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한(전 KIA 감독)의 별명은 '오리궁둥이'다. 다른 신체에 비해 유독 엉덩이가 돌출 되어서 그런 게 아니라 선수 시절 방망이를 뒤로 눕혀 엉덩이를 뒤로 빼는 독특한 모습에서 오리궁둥이란 별명을 갖게 되는데 김성한 자신은 이 별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선수들의 별명은 팬들이 만들어 주는 것이 대부분인데 대체 왜 김성한은 자신의 별명을 좋아하지 않았을까?

'탱크' 박정태, '리틀쿠바' 박재홍, '헐크' 이만수, '양신' 양준혁, '캐넌 히터' 김재현, '스나이퍼' 장성호 등 지금 까지 한국프로야구를 대표하던 타자들의 별명들은 각자 야구하는 스타일과 야구를 잘한다는 의미에서 얻어진 별명이지만, 김성한은 신체의 특정한 부위(?)로 인해 붙여진 별명이라 싫어했던 건 아닐까 하고 추측해 본다.

그 역시 한국프로야구사에 길이 남을 굵직굵직한 기록을 남겼으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최고의 선수라 자부하는데 고작 별명이 '오리궁둥이'라니…. 아마 그도 '타격의 달인' 장효조처럼 멋진 별명을 가진 선수들이 부러웠으리라.

 85년 정규시즌 MVP의 김성한,그리고 역시 같은해 신인왕을 차지했던 이순철

85년 정규시즌 MVP의 김성한,그리고 역시 같은해 신인왕을 차지했던 이순철 ⓒ KIA 타이거즈


82년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한 김성한은 당시 열악한 팀 구성(도합 14명의 선수)상 고정된 포지션이 없었다. 주로 3루수를 맡긴 했지만, 던질 투수가 부족하면 마운드에 오르기도 했고 1루수로 갔다가 유격수를 맡기도 하는 등 한국프로야구 원조 '멀티 플레이어'였던 셈이다.

하지만 어느 포지션에 있던 그 역할을 십분 발휘했으며, 그 역시 82년을 기억할 때면 가슴에 멍자국이 가실 날이 없었다고 회상한다. 지금 기준으로는 다시 보기 힘든 선수 중 한 명임이 분명했다. 그가 남긴 수많은 기록 중에 앞으로 절대로 깨지지 않을 타점왕-투수10승(82년) 기록도 팀 여건이 만들어낸 희귀 기록이지만, 그만큼 투타에서 모두 자질을 가지고 있던 선수였기에 가능한 기록이었다.

85년까지 투수로만 167이닝 평균 자책 3.02 15승 10패 2세이브, 15승 중 구원승이 10승 선발승 5승(선발로 등판경기 모두 완투승, 그중 2완봉승 포함). 82년 10승, 83년 1승, 85년 4승을 기록, 웬만한 투수들은 명함도 내지 못할 성적을 남긴 것이다.

김성한의 선수 시절을 기억하는 많은 팬들은 초창기 프로야구 흥행돌풍을 일으키게 한 삼성의 이만수(현 SK코치) 선수와의 타격 경쟁을 빼놓을 수 없다. 물론 전성기를 한참이나 지나고 프로야구가 생기는 바람에 프로에서의 선수생활이 짧았던 김봉연(현 극동대 교수) 선수가 이만수의 첫 라이벌이었지만, 같은 해에 입단해 비슷한 시기에 은퇴를 한 (김성한 95년, 이만수 97년) 이만수-김성한의 대결이야말로 진정한 라이벌이다고 할 수 있다.<다음 이만수 편에서 자세히 언급할 예정>

김성한의 선수시절 수상 내역을 보면 정규시즌 최우수선수(MVP) 2회 수상(85년, 88년) 올스타전 MVP(92년) 홈런왕 3회(86년, 88년, 89년) 최다타점왕 (82년, 89년) 골든글러브 6회 수상(85~89년, 91년)을 했으며, 프로야구 최초 1000안타, 최초의 20-20 클럽창설(88년) 정규시즌 최우수선수(MVP)와 올스타전 MVP를 모두 수상한 최초의 선수이자 7번의 한국시리즈에 모두 참가하여 기록한 한국시리즈 최다안타(30개) 최다 2루타(8개) 최다홈런(4개) 최다득점(23점) 기록을 지금까지 보유 중이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91년 첫 한-일 슈퍼게임은 김성한의 진가, 아니 한국프로야구의 매운맛을 보여주는 쾌거로도 기억된다. 이미 역사가 깊은 일본 프로야구에 비해 태동한 지 겨우 10년 밖에 되지 않았던 당시 한국은 일본 프로와 비교해서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지, 그리고 얼마만큼의 차이를 보여줄 건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하지만 당시 일본야구에 무지했던 국내 팬들에게는 과연 어떤 선수가 선전을 펼칠지에도 큰 관심거리 중 하나였다.

1차전은 요미우리 자이언츠 홈구장인 도쿄돔에서 펼쳐지는데, 1회 선두 타자 이정훈(당시 빙그레)의 깨끗한 안타로 출발은 좋았다. 그러나 상대 선발 투수였던 구와타의 구위에 막혀 경기 중반부터는 거의 일본의 페이스였고, 당시 해설을 맡았던 하일성(현 KBO 사무총장)씨는 "역시 다르네요"라는 멘트를 남발하며 그렇지 않아도 답답해하던 한국팬들에게 일본야구 수준을 더욱더 두렵게 만들었다.

한국팀의 다소 루즈한 시합이 전개될 쯤 7회부터 이라부가 등장한다. 당시 이라부는 158km를 상회하는 무시무시한 페스트볼을 가지고 있던 선수였는데, 등판하자마자 이만수, 박정태, 이정훈을 깔끔하게 삼자범퇴시키며 이닝을 마무리하더니, 8회에는 이순철 대신 대타로 등장한 장효조까지 삼진으로 틀어막아 버린다.

장효조가 누군가? 당시 전성기를 조금 빗겨갈 나이 때였지만 누가 뭐라해도 한국프로야구 최고의 교타자라는 자부심이 있던 선수가 아니였던가? 그런 장효조가 삼진을 당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 구겨졌던 자존심을 회복하는데 얼마의 시간도 필요하지 않았다. 다음 타자로 등장한 김성한은 이라부의 155km 강속구를 통타해 일본의 심장인 도쿄돔 상단에 공을 꽂아 버린다. 이때까지 한국이 기록한 안타는 모두 단타였고,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필자는 일본 투수들이 무서웠다. 한국에서 슬러거들이라 불리던 장종훈, 한대화, 이만수, 장채근의 방망이가 침묵을 지키고 있었으니 말이다. 어차피 경기는 질 것 같고, '누가 홈런이나 하나 날렸으면 시원하겠다'라고 생각했음은 물론이다) 생전 처음보던 포크볼에 연방 헛방망이질만하던 한국팀에게는 그야말로 통쾌한 순간이었다.

비록 경기는 8-3으로 한국이 완패했지만 이날 저녁 뉴스에서 나왔던 아나운서의 멘트를 필자는 지금도 기억한다. "해태의 김성한 선수가 한국야구의 자존심을 세웠습니다"라는 말을….
                                  
 일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김성한의 배트

일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김성한의 배트 ⓒ KIA 타이거즈


이후 김성한은 3차전에서도 4회 홈런을 기록했으며, 4차전에서도 역시 홈런 1개를 포함해 4타수3안타 3득점 2득점을 추가 6차전까지 열렸던 첫 한일슈퍼게임에서 총 3개의 홈런과 .304의 타율을 기록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명예스러운 기록을 남기게 되는데 김성한 선수가 홈런을 쳤던 방망이가 '일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것이다. 한국프로야구 선수로서는 최초의 기록을 또다시 만든 것은 물론, 일본 야구관계자와 팬들에게 '김성한'이란 이름 석 자를 단단히 인식시켜 버린다.

이처럼 김성한은 1995년 은퇴하기까지 한국프로야구가 생긴 이래 최고의 만능 플레이어 중 한 명이었다. 선수로 활약할 때 팀을 7번이나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시켰으며, 은퇴 후 코치로서도 우승(97년)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또한 각종 타이틀은 물론이고 한국프로야구사에서 30홈런(88년) 시대를 연 첫 주인공이기도 했었다.

은퇴 후 지도자 시절에는 올 시즌 FA가 된 이호준 선수를 비롯해 장성호, 김창희 등을 키워 냈으며, 해태의 마지막 사령탑이자 KIA의 초대감독(2004년 7월 26일까지)으로서 좋은 성적을 남겼다. 감독에서 물러난 후 모교인 군산상고 감독으로 취임해 과거의 영광에서 한발짝 물러난 팀을 전국대회 4강으로까지 이끌었다.

지금은 해설가, 한국야구위원회 기술위원, 올림픽대표팀 상비군 코치를 맡고 있다. 하지만 그는, 언젠가는 다시 그라운드로 복귀해 선수들을 지도해야 되는 사람이다. 지도자로서의 재능을 지금 이대로 방치하기엔, 아직도 그의 도움을 받고자 기다리는 각 팀의 타자 유망주들이 많기 때문이다.

한국야구 발전을 위해 지금 그가 절실할 때다. 물론 방송국 마이크가 아닌 현장으로 말이다.

이젠 김성한을 `오리궁둥이'로 기억하지 말자. 이 별명을 대명사 하기엔, 그가 한국프로야구에 남긴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다음 2편에서는 삼성 라이온스의 영원한 영웅 `헐크 이만수' 편을 써볼까 합니다.]


이기사는 데일리안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김성한 장종훈 이만수 장효조 이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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