그해 음반을 발표한 가수들도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금지곡 가수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불온' 가요는 사라지고, 그 빈자리를 '건전' 가요가 채웠다.

'고아'를 방송에서 더는 들을 수 없게 된 것은 물론 음반도 전량 회수, 폐기됐다. 그렇기에 '고아'가 실린 3집 음반(LP)은 현재 마니아 사이에서 희귀음반으로 상종가를 기록하고 있다. 그는 갖고 있을까.

"저도 없어요. 몇 년 전 와이프가 눈이 똥그래져, 신문에 2백몇십 만이라고 나왔다고 (집안을) 뒤지고 난리를 치더니 껍질 하나 찾아내더라고요."

뻔한 질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슬쩍 물어보았다. 혹시 그 같은 조처에 저항할 생각은 안 했는지?

"전혀. 저는 뭐… 주로 자유, 피스(peace) 찾는 주의니까. 너는 그래라. 나는 딴 데 가서 놀 게. 알았어, 그러고…."

서울을 떠나 설악산으로 들어갔다. 강원도 고성의 흘리란 곳이었다. 당시엔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산간벽지였다. 저항도 못했지만 타협도 하지 않았다. 그는 도피를 택했다.

"그 당시엔 워낙 사회적으로, 뭐, 연예인들 대마초 사건도 있고…. 집에서도 20대 후반이 되니까, 만날 사고만 치고 돈만 달랑 가져가니까, 결혼하라고 (해서) 도피한 거죠."

한영애 솔로 데뷔의 배후

그는 설악에서 국악에 빠져 들었다. 서울을 오가며 김중섭 선생에게 대금과 단소를, 박동진 선생에게 창과 판소리를, 이양교 선생에게 시조를 배웠다.

"단소 매일 불고, 국악 공부하고, 기타는 항상 들고 다니니까 치고, 매일 살쾡이처럼 산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일이었죠. 저녁 때 시간 나면 명상하고. 특별히 머리 깎고 그런 생각은 안 했었는데 기공, 단학, 선… 별짓을 다해봤죠. 점쟁이는 점집 내라고 그러기도 하고."

- 국악에 관심을 갖게 된 까닭은?
"'고아' 내고 더러워서 못해먹겠다 그럴 때인데, 제 개성을 좀 찾고 싶었죠. 또 스케일은  커가지고, 제 노래가 비틀즈나 에릭 클랩튼처럼 전 세계에서…(웃음). 세계적인 것 하려면 우리 것이 먼저 몸에 배어야겠다고 생각한 거죠."

오세은의 독집음반. 1집 <오세은 스테레오 선곡집>부터 5집 <남사당>까지.
 오세은의 독집음반. 1집 <오세은 스테레오 선곡집>부터 5집 <남사당>까지.
ⓒ 최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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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 틈틈이 노래를 만들었다. '해바라기' 출신 한영애의 <작은 동산>(1978년) 음반을 기획, 제작하기도 했다. '설악산'(이후 남궁옥분이 리바이벌함) 등 자신이 만든 곡을 직접 연주했다. 그러나 음반에는 그의 이름이 어디에도 없다. '금지곡 가수'라 괜히 꼬투리를 잡힐까봐 자신의 곡을 친구이름으로 발표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그는 '숨은 고수'로 알려졌고, 동료 사이에서도 '기인' 취급을 받았다. "내가 잘 안 나타나니까 그런 거죠. 어울리지 않으니까…. 혼자서 잘난 척하다가 여태껏 아무것도 못 하고 그러고 살았던 거죠."

그의 이름이 다시 음반 표지에 인쇄되는 데는 7년이 걸렸다. 그 사이 '유신'이 막을 내렸고, 그는 결혼해 서울로 돌아왔다. 그는 1981년에 발표한 4집 <노래하는 나그네>에서 그동안 공부한 국악과 가요의 결합을 시도했다. 그렇지만 만족스럽지 못했다. 대중적 음악활동을 접고 다시 7년을 국악에 정진했다.

- 대중적인 음악 활동을 안 한 이유는?
"불만이 많은 거죠. 제 자신에 대한 불만도 있고, 사회에 대한 불만도 있고. 음반을 만들어도 내 마음에 안 드니까. 미술은 작품이 나와도 찢어버리면 되는데, 음반은 나와 버리면 그게 안 되잖아요. 한창 반성 많이 하고 새롭게 다시 한번 하자 해서 또 하고. 마음에 안 들고 대중이 호응을 안 해주면 또 접고…(웃음)."

블루그래스 주법의 독보적인 존재

1988년, 7년 만에 한국적 가락이 한층 농익은 5집 <남사당>을 선보였다. 기타-베이스-드럼-키보드-색소폰 등 서양악기로 '각설이타령'과 '한오백년' '진도아리랑' 등을 연주했다. 한영애가 보컬로 참여했다. 대중음악평론가 최규성은 <남사당>에 대해 "현란한 환상음악 특급 그 자체"라며 "(당시) 대중가요의 수준을 한참 뛰어넘은" '불후의 명반'으로 평가했다.

사실 그는 작곡가로서보다는 기타 연주자로서 더욱 뛰어났다. 김수철에 앞서 '기타 산조'를 실험했으며, 특히 블루그래스 기타 주법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1983년 블루그래스 주법에 관한 교본을 출판하기도 했다.

<더 블루스>의 오세은
 <더 블루스>의 오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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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요즘도 매일 2, 3시간씩 기타를 잡는다. 그렇게 안 하면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했다. 연주하는 손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무거운 건' 들지조차 않는다. 현재 사용하는 클래식 기타는 수천만원을 넘는 '명품'이다. 그래서 아내에게 미안하다.

2005년, 아내와 딸과 함께 <보현십원가>란 음반을 냈다. 공교롭게 이번에도 7년 만이었다. 고려초 고승 균여 스님의 향가에서 노랫말을 가져왔다. 힙합그룹 드렁큰 타이거의 타이거 JK도 참여해 '여래를 찬미하네'란 곡에 랩을 곁들였다.

"가사를 못 썼잖아요. 남이 쓴 글을 자꾸만 보다 보니까 '보현십원가'란 향가가 기억에 남더라구요. 당시엔 고 양주동 박사가 쓴 거 밖에 없더라구요. 한학자에게 번역해달라고 그러며 한문하고 원문하고 찾아서 정리해봤어요. 시간 날 때마다 들여다보니까 어느 날 가사가, 부처님 말씀이 구구절절이 가슴에 와 닿는 거예요."

그는 오세은 대신 '오무산'이란 이름으로 음반을 발표했다.

"제 생애에서 제 역할이 사람들한테 좋은 뜻을 알리고 퍼뜨리고, 그걸 중계하는 역할이라더라구요. 이번 생애에 음악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보시하고, (기독교에서) 십일조 하듯이 제가 음성 공양 한번 해봐야겠다 싶어서… 이 정도면 부처님이 음성 공양했다고 하시겠지, 하는 마음으로 한 거죠."

"마지막까지 자유롭고 싶다"

현재 그는 청평에서 살고 있다. 그곳에 자리 잡은 지 5년가량 됐다. 지난해엔 동덕여대 방송연예과에서 뮤지컬 음악을 강의했다. 약 150명의 학생들이 수강했다. 그 가운데 아이비도 있었다. 제자에 대한 애틋함이었을까, 아니면 대중과 멀리 떨어져 지내야 했던 자신의 아픔이 새삼 떠올라서였을까. 그는 아이비의 활동 중단에 대해 무척 안타까워했다.

"아이비 요새 보면 딱해 죽겠어. 수업도 열심히 잘 들어오고 그랬었는데. 가수가 뜨는 시기가 있거든요. 연예인이란 게 다 시기가 있는 건데, 한 단계 올라가려고 그러다가 한 단계 떨어져가지고…. 게다가 그 이미지를 평생 짊어져야 하니까…."

<더 블루스>의 오세은
▲ "자유롭게 살고 싶다" <더 블루스>의 오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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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더 블루스> 음반에는 '아직은'이란 곡이 실려 있다. '아직은 끝이 아니야 / 살다보면 언젠가는 끝나겠지만 / … 아직은 길을 가야 해 / 가는 길이 힘이 들고 멀다고 해도 / 내가 가야 하는 길이 이 길이라면.' 그가 가고자 하는 길은 어디로 향할까.

"그건 뭐 자아를 찾는 길이죠. 저는 그것밖에 없어요. 남들이 보면 '또라이' 같고 이상하고 그렇죠. 이러고 (자신이 신은 흰색 운동화를 보여주며) 큰 그룹 회장실에 친구라고 그러고 가 봐요. 저 아저씨 뭐야 하고 뛰어 나와요(웃음)."

- 음악적으로는?
"이제는 정리하는 일 밖에 없죠. 지금까지 해왔던 음악들을. 음반도 체력이 받쳐주면 더 내겠지만 이번 거 끝낸 거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기고. 내년까지는 라이브도 해보고… 젊은 애들한테 평생 블루스 하는 사람도 있다는 걸 보여줘야죠."

그러면서 "언제 끝날지는 모르지만 마지막까지 자유롭게 사는 게 꿈"이라고 덧붙였다.

"워낙 음악뿐만 아니라 사회생활 모든 것 자체가 억눌림 속에서 살았으니까. 봉건사회 속에서, 독재 속에서 억눌리면서 살았으니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지금은 블루스 스타일로 내 것만 하려고 하니까 오히려 마음이 편해요. 어울리지 않아도 되고."

대중음악평론가 최규성은 그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이 땅에서 진정한 음악의 탐구는 천형일까? 당대에 유행하는 주류 음악이 아닌, 삐딱한 음악을 추구하는 뮤지션은 어김없이 무관심과 생활고라는 가혹한 2중고를 각오해야 한다. 음악 업적보다 인기 여부가 모든 음악의 평가 잣대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그러진 후진적 가요계의 음악 환경은 뛰어난 뮤지션들을 자의반 타의반으로 고독한 은둔의 습지를 내몰아왔다. 오세은은 그런 뮤지션들 중에서도 으뜸이다."

<더 블루스>란 음반으로 조심스럽게 세상과 '또 만나기'를 소망하는 오세은. 자유를 갈구하는 그의 영혼이 다시 '고독한 은둔의 습지'로 내몰리지 않기를! 더불어 그가 진정 자유롭고자 한다면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도 헤아릴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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